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김성욱개혁신학을 사랑하여 관련 서적과 교회사를 통해 신앙선배님들이 걸어갔던 발자취에 관심이 많고, 조국 교회에 참된 말씀으로 인한 부흥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소재 삼송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중고등부 부장을 맡아서 봉사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김성욱 | 2019.10.28 23:55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사사기 12:3‭-‬6)



본문을 묵상하며 몇가지를 생각했는데 하나는

자연인의 전적 무능력입니다.

본문은 길르앗에 좇겨 요단 나루턱 앞까지 내몰린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의 생사가 걸린 문턱에서 길르앗이 요구하는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구음을 하지 못해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여 4만 2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이미 패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아마도 나루턱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길르앗 군사들

앞으로 차례대로 걸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앞선 자신의 동료들이 구음을 하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떻게 해서든 발음을 해보려

노력 했을 것이고, 곧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연인들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조차 없지만

설사 마음이 있더라도 행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최선의 선행의 모양을 흉내낼 수 있지만 내면은 자기 사랑(이기심)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종노릇 하고 죄의 오염에 깊이 잠식되어 있는 죄인들의 너무나 비참한 상태입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상황이 그려집니다.

지상의 유형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참된 성도와 불신자 그리고 종교적인 위선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심판 때까지 이 둘이 섞여 있도록 두고자 하셨습니다(마13:29-30).



그러나 심판의 날은 다릅니다.

죽음 이후에 서게 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분명하게

알곡과 가라지가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한쪽에는 구원의 백성이, 다른 쪽에는 멸망하기로 정해진 자들이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그리스도의 자비하심도 심판대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오직 선악간에 엄정한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간구하던 그리스도의 외침이 외면 당한 것처럼, 심판대에서 마지막 자비를 외치는 악한 죄인의 간구는 묵살당할 것이고, 때늦은 후회 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증표를 보이라는 요구에

'십볼렛'이라고 대답 할 수 있는 자만이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 땅 위에서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교리적인지 실제적인지 그것이

경험적인지 늘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고백으로 만족할 것인지

그래서 머지 않은 주님의 심판대를 무시하고 종교적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것의 위험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성경이 죄를 책망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즉, 세상이 아닌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단지 이 땅 위의 것들이 신속하게 지나간다고 말하고,

죽음 이후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임할 엄중한 심판 앞에 구원의 증표가

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모든 것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거룩한 재판장 앞에 서게 됨을 진정 전인격적으로 안다고 한다면 즉시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작금의 시대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이 아닌 지탄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내에 거듭난 성도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음의 부재, 사랑의 부재, 경건의 능력의 부재,

세상을 섬김의 부재... 조금만 마음을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지금의 교회에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씹볼렛을 말하면서 십볼렛이라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늘! 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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