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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참된 자유의 길

크리스찬북뉴스 | 2017.11.17 09:16
참된 자유의 길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티모시 켈러/복있는사람/송광택 편집위원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롭게 된 마음의 표지는 무엇일까?”라고 묻고 답한다.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숭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두려움이나 자존심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 권력을 향한 욕구에 사로잡힐 때 역시 온갖 종류의 고상하고 도덕 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살펴보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롭게 된 마음에 대해서다. 이 문제를 탐구하기 의해 저자는 고린도전서 3:21-4:7을 다룬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낼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파당이 생겨났고 의견의 차이로 교회가 갈기갈기 찢길 위험에 처했다.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마다 탁월한 선생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들먹이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당을 짓고 서로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마음의 교만과 자랑에서 찾았다. 교만과 자랑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함께할 수 없다. 세상에 화평이 없고 서로 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자존감(self-esteem)이라고 하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자만심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문화에는 그런 믿음이 있다).

 

세상에 범죄와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사람에게 있는 오만함(hubris)을 그 대답으로 꼽는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교만 혹은 자만심을 뜻한다. 자고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해 현대 서구문화는 이와 정반대로 대답한다. 현대 교육의 원리, 죄수들을 대하는 방식, 대부분 입법의 토대와 현대 상담의 출발점은 위와 같은 전동적인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믿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일을 이런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존감이 사회 문제의 중대한 원인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보다 주변에 더 큰 위협이 된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많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가 처한 상태는 공허함이다. 이 이미지는 인간 자아의 중심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마음의 상태라고 말한다. 이것이 영적 교만이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 낼 수 있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삼을 만큼 중요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삶의 토대를 삼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한니다.

 

또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 자아는 늘 분주하다. 텅 빈 자아를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로 여념이 없다. 특별히 비교하고 자랑하는 일로 분주하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교만은 본질상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교만의 중심에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

 

바울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좀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내놓는 처방은 단 하나뿐이다.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놀라운 사람인지를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들을 이루어 왔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접근법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나 세상 법정의 판단에 연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울은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C. S. 루이스가 잘 지적했듯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말한다, 복음을 통해 진정으로 겸손해진 사람은 바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충일하다. 복음적 겸손의 핵심은 자신을 더 생각하거나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생각자체를 덜 한다는 데 있다.

 

복음적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물을 자신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이 좋게 보일까? 지금 내가 여기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복음적 겸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경험과 대화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 짓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친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누리는 복된 평안이 있다.

 

참된 복음적 겸손은 부풀려지지 않았지만 가득 채워진 자아를 말한다 이런 자아와 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은 애초에 자존감을 둘러싼 온갖 말의 유희에 빠져들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제게는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겸손의 비밀이다.

 

참으로 복음적 겸손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복음을 통해 겸손해진 사람이다. 복음으로 겸손해진 사람의 자아는 그냥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는. 우리가 걸을 때 발가락이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의 자아도 그렇다. 날 좀 알아달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대견해 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비판을 들어도 아연실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이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무신론자들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자아상의 목적으로 삼는다. 실제로 이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평결을 얻기를 바란다. 행위가 평결로 이어진다. 불교도들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교도들 역시 행위를 통해 판결을 받는다.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법정 앞에 서는 날이요 재판을 받는 날이다. 이것이 문제다. 하지만 로마서 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한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가 직접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신다고 말한다.

 

평결은 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평결에 따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으셨기 때문에 나만의 이력을 쌓기 위한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 게 좋은 평결을 받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순전히 즐거움 때문에 일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돕도록 협력할 수 있다.

 

이제는 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지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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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중한 일상 우리의 소중한 일상
오늘을 그날처럼
이철규/새물결플러스/방영민 편집위원


 우리의 소중한 일상보혈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일상에 강같이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주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에 대한 설교도 아닌데 십자가의 의미가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지고 부활과 승천에 대한 설교도 아닌데 소망과 확신에 찬 믿음이 생긴다. 중생의 경험을 하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데 중생에 대한 메시지도 아닌데 만물과 사람과 세계가 새롭게 보이게 한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간증과 신앙으로 풀어낸 글은 거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보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되었다. ...
희망의 두 지평에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으로 희망의 두 지평에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으로
희망의 두 지평
이종인/박영사/정현욱 편집위원


