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십자가, 주 예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고난의 길
십자가, 주 예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고난의 길
우리시대에 대표적인 간서치는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인 “정현욱 목사”일 것이다. 간서치(看書痴)는 독서를 위해서 책과 사는 서치(書癡, 독서광)이다. 간서치는 슬프게도 책에는 부자이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처지이다. 간서치가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많은 도서를 소유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학자가 엄청난 양의 도서를 소유하고 있기에 ‘간서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이웃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인문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 정현욱 목사의 글을 보면 독서 핸들링, 광폭의 독서가 느껴진다. 우리사회와 교계는 간서치가 갈증이 나지 않을 만큼의 도서를 제공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정현욱 목사가 마르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서평을 보면 정말 흥미롭다. 헹엘의 <십자가 처형>이 1982년에 대한기독교서회의 현대신서 122번으로 출판된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헹엘은 우리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학자이다. 그래서 40여년 전에 출판되었어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세윤 교수가 헹엘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김세윤의 『바울 복음의 기원(The Origin the Paul's Gospel)』을 추천하기도 했다. 감은사에서 산뜻한 디자인으로 소개될 때에 좀 더 많은 독자들에게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 1926-2009)은 Was Jesus a Revolutionist?, 고범서 역,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서울: 범화사, 1983)의 저서에서 예수를 열심당 운동과 관련시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예수는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주장한다(김영한 교수의 정리). 예수가 폭력적 혁명가가 아니라, 비폭력적 혁명가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마르틴 헹엘의 <유대교와 헬레니즘>은 1-3권으로 박정수가 번역하여 나남(2012년)에서 출판했다.
마르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은 ‘십자가’에 ‘처형’이 부가된 것처럼, 처참한 십자가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의 극악무도한 처형 상황을 묘사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일까? 헹엘이 십자가 처형의 잔인하고 비참하고 비인격적이고 모욕적인 처형이라는 것을 짧은 글이지만 정확하게 제시했다.
그런데 헹엘은 십자가를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뉘소스 개념으로 분류했는데, “십자가에서 처형된 신과 십자가에서 처형한 신”으로 분류했다. 두 개념이 십자가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정일권 박사가 분석한 <르네 지라르의 십자가의 인류학>(대장간)에서 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나 디오뉘소스 모두가 ‘처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수준으로 헹엘은 제시하는 것 같다. 르네 지라르는 십자가를 디오니소스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프로메테우스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헹엘은 1세기 예루살렘 골고다 십자가 처형을 분석하는 것보다, 로마 시대에 행해졌던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골고다의 십자가만을 이해하여 복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고전 1:18)”가 “골고다의 십자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헹엘의 <십자가 처형>은 정현욱 목사가 제시한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유익을 줄 것이다. 십자가의 아픔과 처참함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