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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마태복음 강해

김재윤 | 2004.10.08 15:23
존 라일 지음, 마태복음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존 라일(1816-1900) 목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한 작은 교구에서 그의 첫 목회생활을 시작하여 리버풀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받았다.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스펄젼 목사와 쌍벽을 이룬 설교자였다.
라일은 마태복음서에 서두에서 이 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 ‘마태복음서 강해’를 쓰면서 내가 택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성경 내용 중 평균 약 열 두 절을 한 단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각의 구절에 대해 짧고도 명백하며 연관성 있는 일련의 ‘강해’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각각의 해설의 첫부분에서는 검토 중인 구절의 범위와 목적을 가능한 한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그 구절에서는 두 서너개의 요점들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그 요점들만을 강조하여 그것들이 명백하고 힘있게 독자들의 주의를 끌도록 노력하였다. 내가 선택한 요점들은 때로는 교리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적이기도 하다. 요점을 선택할 때의 하나의 원칙은 그것이 그 구절의 중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솔직히 나는 이 글의 문체나 문장에 퍽 마음을 써서 가능한 한 명백하고 예리하게 쓰고자 하였다. 나이 많은 저명한 신학자의 소위 ‘쏙 뽑아서 말쑥하게 포장한 듯한’ 말들을 택하려 했다. 이제 본서가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조장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넓히도록 돕고,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교육시키는 성경책의 보조물로서 소박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로 본서를 펴낸다.”

Ⅰ. 용서의 교훈 마 18:15-17

본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며 보여 주신 은혜와 긍휼을 같은 믿음을 가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 영광스런 엄위를 침해한 대죄(大罪)를 용서하시고 무거운 죄의 짐을 면케 하셨다. 그런데 이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다면 우리는 얼마나 악하고 배은망덕한 존재들이겠는가! 엄격히 따져 보면, 우리의 죄가 하나님을 침해한 일과 형제의 잘못이 우리를 침해한 일은 서로 비교가 될 만한 일이 아니다. 그 차이는 비류없이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천하고 죄로 물든 피조둘인 우리들 사이의 차이와 같다고 하겠다. 바로 이것이 23-24절에 소개되는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에서 종이 임금에게 진 빚의 총액은 일만 달란트, 즉 오늘날 화폐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그 종의 동료가 그 종에게 진 빚은 약 일만 원 가량 되는 액수였다. 임금은 종의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으나 탕감받는 종은 액수로 보아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하챦은 동료의 빚을 면제하는 일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얼마나 악하고 인색한 종인가! 하지만 이것은 오직 우리가 우리에게 범죄한 이들에게 완고하고 독하고 앙심을 품고 용서할 줄을 모를 때에 우리가 지니는 말할 수 없이 인색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例)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형제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 줄 모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거나 기대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이 35절의 일침(一針)이 되는 말씀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문제에 대해 오해와 오용(誤用)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형제들을 용서한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그 죄「우리에게 대해」지어진 죄일 뿐이다(21절/ 눅 17:4 참조). 예수께서는 지금「하나님께 대해」지어진 죄에 대한 용서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우리에게」범한 잘못도 하나님께 지은 죄이며, 더 나아가 그 잘못을 우리에게 가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하나님께」범해진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우리에게 범해진 죄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죄라면 그 죄를 용서할 궈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우리에게」범해진 죄이다. 이를테면, 가해(加害), 욕, 비방 등으로 우리 인격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잘못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죄를 기꺼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렇게 기꺼이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면 그는 지체하지 않고 와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를 찾아가 책망해야 한다: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5절).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에게 바른 정신 상태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로써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다시금 화해와 친분 관계를 맺을 만한 입장에 설 것이다.

우리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잘못을 모른 체하고 덮어 주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용서할 마음을 갖는 것도 아니다. 도한 마지 못해 참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우리가 베푸는 분명한 행위이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용서란 이처럼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뉘우친 터 위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할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용서가 의미하는 바를 잘못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매우 허약하게 만들며, 우리가 형제들과 마땅히 유지해야 할 관계를 저해하고 만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순히 용서만 해주시고 실제적으로 무죄(無罪)나 면제의 판결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어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겠는가!