제목이 참 좋다. 철학에 낯선 독자라도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을 안다면 상당히 호감을 가질 것이다. 두 사람은 2차 자료에 의거해 희미하게 더듬는 필자와 같은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몰트만의 경우는 몇 권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만, 에른스트 블로흐의 경우는 굉장히 낯선 존재다. 수년 전에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을 읽다가 중간쯤에 포기하고 말았다. 굳이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데다 익숙하지 않은 블로흐를 따라...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개인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개인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교회, 자본주의와 씨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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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교회 또는 책에서 두 주제를 같이 다루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적이 누군지조차 몰라 엉뚱한 것과 싸우고 있는 교회의 실상 앞에 저자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를 향한 싸움을 외치고 있습니다. 죄악이 넘치는 이 시대에 왠 자본주의를 운운하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저자가 왜 이 주제를 꺼내드는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정의를 들어보겠습니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돈이 주도하는 사회, 자본주의적인 것은 어느 영역에서든 돈이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는 가정을 회복하고, 가정은 사회와 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가정을 회복하고, 가정은 사회와 교회를 세운다
교회를 세우는 가정예배
장대선/고백과 문답/고경태 편집위원


교회는 가정을 회복하고, 가정은 사회와 교회를 세운다 “가정예배모범”(1647년)은 스코틀랜드 교회 에든버러 총회(10회)에서 결정했다(15쪽). 우리는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장대선 목사의 <교회를 세우는 가정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인 가정 예배의 근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이전에 가정예배가 있었을까? 1세기 베뢰아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로마교회는 ‘복음선포(확실한 신앙)’가 아닌 ‘미사(맹목적 신앙)’로 종교 생활을 구성시켰다. 루터와 칼빈...
영적 전투가 열어내는 현실 너머의 현실 영적 전투가 열어내는 현실 너머의 현실
악마 다시 살려내기
리차드 벡/Fortress Press/김상일 편집위원


악마 다시 살려내기–영적 전투가 열어내는 현실 너머의 현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저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신비한 경험들을 몇 번 했습니다. 예언을 받아 본 적도 있었고, 신학교 졸업식 때 하나님께서 나를 콕 집어서 상을 주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얘기들을 자세하게 할 필요도 없이, 저는 소위 탈주술화(disenchanted)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저는 복음주의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제까지 쭈욱 그 신앙 속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복음주의 신앙은 탈주술화된 신앙이 아니기 ...
루터에 대한 변증 루터에 대한 변증
루터와 정치
우베 시몬-네도/조미화/CLC/강도헌 편집위원


루터에 대한 변증  고등학교를 다닐 즈음에 한국개신교회는 개인성경공부와 소그룹 성경공부 유행이 일어났었다. 수많은 성경공부 교재들이 쏟아져 나왔고, 당시 한국교회는 막 일어나기 시작한 지적인 호기심에 맞추어 다양한 경건서적들도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당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매진하였다(한국보수개신교회의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대해서는 차후에 평가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또한 창조과학과 같은 성경과 기독교에 ...
1999년 4월 20일, 미국 고등학교 무차별 총기난사사건 그 이후 1999년 4월 20일, 미국 고등학교 무차별 총기난사사건 그 이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홍한별/반비/옥은숙


1999년 4월 20일, 미국 고등학교 무차별 총기난사사건 그 이후이 책은 제목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최대한 늦추고 미루어 읽은 책이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도 없고 내용이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다 읽고 났을 땐 이 책을 추천해준 동료가 고맙게 느껴졌다. 편한 책읽기보다 불편한 책읽기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영어 부제는 A mother’s reckoning, living in the aftermath of tragedy이다. 비극의 여파와 후유증을 살아내야 하는 한 가해자...
구약의 여호와, 고대 근동의 신들과 논쟁하다 구약의 여호와, 고대 근동의 신들과 논쟁하다
고대 근동 신들과의 논쟁
존 D. 커리드 /이옥용/새물결플러스/정현욱 편집위원


제목을 오독(誤讀)했다. ‘고대 근동 신들과의 논쟁’에서 ‘논쟁’을 ‘전쟁’으로 읽었다. 필자의 뇌리 속에 남은 신화의 세계는 ‘논쟁’이 아닌 ‘전쟁’이기 때문이다. 표지 가장 윗부분에 적힌 ‘Against the Gods’도 논쟁보다는 ‘전쟁’의 의미가 강하게 읽힌다. 고대 전쟁은 나라와 민족들 간의 전쟁이 아니라 신들과의 전쟁이기 때문에다. 2011년 알렙에서 출간된 김원익의 <신들의 전쟁>을 보더라도, 고대 신화는 대부분 전쟁이야기들이 아니던가. 수년 전에 화제가 된 <신들의 전쟁>이나 <타이탄>...
로이드존스처럼 성경을 설교하자 로이드존스처럼 성경을 설교하자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만나다
스티븐 로슨/황을호/생명의말씀사/정현욱 편집위원


로이드 존스, 그 이름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아닐까? 아마도 청교도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로이드 존스의 이름은 이미 전설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로이드존스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로이드존스는 특이하면서도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설교자다. 이미 1981년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설교는 여전히 살아 있고, 생동감이 있다. 로이드존스를 추종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었을까? Eric. J. Alexander는 로이드 존스를 살아생전에 이미 ‘기독교 세계 최고의 설교자’로 불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사랑한다. 이 책...
성경, 비평에서 새롭게 읽기로 전환하기 성경, 비평에서 새롭게 읽기로 전환하기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데이빗 B. 가너/신호섭/세움북스


