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송광택 | 2017.11.03 23:02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티모시 켈러 지음, 복있는사람)

 

참된 자유의 길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롭게 된 마음의 표지는 무엇일까?”라고 묻고 답한다.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숭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두려움이나 자존심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 권력을 향한 욕구에 사로잡힐 때 역시 온갖 종류의 고상하고 도덕 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살펴보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롭게 된 마음에 대해서다. 이 문제를 탐구하기 의해 저자는 고린도전서 3:21-4:7을 다룬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낼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파당이 생겨났고 의견의 차이로 교회가 갈기갈기 찢길 위험에 처했다.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마다 탁월한 선생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들먹이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당을 짓고 서로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마음의 교만과 자랑에서 찾았다. 교만과 자랑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함께할 수 없다. 세상에 화평이 없고 서로 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자존감(self-esteem)이라고 하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자만심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문화에는 그런 믿음이 있다).

세상에 범죄와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사람에게 있는 오만함(hubris)을 그 대답으로 꼽는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교만 혹은 자만심을 뜻한다. 자고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해 현대 서구문화는 이와 정반대로 대답한다. 현대 교육의 원리, 죄수들을 대하는 방식, 대부분 입법의 토대와 현대 상담의 출발점은 위와 같은 전동적인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믿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일을 이런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존감이 사회 문제의 중대한 원인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보다 주변에 더 큰 위협이 된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많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가 처한 상태는 공허함이다. 이 이미지는 인간 자아의 중심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마음의 상태라고 말한다. 이것이 영적 교만이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 낼 수 있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삼을 만큼 중요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삶의 토대를 삼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한니다.

또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 자아는 늘 분주하다. 텅 빈 자아를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로 여념이 없다. 특별히 비교하고 자랑하는 일로 분주하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교만은 본질상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교만의 중심에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

바울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좀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내놓는 처방은 단 하나뿐이다.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놀라운 사람인지를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들을 이루어 왔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접근법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나 세상 법정의 판단에 연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울은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C. S. 루이스가 잘 지적했듯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말한다, 복음을 통해 진정으로 겸손해진 사람은 바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충일하다. 복음적 겸손의 핵심은 자신을 더 생각하거나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생각자체를 덜 한다는 데 있다.


복음적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물을 자신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이 좋게 보일까? 지금 내가 여기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복음적 겸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경험과 대화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 짓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친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누리는 복된 평안이 있다.


참된 복음적 겸손은 부풀려지지 않았지만 가득 채워진 자아를 말한다 이런 자아와 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은 애초에 자존감을 둘러싼 온갖 말의 유희에 빠져들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제게는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겸손의 비밀이다.

참으로 복음적 겸손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복음을 통해 겸손해진 사람이다. 복음으로 겸손해진 사람의 자아는 그냥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는. 우리가 걸을 때 발가락이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의 자아도 그렇다. 날 좀 알아달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대견해 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비판을 들어도 아연실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이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무신론자들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자아상의 목적으로 삼는다. 실제로 이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평결을 얻기를 바란다. 행위가 평결로 이어진다. 불교도들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교도들 역시 행위를 통해 판결을 받는다.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법정 앞에 서는 날이요 재판을 받는 날이다. 이것이 문제다. 하지만 로마서 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한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가 직접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신다고 말한다.

평결은 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평결에 따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으셨기 때문에 나만의 이력을 쌓기 위한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 게 좋은 평결을 받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순전히 즐거움 때문에 일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돕도록 협력할 수 있다.

이제는 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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