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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위험을 감수하는 환대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기꺼이 불편한 예배/김재우/이레서원/정현욱 편집인
교회란 뭘까? 동일한 질문을 수십 년 전부터 던졌지만 아직도 하는 것을 보면 답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답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몸이니, 진리의 터이니 하는 식의 답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왜일까? 정의된 교회와 살아내는 교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간격이 얼마나 큰지 마치 전혀 딴 세상 같다. 신앙생활이란 고백과 실천 사이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성경에서 제시한 교회는 천국이요 완전한 공동체로 보이지만 실제 교회는 정글이다. 경쟁과 반목,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다.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일까?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 부제는 명확하게 책의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공동체는 ‘환대하는 공동체’이며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책은 완벽한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니며 예배에 대한 학문적인 내용을 다룬 글도 아니다. 다만 한 예배자의 고민과 여정을 담은 글이자,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아닌 여전히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그네는 이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있다.”(9쪽)
저자는 예배 인도자이며 미국 조지아주의 클라크스턴에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사역중이다. 클라크스턴은 다양한 이주자들과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특이성과 다양성이 평범한 곳에서 바라본 교회는 어떤 곳일까? 사뭇 궁금하다.
유럽이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교회에 출석한 여성들에게 속옷을 입으라고 해서 큰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 지역에서 여성들이 속옷을 입는다는 것은 창녀가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복음과 문화를 구분하지 못했던 시대의 실수이다. 하지만 복음과 문화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민족 안에 임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문화의 옷을 입으셨던 것처럼 모든 예배는 동시 문화의 옷을 입는다. 어디서 누구와 예배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예배가 성경적인 예배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문화의 옷을 입지 않는 성경적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22쪽)
저자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고, 유대 문화 안에서 활동하셨고, 유대인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인물이다. 문화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2000년 전의 인물을 우리는 구주로 믿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이 단지 한국 사람들뿐이겠는가. 복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있으나 또한 문화를 초월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진정한 예배는 문화의 옷을 입으나 문화를 초월해야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잘 기획된 예배가 아니라 참된 예배자’(30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적이란 착각을 벗어 던지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주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보게’(33쪽)된다. 백인들에게 예수님은 백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흑인들에게 예수님의 얼굴은 검다. 구한말 시대에 기독교가 전래 되었을 때 조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갓을 쓴 양반으로 인식했다. 운보 김기창은 이러한 정서를 반영하여 갓을 쓴 예수님을 그렸고, 한복 저고리를 입은 마리아를 그렸다. 예수는 유럽에서만 예수님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이시다.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결코 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양한 나라 출신이 모여 예배하니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그날 아랍어로 찬양이 있었다. 아랍어로 ‘알라’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인데 미국 사람들은 911테러 이후 반아랍 정서가 굉장히 강해져 있었다. 그런데 아랍어 찬양 중에 ‘알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하필이면 그날은 미국이 정한 애국 주일이라고 한다. 결국 한 팀원이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책은 정교한 신학적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소개 글처럼 현재 여기에서의 삶을 담고 있다. 문화가 다른 예배자들의 이야기, 난민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다. 사실 난민은 가난해야 한다는 저자의 물음에 뜨끔했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향한 선입견을 버려야’(114쪽)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162쪽)이란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환대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또한 용기도 필요하다. 환대에 대한 글을 인용하여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싶다.
“환대는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환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에게 베풀다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환대는 분별력과 지혜, 수력된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 이상의 용기도 필요하다. 상처 받을 용기,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을 용기, 오히려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용기.”(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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