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성욱계명대 영문학, 총신신대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구약 Th.M 수학), Calvin Theological Seminary(신약 Th.M), University of Pretoria(설교학 Ph.D), 「이동원 목사의 설교 세계」(두란노, 2014), 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작은 친절과 배려의 위력

신성욱 | 2022.02.26 15:23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3년 전투기를 타고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군 장교 이웅평 소령의 얘기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대학교 시절 TV에서 야구경기를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실제상황이라는 방송이 나와서 두려움에 잠시 떨던 때가 있었다.

요즘이야 탈북하는 이들이 많다 치더라도 당시엔 북한 같은 독재 국가에서 탈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웅평 소령으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탈북을 감행하게 영향을 끼친 하나가 있었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삼양라면때문이었단다. 라면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니 이해가 가질 않을 게다. 삼양라면 맛이 그렇게도 좋아서였을까? 아니다.

이 소령은 북한에 있을 당시 강원도 원산의 한 해변가를 산책하던 중 바다에 떠밀려온 삼양라면 봉지 하나를 주웠다.

 

라면이 뭔지 몰랐던 그는 포장지를 뒤집어 뒷면에 적혀 있는 설명서를 읽던 중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대수롭잖은 문구이겠으나 독재 정권에 살고 있던 이웅평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삼양식품에서 만든 그 문구를 읽은 이웅평은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는데, 남조선에서는 인민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구나!’라는 호의를 갖게 했고, 결국은 그러한 생각으로 탈북까지 감행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에겐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세월이 많이 지나 어느 책에서 본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얘기도 있다. 미국 어느 가정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인데 부인은 무신론자였다. 남편이 교회에 같이 가자고 아무리 졸라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늘 부부싸움을 달고 살았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 없는 사람이 같이 사니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혼까지 생각하던 가정에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대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 다음 주일부터 당신하고 같이 교회에 가려 하는데 어때?”

충격적인 얘기에 남편은 어안이 벙벙한 태도로 쳐다볼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떻게 그런 생각한 거야?”

그때 와이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쓰레기 버려주고 출근해서 나 감동받았어. 결혼하고 처음이야. 그렇게 쓰레기 좀 버려 달랬는데도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아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결혼하고 나서 쓰레기 좀 처리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밖에서 돈 벌어오는 피곤한 남편한테 쓰레기 버려달란다고 화내곤 했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같이 쓰레기 한 번 버려준 것이 그렇게 감동이 되어 남편 따라 교회 가겠다고 한 것이다.

 

실은, 남편이 교회에서 소그룹 하다가 찔림을 받고 쓰레기 버리기로 작정하고 행동에 옮긴 것인데, 부부간의 불화가 그치고 소중한 아내의 영혼까지 구원받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난 후 가끔씩은 내게도 자발적인 쓰레기 버림의 변화가 나타났음을 고백한다. 물론 그 일이 아주 즐길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말이다. 별 것 아닌 쓰레기 버리는 일이 남자에게 수월한 일이 아니라면 유약한 여자에겐 얼마나 더 힘든 일이겠는가?

 

20년 전쯤 유학을 마치고 신학생들과 함께 강릉의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게 됐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입에서 “OOO 목사님 아니십니까?”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그분이 누구시냐고 해서 신대원 같은 반 동기인 아무개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얼마 전 기독신문에서 내 소식을 읽었다며 너무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그리 친하지 않았던 분이었으나 눈썰미가 남달랐던 까닭에 이름까지 기억해서 알아본 것인데, 시골에서 목회하는 자기를 알아줬다고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래서 강릉과 삼척과 동해 지역을 구경시켜줄 테니 자기 집에서 자고 주일설교까지 하라고 강권하셨다. 결국 그분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서 설교까지 하고 돌아왔고, 해마다 가족과 함께 계속해서 방문하는 친한 관계로까지 확대됐던 것이다.

 

졸업 후 12년이 지났는데 자기 이름을 하나 기억해준 일로 인해 그렇게 나와 내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 성경 속에도 흡사한 사건이 하나 나온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환대의 이야기 말이다. 예수님을 만난 후 수전노 같았던 삭개오에게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a).

 

정말 믿을 수 없는 변화 아닌가? 삭개오로 하여금 이처럼 상상하기도 힘든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게 한 동인이 뭘까? 그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였다. 영적인 갈증을 갖고 돌무화과나무 위에 앉아있던 삭개오를 향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19:5)란 한 마디가 돈의 노예로 살아왔던 삭개오의 욕심을 한 순간 깨버린 것이다.

조그만 관심이든 크나큰 관심이든 사람을 바꿔놓는다.

 

말로만의 배려와 사랑으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삼양라면 뒷면에 적힌 문구 하나에 마음이 끌려 탈북을 감행했던 이웅평 소령의 얘기쓰레기 한 번 비워준 일로 불평으로 꽉 찼던 부인이 교회 나오게 된 얘기‘10여년 만에 만난 같은 반 동기가 길거리에서 자기 이름을 알아준 일로 지금까지 친절을 베풀고 있는 친구 목사님의 얘기,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믿을 수 없는 변화를 시행한 삭개오의 얘기를 잊어버리지 말고, 우리 또한 작은 친절과 배려로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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