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코메니우스의 청년기 학교와 오늘 기독교 대학의 방향성

안영혁 | 2003.11.26 00:36
(코메니우스 연구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대안학교가 큰 주제였는데, 저는 기독교 대학의 방향에 대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서론
  교육은 그 자체로서는 사회의 한 부문이면서도, 그 내용은 전체를 담고 있다. 이것이 교육의 가장 큰 특성이다. 이른바 대안학교가 거론되는 것은 이 부문성과 전체성의 간격을 어떻게 좁힐까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떻게 마을의 한 빵집 아저씨를 생활 교육 시간 교사로 초청할 것인가? 혹은 언어교육은 어떻게 하면 실제적이며 네이티브에 가깝게 할 수 있을까? 자연의 나뭇가지와 풀과 열매들로 우리는 어떤 아름다운 공작을 해낼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철학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교육 일반에서 영성을 추구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등등. 대략 대안학교들은 지성 교육에 치우친 교육을 감성교육과 생활교육에까지 확장시키려 하고, 보다 영감이 있는 경우 영성 교육이 교육에서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성 없는 교육이 참으로 무미 건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가 알려졌고, 영국의 섬머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부모들의 공동육아로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까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이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복을 지키려는 대안학교 운동이 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계속되어 왔다. 그러는 와중에 기독교 대안학교들도 출범하였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사회 최고봉의 교육기관조차 대안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받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대학에 대하여는 보호라는 관점보다는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갖게되는 내용이 기존의 대학과 현격히 다른 세계관 위에 서는 것이라면 대안 대학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머쓱하고 생경한 말보다는 차라리 기독대학의 방향이라는 말을 가지는 것이 우리로서는 적절할 것 같다. 이미 기독교 대학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어왔고, 그런 가운데 세워진 학교도 있다. 또한 그 안에서 새로운 모색을 해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 우리가 이런 기독대학의 현황에 대하여 이념에 대하여 분명한 기초적 잣대를 가지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 잣대를 가지고 미래를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가지고 보다 의미있는 잣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코메니우스를 잣대로 사용하려 한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코메니우스를 다시 보려고 한다. 바로 이 일을 통해서 우리의 잣대를 좀더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도 이런 관점을 따라 진행시키려 한다. 1.먼저 잣대가 되는 코메니우스의 교육론을 소개하겠다. 최소한의 기본철학과 대학과 관련한 그의 교육론을 소개하겠다. 2.다음으로는 그 잣대를 오늘 우리의 대학 내지는 지향하는 대학에 적용시켜보려 한다. 그 적용을 위해서는 적용 대상이 되는 오늘 우리의 대학과 대학의 배움의 대상인 사회를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독 대학을 기획하는 우리의 교회를 살펴보기로 하자. 3.그 다음으로는 개혁의 과제를 살피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코메니우스와 함께 우리의 대학은 어떤 지향을 가져야할 것인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개혁보다는 실은 교육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은 교육 제도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또한 세계의 개혁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코메니우스가 교육을 통하여 세계를 개혁하려 했다는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코메니우스의 개혁적 교육론
①개혁론자 코메니우스
코메니우스는 사태가 어떠하다는 것보다는, 그래서 세계는 어디로 향해야한다는 관점을 강하게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로 개혁론자였다. 그는 종교개혁은 미완의 개혁이며, 세계 전체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자유에의 갈망은 개혁에의 갈망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의 개혁론으로 교육학을 취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성장 세대의 존재와 인식과 행위 모두를 새로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가 개혁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코메니우스는 교육을 통하여 모든 사물을 올바른 위치에로 되돌려가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를 향해서 교육을 맹신했다거나, 교육의 몽상가라거나 하는 말로 일컫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현실적 맹신과 몽상을 우리는 매일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며, 오늘 그래서 무슨 할 일을 우리에게 부여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는 세계의 개혁을 지향하였으며, 교육이라는 구체적 과제를 주었다. 이 안에서는 교육의 부문성과 전체성이 분명하게 통합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의 개혁적 교육관은 근원적으로 대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개혁을 지향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대안적인 교육관인 코메니우스의 교육론, 그것을 기억하자.

  특히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생애에서 깊은 통찰을 얻는다. 그는 한가하게 교육을 논하고만 있을 사람은 못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타향을 떠돌아야 했으며,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에서는 마침내 그가 속한 형제단 교회가 독립 교회로 인정받지 못함을 확인해야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말하자면 평생을 약자로 이 땅을 살았다. 그는 이 땅을 약자로 살면서, 정말 약한 자들도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그가 어떤 부국 강병론도 아니고 교육론을 가졌던 것은 눈물겨움 그 자체이다. 어떤 강함도 교육의 강함만큼 보편적이고 평화적일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불안한 시대에 가장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 숙고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묵묵히 참으로 묵묵히 그 과제를 수행하여 갔던 것이다.

