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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추천도서
주여, 제 신뢰 없음을 도우소서!
신뢰/브레넌 매닝/복있는사람/조영민
나는 브레넌 매닝의 글을 좋아한다. 한권씩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그의 책에서 이 시대에 듣기 힘든 사랑의 메시지를 들었다.
존재보다 행동이나 성취에 대해 말하는 이 세대를 향해 저자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글 속에서 많이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안에 어느새 들어와 있던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들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었다. 저자의 다른 책 ‘아바의 자녀’를 읽으며 내 안에 참 자아와 거짓 자아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기도 했었고, ‘사자와 어린양’에서 사자처럼 강하고 양처럼 온유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 받아 울면서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기도 했었다. 이 책은 그의 이전 책들의 연장선상에서 참 자아로 만난 ‘아바’앞에서 내가 보여야할 유일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었다. 사자처럼, 양처럼, 그리고 아바로서 내 전존재를 사랑하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태도에 대해 말이다. 저자는 그 유일한 태도가 ‘거침없는 신뢰’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책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저자는 12개의 장으로 그가 말하는 유일한 태도인 ‘거침없는 신뢰’의 주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신뢰라는 것 감사라는 것이 무언가에서 시작해서,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와 그 영광 속에서 논리와 합리가 아닌 신비로서 이 땅을 살아간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길에 대해(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너무나도 흡사한 길이었고, 그분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이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각들을 한 장의 그림 위에 올려놓음으로 ‘거침없는 신뢰’라는 그림을 맞춰나가게 된다.
각 장의 이야기들도 각 장의 소주제의 의미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완성된 글이었다. 완벽한 논리가 있었고 적절한 예화와 설명들로 각 주제에 대해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다. 열두 번으로 나눠서 한 장씩 묵상했었지만 책의 각 장의 의미를 그 장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감동으로 각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은 그 각각의 의미상 독립적으로 보였던 글들이 결국의 치밀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보게 되고,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던 그 곳,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유일한 태도, ‘가차없는 신뢰’ 아래서 하나씩 자리 매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한순간에 울려 퍼지듯 마지막 12장 ‘가차없는 신뢰’에서 이 모든 장들은 하나의 글이 되어 강력한 설득력으로 ‘그분을 향해 나의 신뢰 밖에 드릴게 없음’을 역설한다. 흩어진 조각들이 어느새 그림이 되어있는 것처럼 어느 사이 그 각장의 내용들이 이 ‘가차없는 신뢰’를 가르키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저의 신뢰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는 저자와 함께 나 역시 그 고백으로 아바를 향해 부르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또 하나 저자의 글의 전체적 특징-문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을 몇 가지 나누고 싶다. 그것은 기독교 저술가로서의 지적인 치밀함과 목회자적인 따스함, 그리고 삶 속에서 나온 공감의 나눔이다.
먼저 저자의 글에서는 기독교 전문 저자로서의 지적인 치밀함이 느껴진다. 각 장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인용하는 수많은 경건한 신앙의 스승들의 인용구와 현대 신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인용, 그리고 그것들을 세세하게 주로 표기함으로서 자신의 독창적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많은 세대의 지혜였음으로 밝히는 저자의 모습에서 기독교 서적의 저술인으로서 정직하고 참신한 저술의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결코 쉽게 쓰여진 글들이 아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런 전문 저술가에서 잘 찾을 수 없는 목회자적 따스함이 그의 글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목회자의 따스함이 있다. 그는 던져진 대상, 불특정 대상을 향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목회자로서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따스함과 개인적 관심들이 그의 글에 베여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의 신뢰에 전혀 미치지 못한 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라면 그것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지만 저자는 목회적 자상함으로 그 상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공감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다독거려준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정직한 기독교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그의 독자를 사랑하고 사실로 인해 아파할 사람들의 아파하는 모습을 모른채 할 수 없는 ‘목회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한없이 따뜻하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이 책의 특징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지만 철저히 자신의 심장을 거쳐서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안다. 또 이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통과해서 나온 진리인지, 상대방의 머리를 통과해서 나온 사실인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가까운 곳에서 있었던 마음을 통과해 나온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그’가 있다. 역시 동일하게 그의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그 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갇혀진 책이 아니라 열려진 책이다. 그래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춤을 출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 저자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걷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가 처음 하나님께 합당한 인간의 유일한 반응이 ‘가차없는 신뢰’라고 할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수많은 다른 명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믿음도 찬송도 봉사도 다 나름대로의 차이를 갖고 있고 개인적인 경중은 있겠지만 동일한 무게의 명제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편에서의 유일한 대답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분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부재한지를 보게 되었다. 사랑은 중요한 동기지만 그것이 그 언어로 끝났을 때, 무의미했었기 때문이다. 차츰 저자의 명제인 ‘가차없는 신뢰’에 대해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변적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향해 불변의 신뢰를 보여드리며, 그분의 바람대로 사는 것,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하나님께 보내드리며 삶의 모든 것을 경정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보게 되었다.