참된 용서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베드로의 질문(21, 22절)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핵심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 물론 한 사람이 반복해서 피해와 모욕을 주는 일에 대해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일에 우리의 오래 참음은 다함이 없어야 한다. 입장을 바꿔,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에 어떤 한계점이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지니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지니는 태도를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가 우리의 충고를 묵살해 버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본문 16, 1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일을 비밀을 유지한 가운데 처리해야 함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기를 얼마나 자상하게 요구하시는가. 우리는 먼저 엄격한 비밀 하에 형제를 책망해야 한다. 만일 그대로 안 되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함께 책망해야 한다. 이 일도 역시 조용하게 처리해야 하며, 만일 함께 간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형제가 뉘우치면 그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즉, 그 일은 그 무리의 용서로 매듭지어지는 것이다. 단지 이렇게 함께 가서 책망을 해도 소용이 없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의 교회로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서야 그 사건은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만 그 문제를 교회에 제소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호소하는 것은 특별히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지체들관의 불화를 해소하려는 관심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정직과 조화를 권징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그 문제를 맡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해결 방법은 없다. 만일 형제가 여전히 뉘우칠 줄 모른다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거나 존중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정(認定)하시고 친히 인(印) 치신 곳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은 기록된 말씀 안에 나타나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준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일을 하나님이 인정(認定)하고 가납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말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동일하다.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제(諸)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것일 때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認定)을 지니는 것이며, 우리는 그 결정들이 단지 사람들의 결정 뿐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감히 항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결정들이 성경의 원칙들을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Ⅱ. 마 25:14-30 달란트 비유

우리가 지금 읽은 달란트의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와 거의 유사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중요한 사건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과 꼭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열 처녀와 종들은 꼭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람들을 다른 관점에서, 즉 다른 면에서 관찰해본 것이다. 각 비유에 담겨있는 실제적인 교훈에는 서로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 번째 비유에서의 중요한 점은 경계이고, 두 번째 비유에서의 중요한 점은 근면이다. 열 처녀의 이야기는 교회로 하여금 경계할 것을 요구하며 달란트의 이야기를 교회로 하여금 일할 것을 요구한다.

1. 이 비유에서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임무로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
“달란트”라는 말은 그 원래의 의미와는 이상하게 변화된 표현이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남다른 훌륭한 능력이나 재능을 가진 사라들 외에는 적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단지 현대적인 창안일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사용하신 그 단어의 의미는 모든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모두가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든지 달란트이다. 우리의 재능, 권세, 돈, 지식, 건강, 힘, 시간, 감각, 이성, 지성, 기억, 애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도로서 가지는 특권, 성경을 가진 자의 유익, 이 모든 것이 달란트이다. 이러한 것들이 어디서 왔는가? 누가 이러한 것을 부여해주었는가? 무엇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했는가? 우리는 왜 땅 위를 네 발로 기어다니는 벌레가 안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단 한 가지의 대답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채무자들이다. 이러한 생각을 우리 마음 속 싶이 새겨두자.

2.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과 자비를 오용하고 있음에 대해 배운다. 이 비유에는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둔” 자에 데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종은 대부분의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다.
우리의 달란트를 감추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유지할 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회를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성경을 멸시하는 자, 기도에 게으른 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육적인 자,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자, 시간을 낭비하는 자, 분별이 없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돈을 사랑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방종한 자, 이 모두가 주님의 돈을 땅에 묻어 둔 자와 같다. 그들은 모두 사용하지 않는 등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현재의 그들보다 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날마다 훔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빌려 주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갚지 않는다. “너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너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 5:23). 다니엘이 벨사살왕에게 한 이 말은 모든 회심치 아니한 자들에게 엄격하게 적용할 수가 있다.

