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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료나눔

파스칼의 신앙내기론

채천석 | 2004.01.21 01:21
파스칼은 신앙의 내기라고 정의하고 사람들은 모두 신앙쪽에 내기를 거는 것이 유익하다고 역설한다.

신앙은 내기이다
  
종교를 공격하기 전에 적어도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이 종교가 신에 대하여 명백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든가 신을 뚜렷이 알 수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렇게 명백한 신의 존재에 대한 관념은 이 세상에서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 공격의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은 어둠 속에서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신은 그들이 알아차릴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며 성경에서 신은 자신을 "숨어 계신 분"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신은 진실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려고 교회 안에 명백한 표징을 만들어 두셨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심으로 신을 구하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그 표징을 감추어 두었다는 이 두 가지 진리를 구하는 데 게으르면서 아무도 진리를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현재 그 속에 있고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어둠은 교회가 주장하는 두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를 확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교리를 파괴하기 보다는 그것을 확립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를 공격하기 전에 우선 진리를 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그 다음에 교회가 진리를 구하기 위해 제공해 주는 것으로는 아무 만족도 얻을 수 없었노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교회의 주장 중에서 하나를 공격한 셈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음을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또 실제로 그렇게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하리라는 것은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어느 한 편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신앙의 진리에 관해 성직자들에게 질문도 하며 그것으로써 진리의 연구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어 버린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서적을 읽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노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자주 말한 바와 같이 그런 게으름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얼굴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의 사소한 이해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처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들 전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영혼의 불멸은 우리와 심각하고도 매우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므로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인 이 점을 신중히 생각하여 보조를 정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의식과 판단을 가지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의 기초가 여기에 있음으로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첫 번째 의무이며 관심사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력을 다하여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그것을 염두에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의혹에 빠져서 진지하게 고뇌하는 것을 큰 불행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으며 그연구를 중요하고도 진실한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에 대하여 아무런 사색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자기가 납득할 만한 빛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빛을 달리 구하여 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민중들의 단순한 믿음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있거나 그 자체가 분명하지 않지만 사실은 견고한 바탕에 근거한 것인가를 철저히 규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자신과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또 그들의 전부가 관계를 가진 문제에 대하여 그처럼 태만하다는 사실에 가엾다는 생각보다는 분노를 느낀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한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영적인 신앙의 경건한 열의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여 인간은 이해관계나 자애의 입장에서 말한다 해도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무식한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세상에 진실로 견고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고 우리의 모든 쾌락도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무한한 불행과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위협하는 죽음이 머지 않아 우리를 영원하 파멸이나 불행의 필연 속으로 몰아넣고야 말리라는 것은 높은 정신적 수련의 소유자가 아니라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현실적이며 무서운 것은 없다. 될 수 있는 한 용감하게 행동하라.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를 기다리는 마지막인 것이다. 현세에는 내세를 그리워하는 희망뿐 행복이라 없으며 인간이란 내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행복해짐을 생각해 보라. 영원에 관해 완전한 확신을 갖는 자에게 이미 불행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영혼에 대하여 아무런 광명도 가지고 있는 않는 자에게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를 말해보라....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중대한 일은 없고 또 영원처럼 두려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의 파멸이나 영원한 비참의 위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그밖에 일들에 대해서는 이와는 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신경을 쓰고 또 그것을 예측하고 감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지위를 상실한다거나 자기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상상하거나 해서 분노와 절망으로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란 마침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릴 줄 알면서도 아무 불안이나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인 것이다. 같은 마음속에 더구나 같은 시간에 사소한 문제에 대한 이런 민감과 가장 큰 문제에 대한 이런 무감각을 함께 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결코 풀 수 없는 수수깨기요 정상을 벗어난 가면에 불과하며 그 원인은 바로 전능한 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의 영혼은 육체 속에 던져져 있으며 거기서 수와 시간과 공간의 삼차원을 발견하게 된다. 영혼은 그 위에서 추리하고 그것을 자연 또는 필연이라고 부르며 그외의 것은 믿을 수 없다.