②코메니우스의 세계관
  그의 세계관은 극히 교육적이며 친절하다. 그는 자신의 분류 중 많은 경우에 삼위일체를 기초로 하여 셋으로 나누는 방식을 취하였다. 세계관의 기본적인 물음은 세계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이다. 그는 그냥 세계에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범지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세 권의 책으로 보았다. 그 첫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피조물로 이루어진 창조 세계이고, 둘째는 우리 안에 있는 이해력의 진리와 함께 있는 정신이며, 셋째는 우리 시대 이전에 이미 말씀으로 저술된 성경의 계시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분화가 애매하게 되어있다고도 할 만하다. 창조된 사물의 세계는 보다 존재론적이고, 반면 인간의 정신이나 하나님의 계시는 보다 인식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미분화라기보다는 존재의 특성에 근거한 분류로 보인다. 인간의 정신이나 성경의 계시는 그것을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알아보는 것이 우선되지만, 그것이 실체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주 질박하게는 자연세계, 인간세계, 하나님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피조세계, 정신, 그리고 계시로 나뉘는 세계분류는 존재와 함께 그 특성을 드러내는 세계관 표현인 것이다.

그의 존재론은 역동성을 가졌다. 이런 세계의 존재 자체는 우리에게 일종의 운동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의 정신은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도구로서 충분하다. 그 정신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가진 피조 세계란 말할 것도 없이 역동적이다. 그 역동의 목표는 이미 말한 바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에로 되돌아감이다. 그래서 코메니우스의 세계관은 기본 마련이 개혁적이다. 그가 지식을 일컬을 때 Theoria Praxis Chresis 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세계관의 기본 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론적 지식은 말할 것도 없이 실천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그 실천적인 것은 잘못된 실천임이 드러날 때 개정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개정을 그칠 때 우리의 인식은 이른 바 통전적이며 바른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시스는 사물의 사용에 있어서 이론과 실제와 목표를 향한 올바른 사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개혁은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면 총체적 크레시스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모든 학생들이 바로 이런 크레시스에 이를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크레시스에 도달하게 될 때 사회는 절로 개혁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이다.

③코메니우스의 청년기 학교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서 드러나는 청년기 학교의 상은 매우 간결하다. 아카데미아, 아포데미아, 직업준비학교가 그것이다. 아동기에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제가 수행되고, 청소년기에는 세계를 만나는 핵심이라 할 철학과 정치학과 신학에 돌입한 후, 청년기에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포괄하여 인간에게 유익한 열매를 맺는 것이 이 시기 교육과 성장의 목표이다. 범교육학에서는 이 시기들의 교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동기는 식물들이 꽃으로 치장하게 되는 4월과 비교되고, 청소년기는 모든 열매가 나기 시작하고 성장하는 5월과 비교되며, 청년기는 모든 종류의 열매가 익어서 처음으로 맛을 보게 해주는 6월과 비교된다고 하였다. 청년기 학교는 말하자면 열매가 익어서 따먹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익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 총체가 다 이루어진 것이다.

준비의 총체적 완결에 이르는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제를 갖게 되는가? 코메니우스는 청년기학교는 아카데미아, 아포데미아, 직업선택의 과제가 주어진다 하였다. 아카데미아는 완전한 지혜의 달성을 목표로 한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아카데미아와 관련하여 보다 완연한 빛 가운데 놓이도록 이끌라 한다. 비교양적인 인간의 정신은 암흑과 혼돈에서 연원하며 반대로 바르게 형성된 정신은 빛과 질서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이런 기술들 속에서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육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범지학이 완결적으로 꽃피는 시기가 이 시기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이 시기에는 사물과 순수한 실천에 대한 접근을 하여야 한다고도 한다. 이런 말을 들어서 칸트의 순수이성과 비견할 수는 없겠으나, 청년기 학교에 대하여 처음 말을 꺼내면서 오성의 성취를 말한 것과는 닿는 데가 있다고 하겠다. 이로 보건대 아카데미아의 보다 기본적인 요소는 이미 있는 학문들의 내용들에 순수한 오성으로 연역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자연과 정신과 성경이라는 세가지 책에 완결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카데미아의 총체적 과제라고 하겠다.  

  어떤 지적 전통이든지 연역과 함께 귀납이 요구되는데, 귀납은 포괄적으로는 잘 정돈된 경험을 말한다. 그 자체가 연역적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연역에서 나타나는 일사불란함을 경험에 들이댈 수 있다면 그는 귀납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아카데미아의 과제가 잘 수행된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경험의 확장이 요구된다. 아카데미아의 세 번째 단계는 첫째 범지와 둘째 범서를 거쳐 이른 바 범경험, 범검증의 기간이다. 아카데미아는 이렇게 연역과 경험을 모두 얻음으로써 이른바 사물과 순수 실천에 도달하게 된다.