3.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젠가는 하나님과 계산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개했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앞에 심판이 놓여 있다. 만일 심판이 없다면 성경의 말씀들은 그 의미를 갖기 못한다. 성경을 부인하는 자는 단지 성경을 소흘히 취급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우리의 올바른 행위에 따라 우리는 확실하고 엄격하며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는다. 높은 자나 낮은 자,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학식있는 자와 무지한 자, 이 모두가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하며 영원한 판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숨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결국 정면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모든 특권과 우리가 받았던 모든 빚을 계산하여 갚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있고 신뢰할 수 있는 피조물로 다루고 계신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많은 것을 부여해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우리는 “주님께 책망받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살피도록” 해야겠다.

4.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풍부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배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주인의 돈을 잘 이용했던 종들은 “착하고 충성되었다”라고 칭찬을 받았으며,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말을 듣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말씀들은 모든 믿는 자들을 기쁨으로 충만케 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며 깊이 경탄케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잘것 없으 약한 피조물이어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날마다 속죄의 보혈이 필요하다. 믿는 자들 중에서 지극히 낮은 자는 그가 그리스도의 종들 가운데에 포함되리라는 것과 그의 노력이 주 안에서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 것보다도 주님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의 노력을 더 아름답게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일에 바쳤으며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했던 모든 말이 비망록에 적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믿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내어야 하겠다. 지금은 십자가가 무거울지라도 그 보상으로 영광스러운 상급을 우리 모두에게 주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슬플지라도 내세에서 우리는 기쁨에 참예할 것이다”라고 레이톤이 잘 말해주고 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신도들은 심판날에 책망받고 버림을 당하게 될 것에 대하여 배운다. 이 비유에서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으며,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쫒긴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 주님께서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엄숙한 말씀을 더하셨다.
회개치 않은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에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현재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있다고 핑계하는 이유들이 헛되고 무익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옳은 일을 행한 것에 근거를 두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잃어 버린 영혼이 파멸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에 기초를 둘 것이다. “너는 알고 있었다”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의 귀에 크게 경종을 울려야만 하며,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도 없고 개심하지도 않는 가운데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댄다. 항상 그들은 죄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양심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달란트를 묻어두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을 늦지 않게 깨닫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이 판명될 것이다.
우리는 실행이 없는 신앙에 만족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엄숙하게 결심하면서 이 비유에 관한 공부를 끝마쳐야겠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토론할 뿐만 아니라 실행을 해야겠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어떠한 일을 실행해야겠다. 우리는 그 무익한 종이 살인자나 도적이나 주님의 돈을 낭비해버린 자라고는 듣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그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갖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러한 신앙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박스터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돌이 칭찬을 받을 일이지 인간으로서는 칭찬을 받을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Ⅲ. 겟세마네의 기도 마 26:36-46