결국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웃으실만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마치 ‘금간 물동이’처럼 스스로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을 것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그분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그려보게 되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신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신뢰, 겟세마네 고통의 기도의 끝에 맡겨지는 고난의 잔을 마시며 십자가에 달리셔 죽기까지도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바라보던 그리스도의 신뢰, 그 모든 성경의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선- 신뢰를 만났다. 그리고 그 신뢰가 내 안에 없음을 깨달았다.
알량한 성경지식과 약간의 경건의 훈련과 얼마간의 경험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영적인 권위를 세우지만 결국 내 안에 그 신뢰는 없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내 바람과 소원에 대해 어느 정도 응답해 주셔야 하는 분이었다. 다 채워주지는 않으시더라도 꼭 필요한 것은 채워주셔야 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믿지 않겠노라고 사실상 떼쓰는 믿음이 바로 나였다. 그게 얼마나 얄팍한 믿음의 수준이었는지 보게 된 것이었다.
수묵화로 된 책의 표지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절벽에서 한껏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 어디에서 신뢰라는 제목이 나왔을까?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표지 그림 앞에 있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위태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이 책의 표지 그림이 왜 위태한 폭풍속의 나무인지 알듯하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위태한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하늘을 바람을 향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변함없는 신뢰의 몸짓을 보내는 나무의 손짓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삶 역시 이 폭풍속의 나무처럼, 저자처럼, 아니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과 오늘날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든 이들처럼 결코 장밋빛의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많이 울고 많이 힘들어 하며 많이 아파하며 살 것이다. 때로는 정신을 잃을만한 고통도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레 다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반응하고 싶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내 신뢰 없음을 도우소서!”
저자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깊은 신앙이나 헌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어느날 자신이 바라던 성공의 결과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간다.그곳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사제가 되었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 또 다른 삶으로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원을 떠난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브레넌 매닝의 신앙은 구체적인 삶속의 역경을 통해 단련된 신앙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 그가 말하는 믿음, 그가 말하는 헌신은 완전한 틀 속의 개념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고백들이다.현재 그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계를 넘어서서 탁월한 강연과 저술을 통해 북미 및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특별히 개신교의 영성작가들과 지도자들이 그의 삶과 저서들로부터 깊은 영적통찰과 영감을 얻고 있다.
나는 브레넌 매닝의 글을 좋아한다. 한권씩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그의 책에서 이 시대에 듣기 힘든 사랑의 메시지를 들었다.
존재보다 행동이나 성취에 대해 말하는 이 세대를 향해 저자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글 속에서 많이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안에 어느새 들어와 있던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들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었다. 저자의 다른 책 ‘아바의 자녀’를 읽으며 내 안에 참 자아와 거짓 자아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기도 했었고, ‘사자와 어린양’에서 사자처럼 강하고 양처럼 온유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 받아 울면서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기도 했었다. 이 책은 그의 이전 책들의 연장선상에서 참 자아로 만난 ‘아바’앞에서 내가 보여야할 유일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었다. 사자처럼, 양처럼, 그리고 아바로서 내 전존재를 사랑하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태도에 대해 말이다. 저자는 그 유일한 태도가 ‘거침없는 신뢰’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책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저자는 12개의 장으로 그가 말하는 유일한 태도인 ‘거침없는 신뢰’의 주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신뢰라는 것 감사라는 것이 무언가에서 시작해서,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와 그 영광 속에서 논리와 합리가 아닌 신비로서 이 땅을 살아간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길에 대해(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너무나도 흡사한 길이었고, 그분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이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각들을 한 장의 그림 위에 올려놓음으로 ‘거침없는 신뢰’라는 그림을 맞춰나가게 된다.
각 장의 이야기들도 각 장의 소주제의 의미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완성된 글이었다. 완벽한 논리가 있었고 적절한 예화와 설명들로 각 주제에 대해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다. 열두 번으로 나눠서 한 장씩 묵상했었지만 책의 각 장의 의미를 그 장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감동으로 각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은 그 각각의 의미상 독립적으로 보였던 글들이 결국의 치밀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보게 되고,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던 그 곳,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유일한 태도, ‘가차없는 신뢰’ 아래서 하나씩 자리 매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한순간에 울려 퍼지듯 마지막 12장 ‘가차없는 신뢰’에서 이 모든 장들은 하나의 글이 되어 강력한 설득력으로 ‘그분을 향해 나의 신뢰 밖에 드릴게 없음’을 역설한다. 흩어진 조각들이 어느새 그림이 되어있는 것처럼 어느 사이 그 각장의 내용들이 이 ‘가차없는 신뢰’를 가르키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저의 신뢰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는 저자와 함께 나 역시 그 고백으로 아바를 향해 부르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또 하나 저자의 글의 전체적 특징-문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을 몇 가지 나누고 싶다. 그것은 기독교 저술가로서의 지적인 치밀함과 목회자적인 따스함, 그리고 삶 속에서 나온 공감의 나눔이다.
