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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진정한 기독교

김재윤 | 2005.02.01 15:51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진정한 기독교, 복있는 사람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강림, 교회의 탄생, 확신에 찬 사도들의 설교, 드라마틱한 선교 여정, 구원받은 영혼과 거듭난 삶의 증거들…. 그것은 무기력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적 교회의 영적 통찰과 뜨거운 신앙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도전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사역 최고 정점에서 이 다이내믹한 사도행전을 설교했다. 단순하고 확신에 찬 그의 영적 언어는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있는 독자들에게 생수가 되고, 말씀을 통해 사람의 상태를 빈틈없이 분석하고 시대의 징조를 예리하게 읽어 내는 그의 영안은 죄성에 마비된 우리의 영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그의 설교를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와 교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Ⅰ. 기독교, 오직 하나뿐인 희망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1-3

기독교란 무엇인가? 지금 이보다 더 긴급한 질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복음이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이 모두 시도되었지만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은 철학자나 정치가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소위 세상 종교들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오직 복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복음 역시 희망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복음 또한 지금까지 2천 년이나 시도되었지만, 당신이 언급한 여러 가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여기에 대한 유일한 답은, 작고한 체스터튼이 아주 완벽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시도된 적도 부족함이 드러난 적도 없다. 다만 어렵다고 여겨져 시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세상은 한번도 기독교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말들은 많이 했지만, 기독교를 진정으로 시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기독교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긴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나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뿐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우셨습니다. 저의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서 얻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게 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늘 아래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가장 큰 비극은 복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극심한 혼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제게 이런 부담감이 없었다면 저는 설교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저는 목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지금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뭐지? 교회가 뭐지?”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이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습니다.
이런 혼란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를 점점 두렵게 하는 것은, 교회 바깥의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이 주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단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강연자로도 유명한 사람이 최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당장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첫 번째가,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리는 어리석은 습관을 버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예배는 한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오전 9시에 한번만 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면 1년 동안 성경 읽기를 금하는 포고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교회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주일아침 9시에 딱 한번만 드리는 예배에서 적어도 1년간은 정치에 관한 설교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런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요즈음 나돌고 있는 너무나 전형적인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놀랄 일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해 이 시대의 생각은, 기독교의 메시지는 결국 우리의 일들이 어떻게 정돈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가르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의를 해결하고 개혁하는 것이 교회의 주된 일이며,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일종의 사회적 강령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전혀 관심이 없고, 대개는 구약을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사도 바울도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정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정치강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을 최대한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어서도 안되고, 다만 이러한 일반원칙들을 취해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두고 고상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이며 일종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좀더 고상하게 사는 법을 찾았고 도덕적 향상을 경험했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도 이 원칙들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를 주로 도덕과 행위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 좀더 다가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들은 사람들이 이러한 윤리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곧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에서 이들의 공통된 시각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순수한 도덕적 가르침인데,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에서 이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에게 있어 성경은 중요하지도 않은 많은 역사로 어지럽습니다. 성경은 대부분 거짓인 데다가 분명히 사실이 아니며, 과학적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도 믿을 수 없는 많은 기적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껍데기와 지푸라기 속에 숨겨져 이는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핵심을 찾아내고 나면, 성경을 무시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도덕적 상황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실행에 옮기도록 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며, 교회의 역할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이제 저는 이 모든 것들을 다루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주의를 사도행전의 첫 세 절에 집중시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보십시오. 교회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질문입니다. 20세기를 교회의 기원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인용한 말씀에는 교회의 기원을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이며 기독교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을 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권위의 문제가 일차적이며 근본적이라는 데에는 여러분도 저와 생각이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이며 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선언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가?”라고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란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2천 년이나 되는 역사와 결별한 채 과거에 일어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의 관심은 현재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교회의 기원과 관련해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권위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경의 권위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복음서 기자인 누가입니다. 그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쓴 글”은 도입부가 사도행전과 비슷한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1:1-4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데오빌로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추정컨대, 그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지성과 학신을 갖추었으며 기독교에 관해 다양한 보고를 듣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이자 아주 유능한 역사가인 누가를 알게 되었는데,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누가는 이야기의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매우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접촉이 있었고,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사실 이런 말로 편지를 썼습니다. “일어난 일을 각하께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을 왜 믿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께 자세한 내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는 이 일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했습니다. 첫째 부분은 복음서이고 둘째 부분은 사도행전입니다. 우리는 그때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권일 뿐 아니라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예루살렘 권세가들이 평범하고 단순하며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여긴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남자 열 두 명뿐이었는데 약간의 사람들이 가세했습니다. 이들은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었고 유명하지도 않았으며, 지위도 돈도 통신수단도 선전수단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무지하고 무식한 소수의 사람들이, 사도행전 17장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행 17:6, KJV)는 것입니다. 불과 200년 사이에 기독교는 대로마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3세기가 시작될 무렵 기독교는 이미 너무나 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황제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관심은 이 사실을 살펴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기독교를 공인할 정도로, 소수의 사람들이 로마제국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까? 이들이 고대세계를 뒤집어 놓은 것은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까?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기독교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세계사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사를 빼놓고는 세계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현대의 사상이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직과 상식은 우리에게 사도행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의미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사건과, 세상과 육적인 것과 마귀와 인간과 지옥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의 놀라운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설명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여러분에게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행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 앞에 제시된 특정한 주제들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입니다. 제가 느끼건대 현대세계는 데오빌로와 아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이런 것들을 숙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데오빌로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도덕생활이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혼의 깊은 상처가 있으며, 여러분을 낙담시키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지만 교회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데오빌로들이여,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를 알기 원하고, 다행히도 우리는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기독교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저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고백한 챨스 웨슬리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의견은,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단 한번의 설교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 세상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든지 찾아가서 말하고 전파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라는 이 엄청난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에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첫째, 이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1-3).

이 말씀은 누가복음 전체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대원칙이 있습니다.
출발점이자 근본적인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사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각하께 그분에 관해 써보냈습니다. 이제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인물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에 적용돼야 할 도덕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는 순수한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교회에서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그분은 누가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분은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실이 잊혀졌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분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주님은 이들을 내보내시면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전파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주님의 제자들이 항상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행 17:18). 이들은 사람들에게 가서 그분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르친 전부였습니다. 이들은 결코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 보세요. 예수라는 분에 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들입니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사실들을 제시했으며, 여기 사도행전에서 사실들을 다시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중요성에도 동일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그분의 가르침, 이 둘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 가장 특별한 것을 추가하셨습니다. “너희가…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여기 가난하게 태어나 목수 일을 하던 한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는 서른 살에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약3년 후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여기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온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히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여러분에게 종교적 심성이나 종교를 보는 눈이 없어도 상관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종교를 선택하면 그만이며, 그중 기독교가 괜찮은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주님의 말씀에 비춰 보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기 땅 끝까지 선포되어야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라는 분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철학이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다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를 믿을 의무가 없을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철학파와 가르침과 이론들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이것을 믿고 저 사람은 저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대면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믿는 바가 아니라 바로 사실들입니다. 그 사실들은 예수라는 인물, 그분이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성경을 덮어라. 사실들은 전혀 중요치 않다. 예수가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었는가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잘못 짚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인물입니다.
누가가 뭐라고 하는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복음서에서 기록한 모든 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 기독교에 관심이 있으며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에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는 그의 복음서 스물네 장에 걸쳐 전개됩니다. 여기서 누가는 모든 것을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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