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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존 라일의 누가복음서 강해

김재윤 | 2004.11.10 11:31
존 라일 지음, 누가복음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존 라일의 사복음서 강해 시리즈는 복음서의 각 장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주석을 한 고전적인 강해서로서 복음주의 신학 입장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들 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역사적, 문법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또한 강해적이고, 실제적이며, 그리고 경건한 작품이다. 라일 감독은 40에서 70권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른 강해서들을 주의깊에 연구 검토하여 본 저술 작업을 완성하였다. 그가 저술한 저서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실로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을 주어오고 있다.

Ⅰ. 백부장의 믿음 (눅 7:1-10)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출생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표현이 그것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로마 군인으로서 우리가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만큼의 믿음가 사랑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을 위한 백부장의 선한 행동은 참으로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방인의 가정에 있는 종의 위치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백부장이 자기 종에게 베풀어준 간호와 친절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강한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의 말씀은 기적적으로 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로마 군대의 장교, 곧 한 사람의 백부장이 자기 종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한 결과, 응답받았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다. 이 사건보다 더 훌륭한 치유의 기적은 복음서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병자를 직접 눈으로 보지도 않고 또 손으로 만지지도 않은 채 우리 주님이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 죽어가는 병자를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씀하시자 그 병자는 곧 고침을 받았다. 그가 명령을 내리실 때 그 질병은 즉시 떠나고 말았다. 선지자나 사도들이 이런 방법으로 병을 고쳤다는 기록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을 목격하게 된다.

1.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백부장의 친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친절은 그의 주된 성품 가우데 하나로서 본문에서는 그것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 종을 대접하는 그의 행위 가운데서 발견하게 된다. 종이 병들었을 때 그는 온화하게 돌보아 주었으며 또 그를 고칠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우리는 또 그의 친절을 유대인에 대한 그의 동정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이방인들이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을 멸시했던 것처럼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의 장로들이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나이다”라고 강력하게 증거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친절을 가버나움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장소, 곧 회당건립을 위하여 넉넉하게 도와준 그의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아니하고 행동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가 보낸 사람들이 주님께 탄원할 때 “저가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했던 사실을 본문이 증거하고 있다.
그 백부장이 과연 어디에서 그와 같은 친절을 배웠다는 말인가? 이방인으로 태어났고, 더군다나 직업도 군인인데 이와 같은 마음이 어떻게 조성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온정의 습관은 이교도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을 수 없으며 또 로마의 군인사회에서 형성될 수 없다. 헬라와 라틴계 철학은 그런 성품을 칭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호민관들이나, 집정관들, 방백들, 그리고 황제들이 결코 그런 성품을 권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 백부장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다. 성령께서 그의 지각(知覺)의 눈을 여시사 그 속에 새로운 심령을 넣어주셨다는 말이다. 그의 종교관은 아마도 구약성경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조명이 있었기에 그의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놀라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결과에까지 도달한 것 같다.
우리들도 백부장의 모범을 통해서 하나의 큰 교훈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마땅히 친절을 베풀어야 될 모든 이웃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볼 수 있는 눈과 도와줄 수 있는 손, 그리고 동정할 수 있는 마음과 또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의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요, 또한 그것을 사람들 앞에 아름답게 나타낼 수 있는 첩경이라고 볼 수 있다. 친절은 모든 사람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은혜라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의 실천이야말로 우리의 복된 구세주를 닮아갈 수 있는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 백부장에게 뛰어나고 또 고귀한 성품의 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친절과 사랑일 것이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만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차 더 좋은 날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친절은 항상 보상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친절한 사람은 결코 친구없는 고독과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는 법이다.