아포데미아는 즉 여행을 말하는 것인데 경험을 확장하기 위한 논리를 가진다. 물론 포괄적으로 말해서 아포데미아는 지혜를 강화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보다 좁게는 정신과 정서를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서 또한 직업을 선택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신과 정서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새로운 지식으로 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를 또한 신선한 기쁨이라 하였다. 또한 직업 선택의 부담을 줄인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폭을 넓힘으로서 그 펼쳐갈 수 있는 방법론이 연마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포데미아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 스스로 이에 대하여 경험이라는 말로 정리하지는 않았으나, 오늘의 교육을 정리하여 보는 마당에 이 단계를 아카데미아와 대비하여 경험이라고 정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본다.

실제 아포데미아를 위한 지침을 주면서 코메니우스는 그 경험적 특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산과 계곡과 평야와 나무와 말과 사람을 바르게 본 자는 세상을 본 것이다”라 하여 경험이 보편적 세상을 향한 앎에로 지향함을 아포데미아를 기술하는 자리에서 말한다. 그리고 아포데이아의 시기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먼저 경험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여행 일기를 남기라고 권하는데, 이는 또한 경험에 대한 흔적을 남기라는 말이 될 것이다. 특히나 여행에서 얻게되는 지식에서 혼란스러운 것의 양이 너무 많지 않도록 주의시키기도 하는데, 불필요한 경험에 대한 주의이다.

청년기 학교의 세 번째 단계로 말하는 직업 선택에 있어서는 우리가 두 가지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먼저 플라톤의 인생관에 대하여 비판한다. 플라톤이 청년기에 연구하고, 장년기에 여행하고, 노년기에 안식을 취했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 후, 그러나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언제냐고 묻는다. 조국이란 오늘로 말하면 사회이기도 하고 우리가 속한 가장 의미있는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실용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장년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보호와 도움 속에서 배움에 정진했으니 장년기에는 반드시 타인들을 위한 열매를 맺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이 일을 위한 비전을 분명히 길러야 하는데 1)눈에 보기에 선한 목적과  2)확실한 수단과  3)우호적인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연역과 경험이 충실히 이루어지는 사람이 타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종적 배움을 가지는 기간이 바로 이 직업선택의 기간인 것이다.

요컨대 코메니우스는 세계 전체에 관련하여 연역과 경험과 그 배운 바의 실제적 출발을 이루어 내는 것, 이것이 대학의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2.우리 시대와 대학과 교회
  이제는 우리 시대를 살펴보아야겠다. 이는 대학이 과제를 수행해 가는 실제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①우리 시대
  우리 시대는 참으로 복잡하고 고통이 많은 시대였다. 그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짐은 남북분단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 핵 카드를 마지막 생존의 결절점으로보고 거의 절망에 가까운 노력을 해왔다. 소위 벼랑끝 외교라는 말도 들어온 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북한 사회이다. 오늘 파병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에서 보는 바 그대로, 우리는 또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전쟁 발발의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21세기로 넘어왔는데, 아직도 전쟁의 위험은 전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런만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은 평화문제이다. 이는 정치 문제이기도 하고, 세계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일견 허위 개념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정치 문제로 여전히 우리의 평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는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어렵기가 한량없다. 우리는 97년의 금융 위기 때에 우리 산업의 근간이 되는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재벌 기업들이 넘어져버리기도 했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2003년 들어서는 경제 성장률 마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정책을 세우는 쪽에서는 각 기업들의 신용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금융 기관의 능력을 요구하고, 기업 쪽에서는 노동 운동의 자제를 요구하며, 노동자 쪽에서는 분배 불균형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지 합리성만으로 볼 수도 없고, 발전 지향 일변도로 볼 수도 없으며, 윤리적 요구를 어디까지 관철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런 경제적 형편 안에서 우리는 어디엔가 정책적 지향점을 두고 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기반은 청년기 시절에 견고히 자리잡혀야 한다. 이런 자리를 열고 보면 아카데미아가 왜 필요한지, 아포데미아는 왜 필요한지, 그리고 직업 선택은 얼마나 신중해야하는지 금방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 경제 문제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단지 문화 해방의 공간이 왔을 뿐이다. 문화 해방은 기쁨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정치 경제학의 대용으로 쓸 수는 없다. 칸쿤 WTO 총회에서 이경해씨가 자살을 감행한 것도 오늘의 세계체제와 경제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것은 정치경제학 중심의 시대에 비해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모호해져 간다는 것이다. 근래에는 노동운동가들이 경제 개방을 반대함으로써 오히려 국내에서의 재벌의 독점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반면에 정부는 어떻게든 개방을 한 걸음이라도 먼저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만은 역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각자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최선의 길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라는 국면이 들어오고, 세계화라는 상황이 연루된 까닭에 단지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복잡한 미로 찾기 식의 미래 모색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는데, 오늘 세계가 그렇다. 과연 우리 시대 가운데서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순결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초를 대학에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것이 복잡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것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시대이다. 생존을 위해서도 서로에게 의존하는 공동체적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②오늘 한국 교회
  이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된 것 같다. 오늘 사랑의 교회와 명성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하고 있다. 반면에 진보적인 기독교 단체들은 웬만한 지식으로는 가까이 가기 어려운 다원종교적 배경의 논문과 미래 진단 등을 하고 있다. 사랑의 교회 기도제목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낯설 듯이 이런 사이트들에서 민중을 걱정하는 것도 또한 낯설게 느껴진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보면 오늘 교회가 너무나 파편적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이것은 중앙집중적이 아니어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참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저 진보적 기독 지식인들의 사이트가 저렇게 많은 사회 참여를 하고, 사회를 걱정하고,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잘못에 대한 고백까지 하고 있지만 오늘 사회에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있다. 한마디로 해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평화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길가에 버젓이 단군상을 세워놓은 것은 내 눈에도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는데, 그들은 비록 지붕이기는 하지만 길가에 십자가가 보기 싫다고 반론한다. 불상 훼손 사건등에는 음모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여간 기독교의 호전성을 드러내기는 한 것 같다. 조찬선 목사의 “기독교 죄악사”는 기독교가 얼마나 순교적인 각오로 죄를 저질러 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수백년에 걸쳐서 수억의 사람을 죽였을 것이라 짐작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피바다는 히틀러의 난행 정도야 새발의 피다. 이 모두를 합쳐서 백인들의 학살 콤플렉스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것은 아니지만 관계없다고 전혀 부인할 수 없는 마당이니, 누가 기독교 욕을 할 때 정직한 마음으로 서면 할 말이 없고, 머쓱해지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2003년에는 8.15를 맞으면서 친미 반미 양측으로 나뉘어 시위를 하는데, 하여간 친미 쪽에는 보수적 기독교가 거의 전부였다는 것. 이 우리 속의 사람들은 과연 오늘 무엇을 지키려는 것이고, 내일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나는 이것이 단지 무식한 사람들이 나도 소리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매우 세련되고, 기독교를 배경으로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바로 그 자리에 그리고 그 배경에 있다.

