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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기독교 중심

김재윤 | 2004.08.23 18:4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기독교 중심, 개혁된 신앙사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는 에드워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맥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 산맥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에드워즈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신칭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시의 중심 내용이요, 그 모든 계시가 증거 하는 모든 신비의 중심 내용이며, 본성의 빛을 초월하여 특별히 계시에 속하는 모든 위대한 교리들의 중심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롭다 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율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 특별히 경건치 아니한 자 곧 율법 수여자를 향하여 이미 반역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율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히 더더욱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고, 바로 그 때 그 부활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모든 사람들의 보증인과 대리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함축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 법의 적법성(適法性)과 조화미(調和美)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법에는 행해야 적법한 것들이 반드시 행해져야 할 것으로 제정되어 있다. 또 하나님의 법에는 서로 어울리는 것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된 법을 따라 신자를 의롭다하시는 이유는 틀림없이, 신자가 의롭다함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를 믿음이라는 이 자격 안에서 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칭의를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영접하는 ‘도구’나 소위 ‘손’이기 때문일 때도 그렇고, 믿음이 영접 그 자체나 그 밖의 다른 무엇이기 때문일 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단코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일이 없으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으로서 질서를 사랑하시고 어지러움을 싫어하시며 모든 사물들이 각각의 특성에 알맞게 함께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구조로 일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질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의 상태와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지, 믿음도 그렇고 다른 자격들이나 한 가지 또는 일련의 행동들도 그렇고, 그것들 안에 있는 탁월함이나 그 사람 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그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구주의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합당한 일로 만들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만들 수도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은 그 대상이 되는 존대 안에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손실(損失)에 비례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느냐에 비례하여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의 탁월함과 존경받을 만한 가치에 비례하여 사악하거나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죄책이나 무한한 비열함에 비할 때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로 여기시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자아에 속한 사람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함은 그 사람의 죄책이나 가증스러움과 함께 하나님의 눈에 비쳐질 수 밖에 없다. 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함은 그 사람의 죄책이나 가증스러움과 함께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질 수 밖에 없다.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것을 사랑스럽게 여기신다는 증거로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하사(下賜)하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왜 그런가? 구주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일보다 먼저 앞서는 (뿐만 아니라 구주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일보다도 먼저 앞서는)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어주는 쪽이 우리의 인격이나 행동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싶다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탁월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친절함을 베풀어 줄 때, 그것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쪽의 풍성한 인자를 더 크게 부각시킨다. 은혜를 베풀고 싶다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탁월함이나 사랑스러움이 받는 사람에게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은 은혜를 베풀어주는 쪽의 더 풍성하고 넘치는 인자를 또는 인자함을 보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호의(好意)나 친절함을 베풀고 싶다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받는 쪽에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은 주는 쪽에서 호의와 친절함을 베풀어주고자 하는 신념을 얼마나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지를 더 분명하게 입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율법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신 일은 우리의 것으로 전가된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신 일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일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마치 우리가 직접 율법의 형벌을 감당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여겨진다는 것이다.
칭의의 선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이다. 칭의 선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이다. 칭의 선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또 다른 칭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사람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의 칭의가 성립할 수 없다.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시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자신을 우리가 행해야 하는 율법 아래 두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율법에 따라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고, 또 그 율법에 따라서 순종을 하셔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의 보증인이셨기 때문에 사람의 죄책을 짊어지신 후에 고난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면(赦免)될 수 없으셨고 순종을 하시기 전까지는 상(賞)을 받으실 수 없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신 후에야 사면되셨고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후에야 상을 받으실 수 있었다.
본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등하셨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고, 사람의 법 아래 굴복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으며, 어떤 상태로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계명, 곧 목숨을 버리라는 계명은 우리가 위반한 율법에 속한 계명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법을 우리 대신 순종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위반하고 불순종한 바로 그 율법을 우리 대신 순종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신 일은 우리를 위해 이행하신 순종에 속하지 않는다.