2.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백부장의 겸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그의 집에 가까이 오셨을 때 그가 주님께 보낸 메시지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이와 같은 그의 표현은 유대인의 장로들이 사용한 말과 매우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라고 저들이 말하고 있는 반면에, 그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겸손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본래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며 또 자기의 더러움과 부패함을 들추어내는 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파악하여 자신을 낮추고 또 겸손해지도록 만드는 일은 사람의 영혼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의 주된 사역에 속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마지막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보다 더 자주 반복되고 있는 내용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잇는 큰 은사와 큰 역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마땅히 겸손으로 옷 입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3.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백부장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주님을 향하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한 그 간구 가운데서 우리는 이에 대한 아름다운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 종이 죽어가고 있는 그 현장에 친히 오실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백부장은 자기가 병사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또 로마의 황제가 자기를 향하여 명령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한 마디의 명령으로 그 질병을 향하여 호령하실 때 그 질병이 곧 떠나가고 말 것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표적이나 기이한 일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 백부장은 오히려 예수님이 전능한 주인이시오 또한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질병은 순종을 잘하는 하인처럼 그의 명령이 떨어지지마자 곧 떠나고 말 것임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겠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신앙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조롱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고 요청했다. 놀라운 그 무엇을 보여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주님께 모여든 대다수 군중들의 지배적인 열망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기사 좇는 무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광야를 통하여 인도하심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그 선조들의 자손들만큼 그토록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되는 경우가 본문에서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한 로마 군인의 신앙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보다 더 훌륭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말이다.
본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 백부장의 축복된 신앙의 정신을 우리는 꼭 본받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된다. 물리적인 눈을 가지고 우리는 생명책을 바라다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계시는 우리의 구세주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믿을진대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슴이 모두 선하게 성취될 것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실한 근거 위에 기초를 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결국 신자들은 모두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또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되는 복을 받아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게서 그렇게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모두 정당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4.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경건한 가정과 더불어 교제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유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백부장의 종의 경우보다 더 좋은 증거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병들어 간호받고 있는 종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의 기도를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주인의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관심을 끌었던 그 종을 목격하게 된다. 그 사람의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의 논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가 언제부터 그런 가정에 들어와서 섬기는 일을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그 날은 참으로 행복한 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의 가정과 더불어 관계를 맺음으로 이같은 큰 유익이 있었을진대, 교회와 더불어 관계를 맺게 될 때 참으로 귀한 유익이 있을 것임을 고백적인 신자라면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들이 자주, 그것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유익을 추구케 할 목적으로 속 사람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현세적 위치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고용인들 역시 보다 좋은 보수를 제공한다면 신앙생활을 지속하기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보직이라 할지라도 서슴치 않고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너무 많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일들은 강뎐히 수정되어야만 한다. 무엇이든지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욕구가 바로 경건한 사람들과 교제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녀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설계하고 또 계획할 때 우리는 항상 마음 속에 한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천하를 얻고도 우리의 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부름받을 때의 좋았던 입장이 어느 때는 경건치 못한 상태일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파면의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Ⅱ.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눅 11:27-32)

한 여인이 본문 가운데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녀의 이름이나 아니면 개인적인 역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단지 본문의 사건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우리 주님은 즉시 그녀의 진술을 통해서 하나의 큰 교훈을 가르쳐주셨다. 그의 완전하신 지혜로 예수님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매우 유익한 교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1.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의 존귀를 얻을 것이라고 성경이 증거한다. 혈통을 따라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모친으로서 그에게 젖을 먹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셔들이는 동정녀 마리아가 더 존귀스럽다는 말이다.
이같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고 또 그의 음성을 친히 들으며 더 나아가서 혈통적으로 그의 친척이 되어 가까이에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에게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들에게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또 감지할 수 있는 신앙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신앙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며 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기독교를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친히 목격한 바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더라”고 증거한다(요 7:5). 육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갈망하는 가장 고귀한 특권이 우리가 믿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바란다. 우리가 가버나움이나 아니면 나사렛 요셉의 집 가까이에 살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을 만지거나 아니면 그의 음성을 들을 때, 또는 그의 친척의 일원이 되었을 때 더욱 깊이 사랑하며 또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라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순수하게 믿는 것보다 자신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또 그를 좇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구세주와 친구로 믿으며 또 모든 희망을 다 버릴지라도 그만을 의지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다. 고귀한 특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찾아오시지 않는 한, 그 무엇도 고귀한 특권일 수 없다. 순수하게 주님을 믿는 이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나가며 또 그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2.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필사적으로 신앙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저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적만을 구하고 있다는 증거를 우리가 받고 있다. 저들은 믿기 전에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마지막 날에 시바 여왕과 니느웨 백성들이 일어나서 유대인을 부끄럽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려올 정도로 믿음이 있는 여왕이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왕이라 할지라도 솔로몬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왕에 불과했다. 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서 회개할 정도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요나 역시 약하고 볼품없는 한 사람의 선지자에 불과했다.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솔로몬이나 혹은 요나가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분명한 가르침과, 또 보다 밝은 빛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왕들의 왕이시오 또한 모세보다 위대하신 선지자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회개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믿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와 세상에 그렇게 불신앙이 만연하고 있는 데도 그것은 우리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고백적인 신자들이 아직까지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감동과 감화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 보아 과연 우리 주위에 참다운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자녀들에게 감염되기 시작한 그 고질적인 병폐를 보았다고 해서 놀랄 일이 무엇이겠는가? 주님 당시에 보여졌던 것보다 더 많은 신앙을 현재의 남녀 백성들게서 기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튼 놀라울 정도로 많아진 불신앙과 완고함은 우리를 슬프게 만들며 또한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랄 만한 이유가 못된다.
우리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모든 성경을 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부패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또 우리는 아담의 모든 자손들에게 감염된 그 질병의 해독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참으로 적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간의 믿음이라도 있는가? 그 좋은 특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던가? 이제는 우리가 불신앙을 경계해야만 하겠다. 불신앙의 나무를 짤라냈다 할지라도 아직 그 뿌리가 우리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거룩한 질투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잘 파수해야 하겠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방패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단이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전복시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은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든든히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믿는 자는 참으로 복있는 사람이다!