  어쨌든 좋다. 그런데 지울 수 없는 걱정 하나가 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하고 미래를 맞아도 되는 것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예수님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하고 묻고 계시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우리가 기독교적 대안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기독교 세계관을 일관되게 고집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웃과의 평화를 선두에 세우는 기성 교회와는 다른 어떤 모습일까? 아니면, 이 두 양상을 아우르는 제 삼의 자리가 있다는 것인가? 오늘 기독교가 파편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말할 수 있는 대안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갈래 잡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우리 이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여야 한다는 것인가? 어쨌든 아이들도 오늘 우리의 이 초상을 알아야 하고, 기독대학은 또한 바로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장차의 사회에서 책임있는 기독교인을 기대하겠는가? 단지 명석하다든가 원래 성품이 좋다든가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를 주께서는 부르시지 않는가?

③각 대학들의 이념
  이제 대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의 이념은 경성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진행되게 된 민족적 역사적 왜곡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한국 사회가 친일을 그냥 안고 가듯 그렇게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대학교는 대학의 이념을 품었다기보다는 산업 역군들을 길러낸다는 현대적 살아남기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런 문제를 서울대는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로 고려대학은 마찬가지로 친일 전력을 가진 김성수를 중간 설립자로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역사적 반성은 전혀 없다. 서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현실과 역사는 따로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래의 폭은 우리가 가지는 과거에 대한 폭 만큼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대한 수용폭이 없다면 미래에 대한 수용의 폭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여기 비하면 성공회대학의 이념은 매우 간결하다. 그들은 시작이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유리한 점이 있다. 그들의 과거는 짧지만 역사 앞에서 단정하고 분명하다. 그 나름의 운신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방향은 참으로 미래지향적이다. 그들의 커리는 다른 학교들에서는 볼 수 없는 사회 통합적 요소들을 품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기득권자들과 새로운 개혁 세력의 경쟁을 느낄 수 있다. 과연 누구나 말하는 그 통합이라는 것을 누가 더 의미있게 진행시켜가고 있는가? 당장 성공회대학교가 더 뛰어난 사람들을 배출시킨다거나 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린다거나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시대의 의미를 안고 나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회대학교는 대학 사회의 한 대안이다. 백지에서 기독교 대학을 논하기보다는 성공회대학의 분석에서 대학의 길을 찾는 것이 훨씬 실제적이라 생각된다. 마침 그들은 기독교 대학이기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관점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나가고 있는가? 그 장점은 무엇이며, 그 개선점은 무엇인가? 그들의 건학 이념은 열림과 나눔과 섬김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목표는 인간화 사회화 민주화이다. 그들의 건학 이념은 주로 인간과 사회의 부면에 걸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교회를 지탱해내고 있는 신학부를 가졌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신학계열만의 교육목표는 신앙적 윤리적 교양인 양성, 성서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실제적 교육이다. 이들은 신학교육에 있어서 사회성 내지는 사회적 실제성을 매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회계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직업 전문인을 향한 지식 습득 및 실무 소양증진 그리고 현대 사회의 구조 변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 함양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의 기독교적 언급도 없다. 신학의 목표가 사회와 관련을 갖는 것에 비해 사회학의 목표에 신학적 관계가 전무한 것은 이들 건학 이념이 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전문인에 대한 기술에서 보이듯이 사회에 대한 기능적 역할을 강조하여 자연학에 가까운 기술을 한 것을 볼 때 그들이 사회에 대한 접근에서 하나님을 향한 정리된 입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좀더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런 계열별 목표에 앞서 그들은 전체의 교육목표에서 열림 나눔 섬김을 기독교적 인간으로 규정하고, 주체적 인간 공동체적 인간 봉사하는 인간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교육이 한갓 이념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구체적 결실을 이루어야 한다고 볼진댄 각 계열이 그 자체의 기독교적 의미를 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동대 법학부의 소개를 들어가보면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런 것은 하나의 고집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대학을 세워간다는 입장에서 보면 이념적 진전을 이룬 것이라 하겠다.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커리 가운데도 기독교 법사상이란 과목이 있다. 그 과목에 대한 소개도 제법 기독교적이다. 첫째 기독교 정신과 법 사이의 관련지움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학습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정초해 보는 것, 둘째 현대법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정신의 자취를 파악하고, 그 부활의 방향을 탐색하는 것, 셋째, 현대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법문제들에 관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포괄적인 대안을 모색한 뒤, 그  실현방안을 토의하는 것, 이라고 한다. 한동대의 실제적 사건들을 논하는 것은 차후로 하되, 그들이 이루려고 하는 기독교적 대학의 모색은 작지만 매우 소중하다고 하겠다.


