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궁핍과 청빈의 차이는...
“수고한 만큼 최대한 사례를 지불하도록 하려고 해”
곧 교회를 개척하시며 나를 부르신 목사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셨다. 오래전부터 같은 교회에서 청년과 목회자로 있었던 목사님은 직장을 다니다가 목회의 길로 들어서려는 나에게 동참을 말씀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준비모임 몇 달 후 본격적으로 목적했던 곳에서 개척을 시작한 후 거의 11년을 동역했고 신학생 시절 빼놓고는 파트였든, 준파트였든 전임이었든 그 위치에 상관없이 교회에 올인했다. 그 기간 동안 평균 5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집이 인천이고 사역지는 서울이라 출퇴근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처음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례가 지급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목사님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목사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상과 현실 상황이 많은 격차를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 평균보다 많이 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평균을 넘어선 것은 아닐 듯 싶었다. 아주 예외적이긴 하지만 사례가 한두 주 밀리거나 상여가 나오지 않은 때도 한두 번 있었다. 사역조건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전임 이후에도 사택은 물론 차량지원도 없었다. 마지막 이삼년만 약간의 교통비가 추가되었을 정도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은 각각 상대적일 수 있기에 내게만 특별한 문제는 아닐 수 있고 남들이 보기에는 내 노력과 수고는 그리 열악하거나 특히 심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역자 중에는 파트 때도 인턴기간이란 이름하에 절반만 지급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회가 특별히 건강하지 않거나 문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교와 구제에 헌금을 적잖이 썼었고 담임목회자라고 해서 많은 사례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헌신이라는 이름하에 교회가 부교역자의 수고와 어려움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면이 있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균형성을 잃은 것일 게다.
그렇긴 했지만 내 자신 ‘강요된 헌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준파트가 되면서 올라가는 사례의 일부를 다른 파트 사역자에게 반영해달라고 건의도 했었다-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그 모든 환경을 교회를 위해 감수했었고 그렇다고 내가 감수한 부분을 후배 사역자는 겪지 않기 위해 건의도 하고 그들의 근무환경을 바꾸려고 나름 노력도 했었다.
헌신은 환경이나 기존관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헌신하는 것과 저 사람은 당연히 목회자니까 힘들더라도 견뎌야 한다고 당회나 공동체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교회의 40대의 어떤 장로님은 후배 사역자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예전엔 아무리 먼길도 사역자는 새벽부터 교회에 나와 헌신하고 쓰러질 정도로 사역했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강요된 청빈’(정재영, 이레서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굳이 책을 내어 놓아야 알 수 있는 주제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출간된 지 몇 달 후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두 달 후에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 책은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뻔한 내용을 실제적 수치와 현실적 이야기로 제대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예컨대 아프리카에 기아 문제가 극심하다는 것을 막연히 아는 것과 실제적 통계와 예들을 알게 되는 충격강도는 다른 것처럼 목회자의 경제적 문제는 뻔히 알지만 대부분의 교회공동체가 별로 관심 갖지 않거나 말만 하는 경우들이 많다. 같이 사역했던 어느 후배 목회자는 꽤나 개혁적이고 올바른 목회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모 교회로 부교역자로 갔었는데 그 교회도 사역자의 기본적인 근무조건을 제대로-예컨대 사대보험–행하지 않았었다. 주장과 현실은 꽤나 큰 간극이 있곤 함을 그 교회를 통해서도 느꼈었다.