3.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부활과 내세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녀의 이름이나 혹은 현재의 거처가 알려지고 있지 않은 남방 여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 또 그는 현재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민족, 곧 니느웨 백성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
여기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언어 속에는 참으로 엄숙하고 교훈적인 그 무엇이 함착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육체를 입고 사는 이 세상적인 삶이 유일한 생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옛날의 모든 왕들과 여왕들이 언젠가 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많던 니느웨 백성들도 다 무덤으로부터 일어나 자신의 행위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그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없어진 공터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백성들이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들의 거처가 완전히 황폐하게 되어버렸다. 또 그들의 벼들도 이제는 흙 속에 파묻혀 완전히 썩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남방의 여왕이나 니느웨 백성들이 다시금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그들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할 수 없다.
부활의 진리를 종종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내세를 자주 생각했으면 좋겠다. 무덤이 사람을 받아들이고 또 그가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집에 살며 또 우리가 사용하던 돈을 쓸 수도 있다. 우리의 이름은 곧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잠깐 후에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이 일어나되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는다는 사실이다(사 26:19). 그런 일들을 생각할 때 벨릭스처럼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행 24:25).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머리를 들고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Ⅲ. 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방금 읽었던 비유에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본문이 회개하지 않은 자가 사후에 맛보는 느낌을 묘사하고 있는 유일한 성경구절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유들도 많지만 이러한 연유로 이 비유는 특별히 주의를 끄는 것이다.
1. 우리는 이 비유에서 세상에서 지냈던 여건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결정짓는 시금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주 예수님은 한 부자와 또 하나의 매우 가난한 사람을 묘사하신다. 한 사람은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고” 지냈으며, 다른 사람은 단순한 “거지”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은혜를 받았고 부자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 살았지만 그 부자는 이기적이며 세상적으로 생각없이 살다가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이 가장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념에 물들지 말자.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 그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그것과 반대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렘 9:24). 부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가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이 세상에서 부요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표준으로 판단하려면 그들이 받은 은혜에 따라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2. 이 비유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모든 계층의 인류에게 반드시 다가올 공통적인 종국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거지”가 받은 시련과 “부자”가 호화롭게 연락하는 것은 모두 결국 끝이 나게 된다. 두 사람 다 죽을 때가 올 것이다.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게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치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먹고 마시며 말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한 위대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훌륭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종종 자신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항상 그 날인 것처럼 살라.” 가난한 처지에 대한 불평, 불만, 시기 그리고 재물을 소유했다고 교만과 자기 만족과 우쭐거림에 빠지는 사람에 대한 가장 좋은 해독제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거지가 죽어서” 그의 육신적인 궁핍은 끝이 났다. “그 부자도 죽어서” 그의 연락도 영원히 끝이 났단 것이다.

3. 이 비유에서 우리는 믿는 자들의 영혼은 죽을 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배운다. 주 예수님은 그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는 커다란 위로가 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느낌과 상태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들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서 임종의 자리에 눕게 될 때 우리는 마치 미지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안전한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의 날 사이의 기간 동안에 집없이 방황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과 함께 친구들과 더불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축복된 사실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빌 1:23).

4. 이 비유에서 우리는 지옥의 실제성과 영원함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주 예수님은 그 부자가 죽은 후에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고민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은 “혀를 서늘하게 할 물”을 한 방울 갈구하는 모습과 아브라함과 그 부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구렁”에 관한 무서운 광경을 말씀해 주신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것보다 더 무서운 말씀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경을 주신 바로 그 분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악인에 대한 영원한 미래의 형벌이 확실이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굳데 붙잡고 놓치지 말자. 사단이 이브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그 날로부터 그 진리를 부저하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있다. 결코 속지 말자. 신자들을 위하여 하늘나라가 있듯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는 지옥이 있다.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 모든 자들에게 임할 진노가 있다(살후 1:8). 그 진노로부터 피하여 위대한 피난처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늦지 않도록 피난하자. 사람이 결국 “지옥에서 고통당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5. 이 비유에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죽은 후에 영혼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해도 그때는 너무 늦으리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 부자가 아직도 살아 있는 그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기를 원했다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 형제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아마 그 부자처럼 세상과 벗하여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일은 온통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죽은 후에야 그는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점과 때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죽은 후에 겪게 될 마음의 변화는 그들의 미래의 상태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수 백 가지의 사실들을 보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에서처럼 자기들의 영원한 축복을 팥죽 한 그릇과 맞바꾸어버린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은 후에는 비관이나 불신앙 또는 배신 등이 없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지옥이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신 것은 지혜로운 말이다.

6. 이 비유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놀라운 기적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 부자는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귀가 닳도록 들었던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들은 소용이 없었지만 그들이 저 세상으로부터 온 사람들을 보면 무엇인가 느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엄숙하고도 교훈적인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는 구원받기 위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덤 저 편에서 온 사자(使者)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 덧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과 의지인 것이다.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부터 살아나서 우리를 가르친다 해도 성경에 포함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해줄 수는 없다. 그들의 증거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이 사라진 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들을 소흘히 하고 우리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수많은 영혼들을 망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구원받기 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더 많은 증거를 기다리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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