3.개혁의 과제
  개혁의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코메니우스에게서는 행동의 방향이라는 말과 같다. 세계를 개혁하는 것은 바로 코메니우스의 삶이었다. 그리고 교육은 그 개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바로 개혁이었다. 그렇다면 기독 대학의 방향성은 그대로 개혁의 과제가 된다고 하겠다. 코메니우스의 교육철학은 이 과제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오늘 대학과 교회와 사회의 어려움들은 이러한 과제들의 필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제를 밝히는 것은 이 등불과 등불에 비친 어둠의 복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의 책 “대학의 이념에서 대학의 과제를 말하는 것은 연구와 학문의 전달 그리고 교양 교육의 세 분야라고 하였다. 그의 이런 언급은 과제를 밝힘에 있어서 특히 대학 사회에 요구되는 필요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러 복합적 요인들에 관심을 두면서 아래 8가지의 항목으로 그 과제를 잡아보려 한다.

①이념의 회복
  코메니우스가 아니더라도 오늘 대안적 교육의 소리는 많다. 코메니우스는 제도 교육이 없던 시절 제도 교육을 외쳤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제도 교육의 폐해 때문에 살아있는 교육의 정신이 요구된다. "작은학교가 아름답다"에서 사티쉬 쿠마르는 진정한 교육 진정한 학습은 평가될 수 없다고 하면서 능력으로 환원되고 숫자로 환원되는 교육을 떠날 것을 주장한다. 간디학교 교장 양희규씨는 때려서 말을 듣게 하려는 선생의 말은 듣지 않는 자유의 아이로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풀무학교는 위대한 평민이라는 이념을 가졌다. 이런 모든 소리들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새벽의 소리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 이념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기초로 이런 사상들을 섭렵할 수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정신이 아닌가? 그의 행복의 소식이 아닌가?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포괄적 철학적으로 이것을 세계와 정신과 성경 이 세 책에서 가르침을 얻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대학은 초중등 학교에 비해서 개혁하기가 수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초중등 학교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작은학교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학교들의 사적 비용 때문에 같이 인간화 교육을 주장하면서도 전교조 같은 경우에는 제도권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학교육을 받는 청년기는 작은학교를 통하여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의 어린 나이는 아니다. 그래서 규모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규모가 그렇듯이 모든 외적 부분에서 선택의 폭이 넓다. 대학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코메니우스가 참으로 잘 지적하여 주었다. 아카데미아 아포데미아 그리고 직업 선택. 오늘 한국 사회는 저절로 그런 자리에 들어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학생들이 학업에 힘쓰고 있고, 외국 연수의 부작용도 많지만 해외 여행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노력들이 직업 선택으로 수렴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각각의 기간이 그 나름의 중요성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 아카데미아의 기간은 사물과 순수 실천에 접근해야하는데, 이 기간부터 이미 직업선택이라는 너무나 절박한 현실이 이런 훈련을 가로막는다. 과거에는 그래도 산업사회의 역군을 만들어 낸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으나, 오늘에 이르러는 생존이라는 관점만이 너무나 절박하게 이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토론을 한다 하여도 이 문제는 오히려 사회적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대학교의 사명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명백하다. 비록 생존 및 직업과 관련하여 아주 현실적인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아카데미아, 아포데미아를 거쳐 마침내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선택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교육의 원래적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참으로 뜨거운 가슴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이념이라 할 만한다. 코메니우스의 시대에도 알고 보면 어려움이 많았다. 어린아이들이 생계 노동을 해야했다. 그는 학교의 이념으로 이런 사회적 어려움을 이겨보려고 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 어려움은 극복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실제적인 변화는 사회에서 일어나겠지만, 바른 사회의 이념을 지키는 것은 학교의 아직 남은 사명이라고 하겠다.

