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성욱계명대 영문학, 총신신대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구약 Th.M 수학), Calvin Theological Seminary(신약 Th.M), University of Pretoria(설교학 Ph.D), 「이동원 목사의 설교 세계」(두란노, 2014), 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밀레의 두 작품이 주는 교훈

신성욱 | 2021.03.18 09:01

농사일을 하던 두 부부가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 하루를 정리하는 교회 종소리에 두 손을 모으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 농부와 그 아내의 모습은 아름다운 서정미를 느끼게 한다. 서양화 중에서 한국 사람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밀레(Jean-Francoi Millet)만종’(아래 그림)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밀레는 프랑스의 농부를 가장 프랑스답게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다.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고, 평론가들은 살바도르 달리가 밀레의 작품을 숭배했다고 묘사할 정도이다.

사실 밀레는 당시의 비참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농부의 아들이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2년간의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이런 고달픈 농민들의 삶은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런 경건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던 만종은 뜻밖의 사고 때문에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한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X선을 촬영한 결과, 감자 바구니가 덧칠해졌다는 사실과 아래에 죽은 어린아이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것이 논란이 돼, 밀레의 그림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과 감상평이 나왔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 전 만종은 신앙적 경건함과 감사함을 나타내는 평화로운 분위기로 평가되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전하기 위한 그림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알프레드 상시에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먹일 음식이 없었고, 속옷조차 변변하게 입을 형편이 되질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극심한 편두통과 끊임없이 마음속에 솟구치는 자살에 대한 충동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밀레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높은 영아 사망률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밀레가 그랬듯이 들판에서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밀레의 또 다른 작품 가운데 <이삭 줍는 여인들>(아래 그림)이 있다.

 

이 역시 <만종>만큼이나 평화롭고 목가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보라.

세 여인이 이삭을 줍고 있는데, 90도로 허리를 숙여 이삭을 줍지만 그녀들의 손에 들린 것으로는 끼니를 해결하기도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 옆에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은 허리를 굽힐 힘도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녀들을 슬프게 하는 것은, 이들의 모습이 왼쪽 뒤편 멀리 보이는,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곡식들을 수레에 싣고 있는 장면과 리얼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 작품 하나만 봐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개인적인 정황과 그림 속에서의 세미한 관찰력 등이 제대로 작동 발휘되어야 저자가 그린 그림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지금쯤 이런 생각들을 하리라 예상한다.

밀레가 그린 <만종><이삭 줍는 여인들>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신 교수가 괜히 알려주는 바람에 평소 호감 갔던 작품들에 대한 이미지만 망쳐놓았어!’

충분히 그럴 법하다. 나 역시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땐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어찌 됐건 간에 그림을 해석하는 것은 관찰자나 관람자의 몫이다. 죽은 밀레가 출현하거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그림을 네 맘대로 해석하느냐?’고 책망할 가능성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시나 그림이나 음악 등은 읽고 보고 듣는 이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리할 수 없음을 새롭게 경계하기 위해서다.

 

성경의 저자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죽은 후 천국에 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쓴 내용을 우리가 잘못 해석했다고 천국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 인간 저자(Human author)말고 진정한 저자가 한 분 계신다. 신적 저자(Divine author)이신 성령(Holy Spirit) 말이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감으로 계시하신 말씀을 그 원래 의도(Original meaning)대로 지키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의 의도대로 해석하기 위해선 당시 역사적 배경과 문법적 구조와 전후문맥의 흐름 등을 충분히 고려해서 세심하고도 통전적인 해석(Holistic interpretation)을 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요즘 본문의 참 의미가 아닌 전혀 다른 잘못된 해석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목회자 몇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할 자격이나 실력이 없음에도 용감하게 그리 하는 모습을 볼 때 화도 나고 가슴이 아파온다.


신명기 4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그렇다. 인간이 만든 다른 작품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절대로 가감할 수 없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사와 교수의 신분을 가진 오늘 나부터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말씀을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조용하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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