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성욱계명대 영문학, 총신신대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구약 Th.M 수학), Calvin Theological Seminary(신약 Th.M), University of Pretoria(설교학 Ph.D), 「이동원 목사의 설교 세계」(두란노, 2014), 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긍휼의 은사를 주옵소서!

신성욱 | 2022.02.16 08:56

USA Today지에 실린 아홉 살 소년 스티븐(Stephen)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됐다. 오늘 따라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

스티븐은 우간다 수도 캄팔라 외곽의 빈민굴에 살았다. 부모를 잃은 뒤로는 손수 만든 망치로 돌을 쪼개며 입에 풀칠을 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열두 시간을 꼬박 일해야 20리터짜리 들통 세 개에 부스러진 돌조각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들통 하나를 채우면 겨우 6센트, 우리 돈으로 66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해서 18센트(200)를 벌어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매일 그렇게 허리가 끊어져라 일한 뒤에는 진흙집에서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Katy Pownall, “Uganda’s Children Work on Dangerous Rock Pile,” USA Today, 200861일자). 솔직히 매일 이런 얘기들을 자주 접하고 살기 때문에 이 정도의 내용 가지고는 마음에 아무런 감정을 갖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따라 내 마음이 몹시도 쓰라리다. 미국에 있는 내 아이들, 특히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스티븐이 내 막내아들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목이 메이기 시작한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부모 없이 사는 것도 힘든데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죽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 힘겨운 일을 해야 한다.

 

그 아이가 남의 아이이기 때문에 우리는 별 관심도 갖지 않고 아픔과 눈물도 경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내 핏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조각조각 난다. 비록 풍족한 부모는 아니지만 내 아이들은 먹고 살고 공부하기에 지장 없게 해주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자식들에게 최대한의 사랑과 도움을 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부모 없는 고아가 되어 스티븐의 신세가 되었다 생각하니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온다.

 

전도자나 설교자는 감정이입을 잘해야 한다. ‘감정이입이란 영어로 ‘Empathy’라 한다. 이것은 ‘into’+‘pathy’, 감정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내 아들이 아니기에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고 핑계할 수 있다. 자기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따질 이들이 있을 게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런 질문과 따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2:3~4절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가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반드시 이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뭐라고 했나?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이라 했다. 그럼 그렇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은 내가 스티븐이 아니고 내 아들 또한 스티븐이 아니기에 그 아이의 고독과 가난과 고통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불쌍한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애가 내 사랑하는 자식과 동일시 될 땐 감정과 느낌이 달라진다.

물론 내 자식이 아닌데 남의 자식, 그것도 내 나라 사람이 아닌 우간다에 사는 전혀 낯선 한 아이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긴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5: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미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 난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오늘 내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내 자식처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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