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양성론에 대하여

안영혁 | 2003.06.29 01:13
양성론이라는 말을 설명없이 나의 모든 글에서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초대 교회에 예수님의 성품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성론이란 예수께서 인성과 신성을 다 가졌다는 말입니다. 단성론이란 하나의 성품을 가졌다는 말인데, 그것은 인성이 아니라 바로 신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너무나 현저하여 인성은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단성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에게도 오직 신성만을 매겨놓고 세상을 온전히 떠나고 싶은 것이죠. 최근에 생명수를 나눈다는 이상한 종교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세상이 싫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이 싫어졌고, 그런만큼 오직 신적인 그 무엇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단성론이 바로 그런 주장입니다.

종교를 가지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단성론적 견해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는 행복이 없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종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삶의 균형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처음 종교를 찾는 심정은 신적인 그 무엇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처지로 인해서 단성론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난 뒤에도 사람들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제가 올린 영성사의 한 단계에서 위-디오니시우스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경향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를 하고 디오누시오라는 회심자를 얻었는데, 나중에 바로 그 사람의 책으로 판단되는 것이 발견이 되었고, 이것은 사도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죠. 그렇게 교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데, 점차 이 책이 그 디오누시오의 것을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인 것은 그것이 디오니시우스가 아니라 위-디오니시우스임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성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향을 끼친 주된 이유가 바로 묘한 단성론에 있다는 것이죠. 매우 세련된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신학을 입혔는데, 가볍게 보아서는 단성론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그냥 그 신비스러움에 사람들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비주의로 말하자면 또 단성론에 빠질 우려가 항상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나에게 있지 않은 그 무엇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성에의 탐닉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신비주의는 항상 단성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신비스럽게 살면되지 왜 그걸 경계해야하나?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부수적인 것이 되게 하는 논의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고난 부활 같은 모든 주제가 구체적으로 살아나지 않습니다. 통째로 그리스도 예수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죠.

영성신학은 미묘한 것을 오묘하게 이야기하는 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 영성에서 이 단성론과 양성론의 긴장만큼 중요한 주제가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 분명해지도록 서로 논의를 나누는 것이 또한 영성신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훈련에 관한한 저도 직접 수련을 하겠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에 있어서 이런 관점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성과 신성을 겸한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관철시켜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성론이라는 말이 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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