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토론을 위한 요한복음 강해 :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10-24).

강도헌 | 2018.01.16 09:58

요한복음7:10-24, 공의롭게 판단하라.

 

예수님은 형제들을 먼저 보내신 후 몰래 예루살렘에 혼자 올라가셨다. 11절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찾는 이들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부류는 예수께서 초막절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의 갱신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하며 찾는 자들과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었다.

 

성전에서 가르치심

14절에서 예수님은 명절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초막절에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쳤던 에스라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구약에서는 총 10회에 걸쳐서 초막절에 말씀을 낭독하고 언약이 갱신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러한 초막절의 이미지를 예수님께 대입하면서 새로운 언약의 갱신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유대인들은 놀랐다고 요한은 보고한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차이점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고 요한은 밝히고 있다. 즉,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 아버지의 교훈이라는 것과 당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의 교훈은 자신들의 교훈이라는 점을 대조시키면서 당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갈등과 분쟁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를 대변하고 있다.

 

1-2세기 당시는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수많은 도전과 박해를 맞고 있었고, 그 중에서 유대교의 공격과 비방으로서 구약의 정통성과 그리스도의 새로은 가르침 사이에서 이중적 어려움이 그리스도교 안에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요한복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변증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유대교의 가르침은 자기들(인간중심)의 가르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고 예수님은 언급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교훈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참 교훈은 ‘행함’을 통해 증명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철학의 플라톤적 이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대중과 당시 로마 당국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그리스적(플라톤, 신플라톤, 스토아) 사고와 설명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이원론적 방식으로 계속 대조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의 교훈은 자신들의 교훈이고, 그리스도의 교훈이 하늘로부터 온 신적 교훈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과의 대조를 통해 그 교훈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자신이 욕망과 목적을 추구하는 우상종교(유대교를 포함한)와 구별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목적의 교훈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23절의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함임”을 나중에 밝힌다.

 

또한 요한복음은 이 가르침을 유대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구별되고 차별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대교와의 구약적 연속선상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은 텍스트의 차이점이 아니다. 구약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그 적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21-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할례와 안식일 준수’에 관해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할례’와 ‘안식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유하고 있는 구약과 율법의 텍스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해석과 유대교의 해석과 그 적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었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오심은 구약의 성취이면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부정하는 유대교와의 차별을 동시에 증명해 가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플라톤의 이분법적 방식으로 유대교를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교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르침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에서 창조를 ‘빛’과 ‘로고스’로 시작하는 것과 상응되는 대목이다. ‘빛’은 그리스적 의미로서 ‘하늘의 주권과 존재’를 의미하고, ‘로고스’는 히브리적 관점과 그리스의 관점에서 ‘근원, 권위, 능력’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에 대한 해석

19절에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물으신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음을 언급하신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19절에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에 대해 율법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1-2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율법에 위반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해석의 전쟁이 있었음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1-4세기까지 그리스도교 문헌들을 통해 수없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구약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 대한 논쟁들이다. 구약의 텍스트에 관하여서 유대인들은 당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히브리어 경전인 ‘타낙’과 ‘미쉬나’, ‘미드라쉬’, ‘학가다’ 등과 같은 본문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제자들과 속사도 교부들과 그 이후의 교부들은 구약의 히브리어 타낙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는 유대교가 발전시키지 못한 ‘알레고리’와 ‘역사’적 해석법들이 다양하게 나타났고 또한 핍박받는 종교로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교리적 체계를 잡기 위한 노력들로 이로 인해 다양한 이단들의 출현이라는 역효과적인 고통들이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변증적 해석학에 발전의 동력으로 축적되면서 해석학적 발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하지만 2세기 이후 변증적 교부들의 다수가 사도적 계승과 정통성 그리고 교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을 막아버리는 많은 아쉬움을 후대에 남긴다).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7:21-24절은 고대 그리스도교가 모세의 글에 관한 해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먼저 문맥상으론 19절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모세의 글에 대한 해석적 문제에서도 기인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모세의 글 또한 “자기의 영광”(18절)을 구하기 위한 도구였고,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목적은 “외모”(24절)의 모습에만 치중되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보내신 자의 영광”(18절)이 아닌 “자신의 영광”(18절)을 구하는 율법적 행함은 안식일(모세의 가르침)에 할례(조상의 가르침)를 행하지만(22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23절)한 예수님의 행위는 “귀신이 들렸고”(20절) “노엽게 하는”(23절) 행위였던 것이다.

 

외모가 아닌 공의로

오늘날도 성경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그 본문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과거 이재철 목사가 어느 설교집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교를 왜곡시키는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완벽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완벽’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정직’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자연주의적 관점, 역사성의 관점, 존재론적 관점, 실존적 관점, 현상학적 관점 등에서 ‘죄의 근원’과 ‘죄책감의 근원’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이견(異見)적인 설명이 되어지고 있지만, 이들 모두가 함께 인정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자아’의 ‘한계성’과 ‘불완전성’은 ‘죄의 근원’이 우리 인간 안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모습의 이중성이라는 몸과 영혼의 이중성이 항상 쉬지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교란시키고 있기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24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외적으로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를 드리며, 종교적 규범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대인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임을 요한복음은 경고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이 외치고 있는 ‘공의’는 바로 나 자신의 행위 이전의 상태인 나의 행위들에 대한 근본적 본심에 대해 ‘공의롭게’ 살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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