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토론을 위한 요한복음 강해 : 소유할 수 없는 그리스도(요7:25-36)

강도헌 | 2018.01.23 16:32

소유할 수 없는 그리스도 (요 7:25-36)

 

유대인들(대제사장들과 유대의 당국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25절은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라고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미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의 뒷받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을 수도 죽일 권한이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26절은 지금 말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의문케 합니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말도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그 무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있는 자들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두 부류로 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는 ‘성전안의 레위인들’이고 두 번째로는 ‘성전의 경비대’입니다. 즉, 유대인(산헤드린 공의회)들의 하수인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당국자들(산헤드린 공의회)의 대변자들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26절의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는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일반 유대인들에 대해 반문을 하면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요한복음 5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는 자들과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누구인가?

당국자들의 하수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27절에서 노골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먼저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말이며, 히브리어로 ‘메시아’ 또한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말로서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는 말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온 자임을 암시하면서 당시 유대의 메시아에 관한 전승에 따르면 메시아는 신비적 인물로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상에 기초하여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제 4복음서에 해당하는 요한복음이 기록될 1-2세기 당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예수’에 관한 치열한 논쟁과 공방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장함으로 서로 간에 이견과 충돌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그리스도교의 존폐를 가름하는 심각한 문제였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아에 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유대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태동 사이의 메시아 사상이 과거 다니엘에 근거한 ‘인자-예수 그리스도’의 도식에 문제점들이 발견되었고 서동수의 “유대교의 두 메시아 사상과 신약성서”(신약논단, 2012)에 따르면 복음서와 바울서신, 히브리서 등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은 각각 매우 다양한 통합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마태-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바울, 히브리서 기자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연속성에서 메시아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과정과 강조점의 차이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지금은 요한복음의 본문을 살피고 있기에 요한복음의 메시아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적 관점으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당국자들의 하수인들이 나사렛에서 온 예수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실(36절, 원래 계셨던 곳) 예수님의 참 정체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무지한 안목을 역설적으로 조롱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 and 성동격서(城東格西)

성전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도전에 대한 답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나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8,29절) 아마도 이 본문을 읽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폭소를 터뜨리거나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두 부류가 있었을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은 그 질문(“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즉 ‘너는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가 너의 출신지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느냐, 네가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아라’ 라는 비꼬는 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고, 목수 요셉의 아들이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라고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예수님의 메시아에 대한 자의식’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당시 예수님에게 도전하고 공격하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예수님을 보내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을 보낼 만한 아버지 요셉은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기에,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을 보낸자는 자연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 유추되지만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부정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못 알아 들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말을 알아 차리더라도 매우 혼란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 사상에서 메시아는 엘리야, 에녹 등과 같이 불사(不死)의 능력을 가진 초인(超人)으로서 신비로운 인물이거나 다윗 계열의 혈통적 통치자, 혹은 아론, 사독, 아비밀렉의 계열 중에 속한 제사장적 메시아 등의 복잡한 메시아 대망 사상 등이 혼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복음서들과 바울, 히브리서와 같은 신약의 텍스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각각의 관점에서 통합하고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요한복음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혈통적 계열을 초월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주(主 = 왕, 제사장)로서 메시아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고 도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말을 인정(갈릴리 나사렛 요셉의 아들)함과 동시에 메시아의 정체성은 유대의 유전과 혈통을 초월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엘리야 혹은 에녹(육신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과 같은 초월적 메시아임을 밝히면서 구약과의 연속성과 유대교와의 불연속성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율법과 유전의 전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고스, 말씀)를 보내신 아버지가 참되다고 말씀 하십니다(“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28절).

 

잡을 수 없는 예수님

이러한 예수님의 자의적이고 자발적인 메시아의 선포는 요한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가르침에 유대 당국자들은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30절)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30절) 라고 언급합니다. 즉,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당국자들은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제사장적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손과 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과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속하였음을 말씀하면서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메시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31절), 그런데 그 무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던 이유에 대해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절) 라고 기록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던 시점이 ‘오병이어’의 사건과 연관이 있으며,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메시아가 바로 자신들의 베고픔을 채워주고 질병을 고쳐주는 메시야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사실 레이몬드 E. 브라운을 비롯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구약적 전통에서 ‘표적(이적)’과 ‘메시아’의 상관관계는 없으며, 마가복음을 필두로 신약시대에 와서 ‘표적’과 ‘메시아’의 상관관계의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수군거림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냅니다(32절).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고 말씀합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 당국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십니다(3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교의 전통으로는 예수님(메시아)을 붙잡을 수도 찾을 수도 없음에 대한 단호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유대인들은 “어디로 가기에”(35절)라는 질문과 함께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5절)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에 요한복음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6절)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아마도 이 마무리는 요한복음이 기록되고 있을 그 당시에 이미 그리스도교는 헬라의 각처에 흩어져 있었고, 요한복음의 독자들 또한 유대지역이 아닌 이방의 지역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였기에 유대 당국자들이 보낸 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들의 질문으로 예수님이 가실 곳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께서 다시 하늘로 승천하실 것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방(헬라)을 향하여 나아갔고,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이방지역의 독자들과 이방인 독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두 번째 사건은 그 당시 성전의 주인이었던 유대인들로부터 도전과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은 유대인들의 성전(혈통과 유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며, 또한 그분은 유대인의 성전을 향하여 가시는 분이 아니라 헬라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와 헬라인들(땅끝, 하늘 보좌)을 향하여 나아가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초막절 두 번째 사건의 이야기는 미완의 마무리처럼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6절)로 마무리 됩니다. 이것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6)는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과 경고가 떠오르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언1:28-30)는 지혜(생명)의 영으로서의 메시아의 임마누엘을 거절한 유대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믿지만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찾고 구하지 않는, 즉 그리스도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고 소유하고, 혹은 소유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붙잡거나 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하고 찾아야 하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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