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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죠지 휫필드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김재윤 | 2004.12.09 03:13
죠지 휫필드 지음,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지평서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시 46:1-6).

1. 환난의 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옛 유대인들 중에 내려온 한 전설이 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는 작은 갓씨 같았지만 모든 맛을 내기에 적합하였다는 것이다. 우유가 어린아이들에게 모든 맛을 내고, 고기가 성장한 성인들에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가정(假定)이 사실을 기초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히 몰라도, 그 관찰은 다윗의 말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장막을 벗겨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면, 우리의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시편이 영적 잡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행복한 체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시편에서 우리는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 쓰일 수 있는 영적인 무기들을 끌어낼 수 있다. 특별히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언뜻 보기에 ‘주의 손이 자기들을 누르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의 시대에 그러하다. 불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대적한다!”라고 느끼기 쉬운 때가 바로 그러한 때이다.

1) 사람에게는,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시편으로 마음을 돌려, 그 말씀을 볼 수만 있다면 거기서 우리에게 합당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원수를 격퇴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방금 여러분에게 읽어 드린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시편 46편이 그러하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이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의 마음에 적용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어떤 경우에 기록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아마 어떤 날카로운 환난의 고통 속에서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웅변적이 되게 만들었다. 아니면 환난이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렁거릴 때, 그 충만함 속에서 그의 붓이 ‘준비된 작가의 붓’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편 46편을 루터는 애호했다. 우울한 얼굴을 한 멜랑톤이나 다른 친구들이 그에게 서글픈 소식을 말해 줄 때마다 그는 ‘이리 와서 46편을 노래하세’라고 말하곤 했다. 이 시편 46편을 노래할 때 그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았다. 진정으로 애통하며 환난을 받고 있는 분들이 여기에 오셨다면 그분들 모두 같은 체험을 하기를 바란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어느 대목이 가장 감동스러운지는 모르겠다. 경건인지, 시인지, 아니면 이 시편의 주제인지, 시편 기자의 태도인지 어느 것이 더 감동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는 감히 핀달이나 호레이스의 어느 작품을 보여 주면서 이 시편의 어구를 순전히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도록 하는 모든 비평가들을 무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는 말씀을 들으라. 친구 여러분, 더 나가기 전에 잠시 멈추어 보자.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바로 이 첫 구절에서 위로를 끌어낼 수 있게 하옵소서. 자, 여기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라고 말한다. 복수(複數)를 써서 이 시편이 개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 것이다.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이는 그러하다.
절정에 이른 표현을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이는 절정의 한 국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 힘이시니.” 이는 또 다른 절정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라.”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현재 우리를 도우시는 분, 매우 가까이에서 지금, 현재 도우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 바로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나름의 고통을 가지게 될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불똥이 튀어 하늘로 올라가듯이 사람은 고통 받기 위해서 태어난다.’ 만일 우리가 사람으로서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다면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수많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언젠가 휴식을 얻게 되리라는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만큼, 우리 자신을 믿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은 있다.
메대와 바사의 법칙처럼 한 법령이 반포되면 변경되지 않는다. 고통, 많은 환난의 고통을 우리는 모든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우리는 그 고통을 통과하도록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그 끝은 영광이로다! 하나님께서 복된 시험을 통해서 이 점을 우리가 알게 하시기를 바란다.