본문은 흔히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뇌라고 불리운다. 본문은 말할 필요도 없이 깊고 신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으므로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여기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왜 그렇게도 “고민하고 슬퍼” 하셨는가? “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째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 멀리 떨어져서 땅에 얼굴을 대시고 그의 아버지께 크게 부르짖으며 세 번이나 되풀이 하여 기도하셨는가?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들이 왜 그렇게도 고민하고 동요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예수님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죽음의 때가 다가왔을 때 연약해지기 쉬운 우리 인간들처럼 되셨는가? 이 모든 것은 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우리 주님의 영혼을 무겁게 내리눌렀던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고통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심한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죽어간다. 아마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이 세상의 죄라는 짐이었고 이 짐이 아주 강력하게 주님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에게 우리의 죄가 전가된 것이며, 한 마리 희생 양의 머리 위에처럼 우리 주님 위에 놓여진 것이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이 때의 그리스도는 순결한 양심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 그리고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죄받은 영혼들이 겪어야 했던 것과 꼭같은 고통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아무리 이 부분이 신비스럽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실제적으로 우리를 지도해주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교훈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우리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기도가 가장 실제적인 구제 수단임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도 그의 영혼이 슬퍼하였을 때에 기도하셨음을 볼 수 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고통은 이 세상의 죄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셔야만 하는 잔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욥 5:7).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인간만큼 상처입기 쉬운 것은 없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가족, 사업, 친구는 모두 고난이 스며들 수 있는 문과 같은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성도들조차 그것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들의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슬픔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을 때에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마치 욥처럼 땅에 엎드려서 예배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처럼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펼쳐 놓아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구할 첫 번째 분은 우리 하나님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우리의 모든 슬픔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그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 어느 것도 사소하거나 하찮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이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의 표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응답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할만 하시다면” 그리고 우리가 구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이루어질 것이다. 몸에 박힌 가시는 뽑아낼 수도 있지만 바울의 경우처럼 그것을 참아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교훈을 곤고한 때를 위해 잘 기억하도록 하자. “기도는 걱정을 없애준다”라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2.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완전히 순종시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우리의 주된 목표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따라야 할 정신의 아름다운 본보기이다.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며, 다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신성화되지 않고 절제되지 않은 의지는, 삶에 있어서 불행을 가져오는 큰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 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한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바라고 원하나 무엇이 우리에게 좋으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적당하지 않은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또한 잊고 있는 것이다. 아무 욕망도 갖지 않고 모든 처지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쉽게 배울 수 없는 교훈이지만 바울처럼 우리는 그것을 인간들의 학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중생했는가, 또 은혜 속에서 자라고 있는가를 알고자 원하는가? 우리의 의지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실망을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시련과 고난을 참을성있게 견뎌낼 수 있는가? 우리는 한창 부풀었던 계획들이 그냥 무산되어 버린 것을 투덜대거나 불평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편으로 조용히 앉아서 고통을 참아낼 수도 있는가? 이것들은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를 증명해 주는 것들이다. 따뜻한 감정과 즐거운 기분만이 참된 은총의 증거만은 아님을 잊지 말도록 하자. 자신의 의지를 순종사키는 것은 훨씬 더 값진 보물이다. 주님도 항상 기뻐하신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조차도 언제가 깨어 그것에 대해 기도해야만 하는 큰 약점이 있음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선택된 세 제자,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깨어 기도해야만 했을 때에 자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또한 우리 주님이 그들에게 아주 엄숙하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보게 된다.
모든 신도들의 마음 속에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다. 회심하였고 새로워졌으며 거룩해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 안에 내재하는 부패의 덩이, 즉 죄의 몸을 가지고 다닌다. 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오는 것을 보도다”라고 말할 때 그는 바로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연령계층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모순된 두 가지 원리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잠에 취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는 하나를 육신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이 약점을 변호하고 계시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주님의 의미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주님은 이 약함 때문에 바로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약점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도록” 자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참된 믿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평안히 기쁘게 동행하며, 다윗이나 베드로처럼 넘어지지 않도록 언제나 깨어 기도할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적군의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언제나 경계하며 살도록 하자. 우리가 아무리 경계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을 빈틈없이 지켜야만 한다. 이 세상은 아주 유혹적이고 사단은 매우 분주하다. 우리 주님의 마씀이 매일 우리의 귓가를 나팔소리처럼 울리도록 하자. 우리의 마음은 때로 순종하고자 하겠지만 언제나 우리의 육체는 매우 약하다. 그러므로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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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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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존 라일의 요한복음서 강해 김재윤 2004.11.10 11:30
49 존 라일의 마가복음서 강해 김재윤 2004.11.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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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강해 김재윤 2004.10.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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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행한 참된 성도의 사랑 김재윤 2004.10.08 15:22
44 철학의 위안을 읽고 강석천 2004.10.08 13:27
43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1~3장 요약 채대광 2004.10.04 02:04
42 성도의 견인 (존 오웬) 채대광 2004.10.04 01:51
41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 김재윤 2004.09.02 21:18
40 기독교 중심 김재윤 2004.08.23 18:42
39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김재윤 2004.08.11 20:11
38 사도신경 강해 1 김재윤 2004.08.02 22:20
37 칭의 교리의 진수 김재윤 2004.07.11 20:16
36 창세기3장 주해(나됨) 107p 사람창조 과정중 "생기"에 대한 부분을 이홍기 2004.07.07 22:29
35 놀라운 회심 이야기 김재윤 2004.07.05 20:16
34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헨리 블랙커비/NCD) 조영민 2004.07.02 10:53
33 창세기3장 주해 (나됨. 448p) 이홍기 2004.06.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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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책 읽는 방법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채대광 2004.06.0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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