  앞서 이미 말한 대로 오늘 사회를 문화의 세계로만 규정하는 것은 기실은 허위 개념이다. 여전히 세계는 정치와 경제의 중요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은 여전히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른 바 헤게모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문화를 활용하겠지만, 모든 사람의 전인성이 문제인 교육에 있어서는 문화적 헤게모니는 아무래도 인간성의 한 부문일 수밖에 없다 하겠다. 우리는 대학의 과제를 이런 관점 하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②고전적 학문의 분명한 이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할부금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더러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원래 매우 독특한 교육철학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30세에 시카고 대학교 총장이 되어 22년을 재직한 로버트 M. 허친스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는 총장으로 강의하면서 교양 교육을 위대한 고전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폈고, 성과도 거두었다. 그리고는 브리태니커의 편집위원장이 되어서 이 책의 발간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고전에 대하여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위대한 고전은 널리 읽혀지고 있으며 항구적인 베스트셀러이다
2)위대한 고전은 현학적이지 않은 일반적인 책이다
3)위대한 고전은 언제나 현대적이다
4)위대한 고전은 가장 읽기 쉬운 일이다
5)위대한 고전은 가장 교훈적이며 계몽적인 책이다
6)위대한 저서는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는 인생 문제를 다룬다

하나 하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관점이야 말로 아카데미아의 범서라는 관점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 하겠다. 크게 말해서는 고전을 통해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들을 연역해 내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거기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사물과 순수 실천에 나아갈 가장 핵심적인 발돋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③정치 경제적 현실 및 사회적 현안에 대한 교육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기본적 과제들을 말하면서 사람은 태어난 이상 건강하려 하고, 건강한 사람은 자존감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자존감에는 소유가 관련됨을 분명히 하였다. 그릇된 욕심이 아니라면 이런 기본적 욕구들은 교육을 통해서 채워져야 하는 생존의 기본조건들이다. 오늘 우리는 WTO라는 세계 체제하에 살고 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세계라는 범위의 경쟁과 협상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냉전 시대는 차라리 단순했다.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를 주요 변수로 해서 이 체제는 움직여가고 있다. 오늘 우리의 생존과 소유가 자존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런 세계체제의 이해에 기초한다.

  앞서 코메니우스의 청년기 교육론에서 말하였던 바, 이런 세상 가운데서 선한 목적과 확실한 수단과 우호적인 방법을 갖기 위해서는 오늘의 사회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여야 한다. 적은 과목의 공부를 하고 나의 끼를 따라서 산다는 오늘의 비뚤어진 교육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 아이들을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몰고 갈 것이다. 적은 과목의 공부는 깊이 있는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끼를 따라 산다는 것은 기껏해야 음악적인 재능을 풀어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은 저 옛날로부터 삶의 한 여흥이었다. 그것을 도구로 삼아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몇에 불과할 뿐이다. 이른 바 나의 끼라는 자극적이고 이기적인 개념보다는 여전히 코메니우스의 이웃을 위한 직업선택이라는 관점이 열정적으로 대학 사회에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이해에서 출발하며, 그것은 냉전을 거쳐 WTO 체제로 들어선 오늘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한 것이다. 학교 당국은 이것이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야하고 이 사회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고전만이 우대받는 대학은 학생들을 오히려 게으른 선비를 만들고 말 것이다. 반대의 극단으로 인생을 오직 몸에서 절로 솟아나는 열정에만 맡기는 것은 즐거운 바보를 만들고 말 것이다. 대안적 교육에서 전인성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라 할 것인데, 사회의 이해를 하나의 급진으로 보는 시각은 참으로 사라져야 한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문화비평, 정치 경제 비평, 고전 비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대학 시절에 길러져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개선을 통하여 세계를 개선하려 하였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 사회의 개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개선은 곧 사회의 개선이다.