먼저 저자의 글에서는 기독교 전문 저자로서의 지적인 치밀함이 느껴진다. 각 장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인용하는 수많은 경건한 신앙의 스승들의 인용구와 현대 신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인용, 그리고 그것들을 세세하게 주로 표기함으로서 자신의 독창적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많은 세대의 지혜였음으로 밝히는 저자의 모습에서 기독교 서적의 저술인으로서 정직하고 참신한 저술의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결코 쉽게 쓰여진 글들이 아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런 전문 저술가에서 잘 찾을 수 없는 목회자적 따스함이 그의 글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목회자의 따스함이 있다. 그는 던져진 대상, 불특정 대상을 향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목회자로서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따스함과 개인적 관심들이 그의 글에 베여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의 신뢰에 전혀 미치지 못한 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라면 그것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지만 저자는 목회적 자상함으로 그 상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공감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다독거려준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정직한 기독교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그의 독자를 사랑하고 사실로 인해 아파할 사람들의 아파하는 모습을 모른채 할 수 없는 ‘목회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한없이 따뜻하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이 책의 특징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지만 철저히 자신의 심장을 거쳐서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안다. 또 이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통과해서 나온 진리인지, 상대방의 머리를 통과해서 나온 사실인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가까운 곳에서 있었던 마음을 통과해 나온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그’가 있다. 역시 동일하게 그의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그 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갇혀진 책이 아니라 열려진 책이다. 그래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춤을 출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 저자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걷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가 처음 하나님께 합당한 인간의 유일한 반응이 ‘가차없는 신뢰’라고 할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수많은 다른 명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믿음도 찬송도 봉사도 다 나름대로의 차이를 갖고 있고 개인적인 경중은 있겠지만 동일한 무게의 명제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편에서의 유일한 대답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분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부재한지를 보게 되었다. 사랑은 중요한 동기지만 그것이 그 언어로 끝났을 때, 무의미했었기 때문이다. 차츰 저자의 명제인 ‘가차없는 신뢰’에 대해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변적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향해 불변의 신뢰를 보여드리며, 그분의 바람대로 사는 것,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하나님께 보내드리며 삶의 모든 것을 경정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보게 되었다.
결국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웃으실만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마치 ‘금간 물동이’처럼 스스로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을 것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그분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그려보게 되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신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신뢰, 겟세마네 고통의 기도의 끝에 맡겨지는 고난의 잔을 마시며 십자가에 달리셔 죽기까지도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바라보던 그리스도의 신뢰, 그 모든 성경의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선- 신뢰를 만났다. 그리고 그 신뢰가 내 안에 없음을 깨달았다.
알량한 성경지식과 약간의 경건의 훈련과 얼마간의 경험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영적인 권위를 세우지만 결국 내 안에 그 신뢰는 없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내 바람과 소원에 대해 어느 정도 응답해 주셔야 하는 분이었다. 다 채워주지는 않으시더라도 꼭 필요한 것은 채워주셔야 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믿지 않겠노라고 사실상 떼쓰는 믿음이 바로 나였다. 그게 얼마나 얄팍한 믿음의 수준이었는지 보게 된 것이었다.
수묵화로 된 책의 표지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절벽에서 한껏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 어디에서 신뢰라는 제목이 나왔을까?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표지 그림 앞에 있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위태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이 책의 표지 그림이 왜 위태한 폭풍속의 나무인지 알듯하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위태한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하늘을 바람을 향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변함없는 신뢰의 몸짓을 보내는 나무의 손짓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삶 역시 이 폭풍속의 나무처럼, 저자처럼, 아니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과 오늘날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든 이들처럼 결코 장밋빛의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많이 울고 많이 힘들어 하며 많이 아파하며 살 것이다. 때로는 정신을 잃을만한 고통도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레 다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반응하고 싶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내 신뢰 없음을 도우소서!”
저자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깊은 신앙이나 헌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어느날 자신이 바라던 성공의 결과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간다.그곳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사제가 되었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 또 다른 삶으로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원을 떠난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브레넌 매닝의 신앙은 구체적인 삶속의 역경을 통해 단련된 신앙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 그가 말하는 믿음, 그가 말하는 헌신은 완전한 틀 속의 개념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고백들이다.현재 그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계를 넘어서서 탁월한 강연과 저술을 통해 북미 및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특별히 개신교의 영성작가들과 지도자들이 그의 삶과 저서들로부터 깊은 영적통찰과 영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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