2) 믿는 자의 피난처는 하나님, 불신자의 피난처는 마귀이다.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 종류의 환난과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아무런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 디도가 말했던 것같이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루를 지날 때마다 반성하며, 아무런 선을 행하지 않은 날은 “내가 오늘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환난이 오고 또 다른 환난이 이어져 우리가 가는 곳마다 환난이 따라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그 환난이 땅에서 일어나 우리가 행하는 곳마다 우리를 만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나님을 찬미하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참여한 바 되었다면 그 점을 유념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오, 우리의 피난처시오, 우리의 도피성, 즉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그 도피성이다. 쫓기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날래게 그 도피성으로 피하면 안전함을 얻는다.
이에 대해서 악인들은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한다.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무엇이 그들의 피난처인가? 한 영혼이 신령한 괴로움을 받으면서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울부짖게 내버려 두라. 그로 하여금 신분상의 목사에게 찾아가게 하라.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회심하지 않은 곤고한 사람을 찾아갔다면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오! 가서 죄가 되지 않는 카드 놀이를 해봐요. 그리고 기분 전환을 해봐요.” 말하자면, 마귀는 그런 사람들의 피난처임에 틀림없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세상적인 피난처를 가지고 있다.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말할 때 아주 진지한 모습을 띠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는가? 그는 한 성(城)을 건설함으로써 기분 전환을 하고, 그 집을 지어 자신을 위로한다.
형제 여러분, 마귀는 여러분 자신을 즐겁게 하도록 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 다양한 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기분 전환을 하는 데에만 관련된 것이다. 마귀는 여러분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보다 나은 것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거짓말의 피난처를 쓸어버린다. 믿는 자는 자기의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마귀가 나를 추적한다. 이렇게 말하라. “내 거짓된 친구들이 나를 대적하여 모의를 꾸민다. 내 자신의 악한 마음도 ‘내 집안 식구가 나의 원수들이니라’라고 말하며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러나,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피난처가 되시오니, 내가 주께로 날아가리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표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나더라 날아가라 하는데 어디서 그 날아갈 날개를 얻는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지원을 받을 것인가?
여기에 복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 힘이시니.” 힘이라 하면, 무슨 힘인가?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환난의 모든 날을 능히 감당하여 우리로 그 환난의 통과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행하실 것이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2. 현재,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도움’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환난이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공포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나의 하나님, 내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시련을 받게 되면 어떻게 그것을 견뎌 낼까요?”
그러나 시련이 오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참아 낼 수 있을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실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까지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이신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한다.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곤란 중에 우리를 지원하시는 도움이다.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를 위로하시는 도움을 주신다.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우리가 그 고통을 감내해 내고 통과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도움을 베푸실 것이다.

1) 하나님의 도움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그 도움을 어떤 종류의 도움일까? 오, 하나님을 찬미하리로다! ‘하나님은 바로 현재의 도움이시다.’ 우리는 돕는 자를 두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돕는 자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병들었고 의사가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의사를 불러 오려면 수 마임을 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떻게 할까?’라고 하나님께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도움이실 뿐만 아니라, ‘현재, 여기 이 자리에서 도움’이 되시는 것이다.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5).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면 된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왕상 18:27)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두고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여기 함께 계시며 돕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도움이 되신다. 다시 말하면, ‘매우 현재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특히 ‘환난의 때’에 그러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날개를 의지하여 짧은 신호, 곧 짧은 기도만 드리면 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금방 내려오셔서 우리를 도우신다.
자, 다윗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시고,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를 즉시 돕는 분이시며, 또한 환난 때에도 그러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도와줄 분이 계시면 두렵지 않다.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3). 이것이 앞에 나오는 그 전제의 말씀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결론이요 추론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안달하며 두려워하고 불신앙 하는 것보다 믿음의 더 큰 대적은 없다.
형제들이여, 마귀가 우리를 두려움의 상태로 이끌어 들였을 때, 마귀는 우리를 장악하는 이로운 고지를 이미 점령한 셈이 된다. 진실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두려워해야 한다. 자녀가 아버지에 대해서 갖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상 두려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
내 형제들이여,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을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고 명한다. 느헤미야는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느 6:11)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어찌 두려워하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까 두려워하랴?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아니 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는가?
다윗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자, 시인 호레이스는 어디 있으며, 핀다르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로 이로 와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자 앞에 자기들의 시를 던지라고 말하다. 세상의 어떤 인간이 지은 작품 가운데서도 그처럼 대담한 상상을 나타낸 작품을 없다. 어떤 것이 이보다 위대하고 더 사려 깊게 보이겠는가?
세 번째 지진, 광신주의적인 미련한 사람이라고 우리를 위협하던 몇 년 전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같은 해 두 번이나 무서운 지진을 보내셨을 때 우리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때 땅이 흔들리고 요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의 기초가 흔들려 깨어지고 그 앞에서 잉글랜드의 산들이 요동쳤다.
그때 우리 모두는 피할 수 없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전율으리 느껴야 했는가! 다윗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한다. 저도 그 큰 날(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워지면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타 버리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나 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소요(騷擾)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윗은 이 시편을 기록하기 얼마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다른 대적들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곤고한 일을 만났었다. 우리에게도 도울 자 없이 혼자 있는 것 같은 때들이 있다.
형제들이여, 이것은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안거리가 되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때때로 땅들이 요동치는 것같이 보인다. 그때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기뻐하던 모든 친구들과 가장 친밀한 친구들, 우리 영혼의 친구들과 육신의 친구들,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친구들까지도 죽음의 가격(加擊)으로 말미암아 우리로부터 떠나 버릴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죽음의 가격이 얼마나 빨리 올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지 않은 시간에 올 수도 있다. 산들과 영구한 위로의 환경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를 보장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금방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말은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직접 당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믿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친다. “비록 모든 친구들이 가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가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하나님을 찬미하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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