④유니버시티에서 멀티버시티로
  프랑스의 1968년 5월 운동은 원심성적 사회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고하였다. 이 운동에는 스탈린의 모스크바 중심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과 자주 관리라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구심성적 사회 담론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그 운동의 중심이 바로 대학이었다. 독일의 교육학자 니프코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거친 60년대 이후의 신학 주제를 경험의 인간으로 잡았다. 여기서도 중심적 주제는 온갖 경험들이 각각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래서 신학도 여기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 듀이의 실용주의도 이 시대 이후를 만나면서 과정철학적 관점에 의거해서 원심성적인 방향을 취하였다. 듀이의 실용주의 캠프 하에 공동체 논의가 일어나는 것도 소소한 공동체의 중요성 즉 자주관리적 관점의 등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변화를 누가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대학 사회이다. 유니버시티란 이름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이것이 중앙집권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완전히 버려야 할 이름은 아니겠으나, 이런 중앙집권성은 수없이 일어나는 각 부문들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그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각 분야의 경험들은 그 자체로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대학은 참으로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멀티버시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학의 분야만 해도 조직신학이 신학을 대표하는 방식은 이미 끝났어야 하고, 앞으로도 점차 더 그래야 한다. 교리가 인간 현상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현상이 교리를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정치와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지만, 한편 모든 것이 정치 경제학으로 환원되고, 다시 거기에서는 법률체계가 정점을 차지하는 사회는 끝났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엄청난 사회 변동을 먼저 감지하고 보다 나은 방향성을 잡아낼 곳이 대학 사회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학교 내에서도 그 나름의 정치 경제학적 중요성을 던져 버릴 수는 없겠으나, 그 너머의 사회가 오늘 우리에게 세차게 쇄도해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대학은 거기에 대하여 응답하여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유니버시티를 넘어서 멀티버시티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코메니우스의 주석을 붙인다고 하면 아카데미아를 넘어 아포데미아적 관점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라고나 할까? 또한 코메니우스는 그 시대 학문에 한 획을 그었던 데카르트의 철학 방법론을 “철학의 암적 종양”이라고까지 하였던 바, 오직 이성에 근거함으로써 스스로 학문의 폭을 좁혀버린 것에 큰 우려를 나타낸 바가 있다. 오늘 멀티버시티의 부상은 데카르트적인 학문이 아니라 코메니우스적인 학문의 경향에의 요구라 하겠다. 코메니우스의 중세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학문과 삶은 여전히 전체를 향하여 나가고 있으며, 그 전체에서 어느 시점 어느 자리에서 어떤 것이 새로운 중요성으로 부상할지 모른다. 코메니우스의 학문론은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하겠다.

⑤영성교육의 실제화
  학교에서 영성을 실제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 실제성은 기본적으로 기성 세대의 모범에서 시작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위해서라도 교수들은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세계 정신 성경의 세 세계에 균형적이고 충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아포데미아를 거쳐 직업 선택에 이르는 자리에까지 있어서 귀감이자 영적 지도력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제도는 이 부분에서 경직된 규정이 아니라 공동체적 일치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사회 운동에서조차 영성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 대학에서 영성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어떻게 청년기의 자유로움과 이 영성을 만나게 할지 학교는 항상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새벽기도회를 할 수는 없어도 복음의 기초를 알릴 수는 있을 것이다. 아직 사회로 나서기 전 그러나 모든 판단 능력과 실제적 활동력을 가진 시기이니, 실제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실행을 해보게 하는 것도 영성의 성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오늘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이든 영성은 신령파적인 영성과 사회변혁으로서의 영성이 혹은 대립하고 혹은 서로를 보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시대에 토마스 뮌쩌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다. 그는 신령파적 영성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변혁의 세력이었다. 그 양면이 모두 급진적이어서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또 우리는 영성에 있어서 지성적 균형성이 당연히 요청됨을 알 수 있다. 지성과 신앙적 열성과 변혁성을 함께 담아내는 영성. 그 견고한 기초는 당연코 대학에서 기대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실은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자들이 갈망했던 개혁성이었고, 루터의 말대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에 매진할 수 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결과였다. 영성에 혁신은 있으나 그것은 아주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본질적이 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대학은 이 영성을 반드시 살려내어야 한다. 이 일이야말로 기독교 대학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가장 혁신적인 사명이 아닌가 한다.

⑥평화교육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라 하셨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항상 전쟁의 위험 가운데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평화는 생존이다. 평화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2003년 이라크 파병 결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미 양국 정상의 밀실 대화는 우리가 알 수도 없지만, 객관적 판단은 우리 심정에 많은 고통을 준다. 이라크 전쟁은 온 세계가 경원해 마지않는 전쟁이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유엔 파병에는 동의하면서도 자신들은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도 국익과 평화라는 명분을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국가는 아무래도 명분보다는 힘과 이익으로 움직여지기 마련인데, 우리 정부는 파병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언론은 이라크 파병과 북한 핵 문제가 연계되어 있다는 보도를 하지만 정확히 앞으로 우리와 북한의 관계와 미래가 어찌될지 알기가 어렵다. 우리에게는 평화가 명분에 앞서 생존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목소리만 높여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목소리를 높여서 친미와 당연 파병을 주장하는 우익과 또 그 정당 등으로 인하여 우리는 전쟁판 속에 있다는 느낌을 속일 수 없다. 정부의 관료 중에도 개인적으로 친미적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국익이란 이름으로 명분을 넘어뜨리면서도 기껏해야 자신들의 친미적 입지나 세우는 사람들이 아직 이 사회 속에는 건재하다.