무한에 하나를 더해도 무한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는다. 무한의 길이에 1피트를 더해도 역시 마찬가지 인 것이다. 무한 앞에 유한은 사랴져 버리고 단순하 무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나 정의도 신 앞에서는 그와 같다. 우리의 정의와 신의 정의 사이에는 하나와 무한 사이와 같은 커다란 불균형은 없다. 신의 정의는 그의 자비와 같이 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한 정의는 신의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자비만큼 크지 않고 또 우리에게 그리 큰 자극을 주는 것도 아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무한히 불가해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분도 한계도 갖고 있지 않음으로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또 그 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문제를 풀려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신과 아무 관련을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기독교도에게 자기들의 신앙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유를 분명히 밝힐 수 없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종교를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이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며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입증한다면 그들은 약속을 어긴 것이다. 입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분별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좋다. 그것이 이 종교를 그런 식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의 변병이될는지 모르지만 또 그 종교를 이유없이 전도한다는 그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변명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말해보자. 그런데 우리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여기서 이성은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거기에는 우리를 격리시키는 한없는 혼돈이 있을 뿐이다. 이 무한한 거리의 극단에서 일종의 도박이 벌어져 노름패의 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에 걸 것인가? 이성으로는 어느 쪽에도 걸 수가 없다. 이성으로서는 하나도 지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을 택한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비난하는 것은 어느 쪽을 택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택한 다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앞면을 택하건 뒷면을 택하건 양쪽이 모두 잘못이며 옳은 것은 전혀 내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도박을 전혀 안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어느 쩍을 택할 것인가? 반드시 택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가? 당신이 일어버리는 것은 진과 선 두 가지이며 내기하는 것도 두 가지 즉 당신의 의지와 이성, 당신의 지식과 행복이다. 그리고 당신의 본성이 피하는 것은 오류와 비참의 두 가지이다. 아무래도 선택해야 하는 이상, 한쪽을 택하고 다른 한쪽을 버렸다고 해서 당신의 이성이 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한 가지 점은 끝나는 셈이다.
그러나 당신의 행복은? 신이 있다는 앞면을 취하여 손득을 계산해보자.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일 당신이 이긴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다 해도 잃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이 있다는 편에 걸어라....무한한 곳 이길 운이 무한하고 잃을 운이 무한하지 않은 곳에 선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때는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
그러므로 내기가 강요된 경우에는 무가치한 것을 잃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에 무한한 것을 얻을 수도 있는데 생명을 걸지 않으려는 것이야말로 분명히 제정신을 잃은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길는지 질는지가 불확실한 상태로 내기를 거는 것은 확실하다 하더라도 또 거는 것의 확실성과 승패의 불확실성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인간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거는 유한의 선과 확실하지 않은 무한의 선을 동일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기를 하는 사람은 모두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하여 확실한 것에 거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한을 확실히 걸고 유한을 불확실하게 얻고자 한다 해도 이성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거는 것의 확실성과 얻는 것의 불활실성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무한은 이득이 되는 확실성과 손해를 보는 확실성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득을 보는 불확실성은 이득과 손해의 운수의 운수에 비율 따라 거는 확실성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쪽에 같은 운이 있다면 내기는 대등하게 행해지는 것이다. 그때에는 거는 것의 확실성과 얻는 것의 불확실성이 같아지는 셈이다. 이 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처럼 이득과 손해에 같은 운이 있는 내기에 유한을 걸고 무한을 얻으려는 경우 우리의 충고는 무한한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어떤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진리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기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있다. 성경과 그밖에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손이 묶여 있고 또 입은 막혀 있다. 내기를 해야 한다고 강요를 받고 있지만 자유로운 몸은 아니다. 나는 석방될 수 없고 또 믿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도대체 당신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말은 옳다. 그러나 이성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믿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힘이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증거를 많이 만들어서 믿도록 하지 말고 당신의 욕망을 줄임으로써 납득하도록 노력하라. 당신은 신앙을 가지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길을 모른다. 불신앙을 치료하려고 그 약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당신과 같이 묶여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재산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 사람들은 당신이 가기를 원하는 길을 알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낫기를 바라는 그병을 이미 치유한 것이다. 그들이 다시 시작하던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바로 성수를 받고 미사를 드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믿게 될 것이며 또한 어리석게 되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을 나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당신이 무슨 손해를 입게 된단 말인가?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길을 당신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한 마디 말한다면 당신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욕정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이편에 가담하면 어떤 재난이 닥치는가? 당신은 충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우정에 성실하고 진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로운 캐락은 영예나 향락 등에도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무엇인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때문에 이 세상에서 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는 이 길의 발걸음마다 이득의 확실성이 많으며 당신이 내기에 걸었던 아무 가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확실하며 무한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내기를 걸었으며 또 그 때문에 어떤 손해도 입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 이이야기는 나를 감격시킨다. 나를 황홀하게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믿음직스럽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전에도 후에도 무릎을 끓고 저 무한하고도 불가분의 존재에게 그의 모든 소유물을 바치고 당신도 당신 자신의 소유물을 당신의 행복과 그의 영광을 위해 바치도록 기도하고 있는 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힘이란 이처럼 겸허한 마음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Pascal, Thoughts, trans, W. F. Trotter(New York: P. F. Collier and Son,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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