이 책은 목회자의 현실, 특히 부교역자와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부교역자의 문제는 교회와 담임목사와 당회가 풀어야 할 문제일 수 있지만-일부 모범적인 목회를 하는 교회들이 외부구제는 하면서도 정작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부교역자는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곤 한다-미자립교회, 개척교회의 목회자의 경제적 상황은 쉽지 않다. 저자가 언급하듯 공교회 개념이 우리나라 교회현실에서는 많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교회에 있던 사역자마저도 사임하고 나가면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건 경조사가 발생하건 무신경한 경우가 태반인 상황에서 다른 교회에 눈돌리길 기대하는 것은 이미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 자신 이전 사역하는 교회에서 나온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났고 일종의 뚜벅이 목회를 하면 좀 특별한 사역을 행하면 수지 안맞는 사역(?)을 하느라 시간을 쏟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 남의 교회 성도들을 상담해서 본 교회에 잘 적응하도록 돌려보내기도 여럿하고 상담이나 심방은 하지만 성도 늘리는 일에는 힘을 쏟지 않는 마이너스 목회를 의도치 않게 해왔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쉽지 않은 몇 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넘치진 않지만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셔서 살아왔다. ‘강요된 청빈’도 ‘즐기는 청빈’도 아니지만 자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날 이렇게 이끄셨지만 다른 이가 이렇게 사역하겠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경우이지 일반화 할 수도 없고 또 어떤 면에서는 내 사역에 문제점도 많을뿐더러 경제적인 어려움도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만나와 메추라기 때문이었고 그것도 인간적으로는 많이 모자란 부분도 있었기에 모든 이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경제 현실과 어려움을 알리며 그에 대응하는 목회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예컨대 또 다른 직업을 갖는 경우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목회에 들어서기 전 거의 십년 가까이 직장을 다녔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도 개인양육과 리더들을 가르치는 일들과 제자훈련을 이끌기를 계속해왔었다. 직장을 다니며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자료와 교재를 만들고 어떤 때는 좋은 성경공부 교재 원서를 구해서 번역하기도 했었다. 당시는 목회에는 뜻은 없었지만 평신도 전임사역자로 내심 자신을 생각했기에 직장에 충실하면서도 교회와 양육하는 데에 내 최선을 다했다. 그때도 잘 것 제대로 못자고 책구입 및 사람 만나는 데에 내 돈을 드리기를 상당히 했다. 그 일은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쉽지 않았기에 목회와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게다가 작년 몇 개월을 의도치 않게 다른 외부일을 도와주다가 전임처럼 일하게 되어 경제적으로는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사역하는 데는 시간이 나뉘어 어려움을 겪는 경험을 내 자신도 오래간만에 다시 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잡(Job)을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이것을 얼마나 잘 병행하고 유지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종종 바울을 자비량 선교, 텐트메이커라고 하면서 그것이 차세대 목회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작 바울의 그런 기간은 일부 기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모델은 될지언정 일반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바울이 지역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교회를 돌아보고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협력목회를 했었고 같은 공동체는 아니어도 다른 지역의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돌아본 성경의 모습들이 오히려 우리의 솔루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도 교단 차원의 이런 지원 시스템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이 책에서 제시한다. 쉽지 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분명 생각해보아야할 내용이다. 저자는 더불어 지나친 목회자 후보생의 배출을 지적하며 목회자의 공급과 수요를 맞추어 나가야 할 것임을 지적한다.
동의한다. 이 책은 뻔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것을 피상적인 이해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해로 이끌고 그 해결책도 제시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우리가 곰씹고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또 고민해볼 것은 목회자의 소명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자면 수많은 목회자가 나오긴 하지만 그분들 모두가 하나님의 분명한 소명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혼자 나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며 몇 천 명, 몇 만 명 모여야 하나님이 부르신 목회자라는 것도 아니다. 한두 명을 놓고 목회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끄신 목회이고 소명일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자기점검과 돌아봄에 대한 분명한 과정을 개인뿐만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행해져야 공급과 수요의 문제는 조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건강한 교회와 목회자를 선별해 지원받고 또 그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의 단계로 가면 그들이 다시 다른 교회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종의 펀드나 투자회사 같은 공익법인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단체를 통해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멘토나 고문 역할도 해서 그 교회를 돌보고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자금이 없으니 아직은 꿈도 못 꾸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이야기하듯 공교회라는 개념을 가질 때 ‘강요된 청빈’을 해결할 수 있는 모멘텀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몇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의식과 돌봄으로 때에 맞춰 지원해준 분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