  성공회 대학 같은 경우에는 평화학이란 과목이 개설되고 있다. 평화학이란 우리 시대의 형편으로 보건댄 가장 절실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를 못하였다. 기독교 대학에서는 이런 과목들의 설치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평화학이 어찌 그냥 평화하자는 말만 하겠는가? 정부 관료가 아니라 할지라도 세태의 흐름을 실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보다는 오히려 지속 가능한 사회와 국가의 상을 갖기 위해서 이런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평화를 가르친 예수의 제자이며, 한편 평화가 생존인 나라에 살고 있다. 평화학을 학과목으로 개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학문의 분야에서 평화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영적 특성은 무엇보다 먼저 평화의 문제를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평화문제에 관한한 참으로 선지자적이었다. 세계 총회가 있고, 그 안에 ‘진리의 빛을 밝히는 교수 자문단’, ‘평화를 위한 재판부’ ‘거룩한 종교의 사역을 위한 종교위원회’를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속에는 UN, WCC, 국제사법 재판소 등의 개념이 이미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혹자는 그가 가진 천년 왕국론을 이단적이라 비판하지만, 그런 요소를 다소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의 평화 추구의 마지막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약소한 민족, 비주류 교회라는 자리에서 유구한 평화를 생각하였고 그 나름의 방향을 세운 것은 오늘의 세계 질서와 교회 질서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구를 가지고도 아직 평화는 요원한 상황을 우리는 보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젊은이들을 평화주의자로 교육시킬 의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피스보트에 태워 보내서 평화 운동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여야 하며, 연결선상에서 평화교육을 하고 과목들을 개설하여야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가 평화 교육에 접근하는 방법은 흔히 말하는 대로 자연주의라 불릴 만하다. 그는 물론 기구적이고 제도적인 평화 정착에도 관심하였지만, 자연스레 평화가 교육되는 길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죄짓기 않기 위해서 바쁘게 좋은 일을 해야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과의 교제만이 허락되어야 한다. 유익한 것을 배워야지 해로운 것을 배워서는 안된다. 해와 유익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냥 배우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이런 자연스런 평화와 함께 코메니우스는 마7:12의 황금률을 말한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평화로운 존재로 이 땅에 있다는 것을 코메니우스는 보여주었다.

⑦녹색 교육
  전쟁이 없고 그 위험에서 자유한 상태가 평화라고 한다면, 이는 인간계 안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평화가 어찌 그것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세계의 또 한 부분인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하여 반응하여야 하고 입장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녹색 교육, 생태 교육은 오늘 세계에 너무나 절실한 일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강좌를 개설하거나, 전문가를 양성하거나, 혹은 연구소를 두거나 하는 방법으로 접근해 가야 한다. 평화가 생존의 문제이듯 생태 문제도 생존의 문제이다. 생태를 지키는 것은 가장 가까이로는 우리의 몸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연 속의 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생활의 모든 자양분을 얻는데, 이 생태계가 교란되면, 끝내는 우리의 몸도 교란되고 말 것이다. ‘코끼리가 살 수 없는 땅은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라는 동물학자의 묵시적 멘트는 생태와 우리의 몸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런 대안적 교육 분야는 그 자체가 발전지향적인 국가의 개발이 안고 있는 생태 파괴의 현장들을 고발하는 데 주로 관련되게 되리라 본다. 그러나 끝내 이것은 정부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방향성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단지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할 수 있는 이유와, 정부와는 다른 길이, 생태주의적인 길이 오늘 세계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집스럽게 지켜야 하는 생태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정보가 적고, 여러 가지 반대 주장에 의하여 이 정보들에 대하여는 접근이 차단되고 있다.

⑧제안
  한 가지 제안이 있다. 기독교 대학 내에는 이런 대학의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 이 연구소는 교수회의나 학내 정책 결정기관과의 연결고리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처음 출발하면서 개혁이라는 관점을 갖기로 한 것이라면 “교육 개혁 연구소”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내용을 좀더 담아서 “새시대 교육 개혁 연구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코메니우스 연구소가 한 분과를 두어 그 일을 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교육인적 자원부는 꾸준히 학교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평가에서 낮은 평가를 두려워하는 정도의 학교가 아니라, 당당하게 교육부 이상의 윤리적 미래, 지향적 비전을 보여주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 그런 비전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대학은 기득권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익 집단이라는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원래는 그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세계를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앞길에는 항상 우리의 길을 밝혀 주시는 주의 보살피심이 있고, 또한 코메니우스와 같은 선진이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이런 개혁을 통하여 아카데미아는 더욱 아카데미아 답고, 아포데미아는 더욱 아포데미아 답고, 직업 선택 또한 생존만이 아니라 더불어 삶이라는 당연한 과제를 품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독특한 필치로 대학의 이념을 다룬 “빛의 길”에서는 범지학의 예언자라고도 하고 보편적 행복과 복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도 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코메니우스는 각 대학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서 바로 이런 보편적 행복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온 세계가 모두 그 근원과 이념을 달리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모든 대학에 이것을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대학은 이 일을 하여야 하며, 그래서 바로 이런 일을 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학교에 관련된 모든 직원들이 바로 이런 정신을 확인하며 근무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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