아담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시험하는 것은 반드시 실정법 계명이어야만 했다. 그리야만 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계명이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던 계명은 순종을 시험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적합한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계명들의 경우 입법자의 권위와 의지만이 그 계명을 의무로 받아들여 순종해야 하는 유일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결코 의무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계명들의 경우, 그 계명을 명(命) 받은 당사자들이 입법자의 권위와 의지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시금석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오직 단 하나의 위대한 율법뿐이다. “죄를 범하는 자는 정녕 죽을지니라”,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라고 말하는 바로 그 율법이다. 실정법 법령에 속한 모든 의무들은 실질적으로 이 율법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유대인들이 의식법을 어기면, 이 율법은 율법의 형벌이나 “정녕 죽으리라”라고 위협한 행위 언약의 형벌에 그들을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였던 만큼 우리는 바로 그만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순종 행위였던 만큼 우리는 바로 그만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우리의 구원을 획득한 유일한 순종 행위가 아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에 대한 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이전에도 우리 자신의 순종에 의해서 하나님의 용납과 은총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탁월함에 대해서 상을 베푼다는 것은 그 탁월함으로 인해서 이미 그 사람을 용납해 주고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준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칭의는 특별한 방식으로 믿음의 첫 행위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하는 그 즉시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그 첫 행위에서 견인에 관하여 비록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여러 가지 혜택들 중에서 견인에 관한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에 필요했던 그 이유와 동일하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한 번이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동일히다. 영혼이 지금 현재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 영혼이 지금 현재 정죄로부터 벗어나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 단순히 이전에 한 번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견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에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시되 마치 믿음의 견인이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고려하신다. 그리고 믿는 신자는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 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때 염두에 두고 계셨던 ‘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가 응당 받아야 하는 형벌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일만 달란트 빚이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참된 믿음의 행위라고 할지라도 매우 연약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다. 또 회심 이후의 믿음의 행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첫 행위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믿음의 첫 행위는 자궁 안에 있는 태아(胎兒)의 최초 태동(胎動)처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믿음의 첫 행위는 굉장히 연약한 행위일 수 있다. 그 결과 그것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아무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참으로 믿음의 행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정짓지 못할 수도 있다.
순종하는 사람이 실제로 구원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칭의와 거룩이 실제로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명제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순종과 구원은 실제로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
하늘의 영광을 실제적으로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순종 때문에 우리가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미덕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 그리하여 포상될 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칭의보다 결코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칭의 이후에 따라오는 결과이며 전적으로 칭의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모시고 그 분 아래서 행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발휘하는 사랑이나 그 외의 다른 은혜의 여러 가지 활동들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필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든 천사든) 피조물의 사랑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필적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불쾌감만 더하고 진노만 불러일으키는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수반하는 결점들은 곧 죄가 되고, 모든 죄는 무한히 가증스러운 것이므로 그런 결점들도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가증스러운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의 가증스러움은 그 일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랑스러움을 무한히 능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로 인해서 그들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가치와 품위를 갖게 된다. 성도들의 작은 거룩, 연약하고 미약한 사랑,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미덕들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자신의 눈에 한없이 소중한 아들의 지체처럼 여기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더욱 더 존엄한 사람들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의(義)때문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가치는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토대요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인 원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의로 모든 성도를 위해 각자의 역량에 따라 완전하고 완벽한 행복을 얻어 주셨다. 그러나 성도들은 서로 다른 역량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수준의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모든 행복은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열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로 모든 성도를 위해 완전하고 완벽한 행복을 얻더 주셨다는 사실과 성도들은 서로 다른 역량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수준의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때에는 그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열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날 때에는 그들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쫓겨나는 법이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아 연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행위이다. 반면에 구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위대한 유익들을 향유했던 외적인 신앙 고백자들을 죽음의 날과 심판의 날에 축출시키는 일은 공의로운 행동이요 그리스도를 합당치 못하게 대접했던 그들에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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