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두 번째 아버지

이성호 | 2018.03.20 17:57

두 번째 아버지

 

1.

저분이 우리 아버지였으면그렇게 생각하던 분이 있었습니다내 이름을 부르시던 나직한 목소리와 진중한 표정, 중절모를 쓴 모습과 잘 어울리는 위엄 있는 걸음으로 오실 때면, 마음까지 설레던 분. 그 시선이 내게 모아지는 것이 좋아서 과도하게 떠들던 소년시절부터, 돈암동을 떠나오던 스물일곱의 청년기까지 내 마음엔 이미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이제야 실토하는 그 분은 돈암동 광성교회 원로목사셨던 고 홍창우 목사님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 무렵, 새벽마다 목사님과 북악스카이웨이를 산책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또래는 물론 선배들에게까지 질투에 대상으로 등극했을 정도입니다.

 

목사님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아내와 아들을 두고 잠시 몸을 피한 것이 휴전이 되어, 홀로 되신 목사님은 차라리 전설이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나를 지목하셨다니, 기절할 노릇입니다.

 

새벽기도를 마치는 5시경, 목사님은 우리 집 창문을 두어 번 두드리십니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저를 깨웁니다. 워낙 기대를 한 효과인지, 한번만 흔들어도 바로 일어나 뛰쳐나가는 저를 보는 어머님도 흐뭇해 하셨습니다.

 

한참동안 말 한마디 없이 산을 달립니다. 적당한 거리를, 적당한 속도로.

약수터에 도착하면, 저에 활약상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빠르게 앞서 나가 약수 물을 담아 드리는 걸로 임무를 완수합니다. 그때부터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올 때와는 달리 목사님과 나란히 걷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찬양을 따라 부르기고 하고, 간혹 건네시는 물음에 얼마나 떨렸는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이른 새벽이라 녀석들이 따라 올 수도 없어 그야말로 꿈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호는 신학대학 갔으면 좋겠다.” 당시만 해도 나의 희망은, 작가였고 국어교사였습니다. 간간이 써 두었던 시를 모아 자필 시집을 만들 즈음의 일입니다. 그래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나중에 사회경험도 하고, 나이 들어서 하는 것도 괜찮지... ”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는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후가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 입학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당신의 책과 글, 과거 사진들까지 우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2.

지난해 어느 늦은 가을, 목사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광성교회 OB카톡방이 뜨거워졌습니다. “성호는 꼭 올라와야 할 텐데, 수요일이라 장지까지는 갈 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마지막까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눈물보다 앞섰습니다. 고려대학병원 장례식장. 건너편으로 그분과 걷던 그 길과 언덕들이 보입니다. 이제는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진 교회. 여전히 변함없는 선후배들이 반갑습니다. 영정으로 남은 목사님과 마주했습니다. 처음으로 불러보았습니다. 아버지.

 

밤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스스로 물어봅니다. 돈암동을 떠나올 때 다짐했던 굳은 맹세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새살이 돋듯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포항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 그 교우들 한분, 한분을 떠올려 봅니다

나는 그분과 같은 목회자로 끝까지 살 수 있을까,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달만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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