성경, 비평에서 새롭게 읽기로 전환하기성경 논쟁 시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는 근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이제 사람들은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한 권의 문학 작품으로 대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 관점이 ‘틀렸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한정시키려는 저의(底意)다. 성경 논쟁은 칭만큼 뜨겁고, 교회론 만큼 예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기도 전 성경은 고등 비평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성경의 무오성과 더불어 제기된 성경의 영감론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성의 메스로 성경은 철저하게 해부되었다. 그러...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 읽기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 읽기
믿음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최재호/힐링북스/정현욱 편집위원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 읽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역사는 읽는 것이고, 타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타자의 삶을 공유함은 곧 그 ‘사람의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직접 사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은 타자의 것이기에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근(卑近)한 예로 친구를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친구는 타자입니다. 목소리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삶을 해석하는 것도 다릅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 할지라도 다른 점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물며 낯선 타자의...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
유배된 교회
리 비치/김광남/새물결플러스/정현욱 편집위원


일단 제목부터 강하게 끌린다. 2001년에 마이클 호톤의 <세상에 포로 된 교회>(부흥과개혁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기회가 된다면 호튼의 책과 비치의 책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가나안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라는 표지 문구가 ‘유배된 교회’만큼이나 강열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낯설다. 먼저 저자인 리 비치(Lee Beach)도 낯설고, ‘유배된 교회’라는 의미도 아직 낯설다. 서평을 위해 먼저 저자를 찾아보았다. 한글로 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문으로 검색했다. 책의 원제는...
르네 지라르, 그는 구원자가 될 것인가? 르네 지라르, 그는 구원자가 될 것인가?
예수는 반신화다
정일권/새물결플러스/방영민 편집위원


르네 지라르, 그는 구원자가 될 것인가?  성경에서는 말한다.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 중에 가장 선명한 것은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더 이상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이 땅에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진실된 인격과 풍성한 삶을 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는 흥망성쇠가 있는데 기독교에도 그러한 자연스런 원칙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기독교는 이제 무능한 진리가 되어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가는 것인가? 모든 종교는 자신의 교리와 가르침이 인류 보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정체성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정체성의 자유
팀 켈러의 자기 망각의 자유
팀 켈러/10Publishing/김상일 편집위원


자기 망각의 자유  팀 켈러의 자기 망각의 자유(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는 아주 얇은 책입니다. 고린도전서 3:21-4:7에서 바울이 일갈하는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에 대해서 아주 짧지만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설교 원고를 옮겨놓은 것 같은 책이어서 읽기도 쉽고 짧은데다가, 그 내용은 굉장히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담고 있어서 효율로만 보면 짧은 시간에 최대의 독서 효과를 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
왜 신학이 필요한가? 왜 신학이 필요한가?
신학공부: 하나님과 세계
김진혁/예책/강도헌 편집위원


신학이 왜 필요할까?  가끔 목사님들 중에서도 ‘신학’과 ‘목회’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만나게 된다. 나 또한 과거에 그러한 생각을 잠시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과거에 신학의 불용(不用)을 주장(무용(無用)이 아니다)하던 나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바른’ 목회 보다는 ‘빠른’ 목회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솔직히 나의 부목사 시절은 철저하게 ‘목회성공’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내목회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성공이라는 당위적 믿음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목회에 큰 도움이...
성화를 위한 거룩한 성경 읽기 성화를 위한 거룩한 성경 읽기
말씀 앞에 서는 용기
한주원/이레서원/정현욱 편집위원


성화를 위한 거룩한 성경 읽기 오래전,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이야기입니다. 부산에 주례동의 ㅈ교회 권사님이 운영하시는 하숙집에 이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그 권사님은 언제나 성경을 읽으셨고, 전도에 열심인 분이었습니다. 매주 이틀 정도는 집 주변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하셨습니다. 기존의 전도지 전도가 아닌 방문 전도에 가까웠습니다. 어느 날 권사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정 선생도 같이 안 갈래?’ 호기심에 ‘네 그러죠’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전도지도 챙기고, 몇 가지 물건도 큰 가방에 넣고 출발하셨습니...
종교도 중독될 수 있다 종교도 중독될 수 있다
해로운 신앙: 종교 중독과 영적 학대의 치유
스티븐 아터번, 잭 펠톤/문희경/그리심/강도헌 편집위원


종교도 중독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중독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중독’이라는 의미가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 조차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또한 ‘중독’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독’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편한 단어이기도 하다.   ‘DSM’ 시리즈를 보면, 한국적 상황과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이 어쩌면 ‘중독’이다. 다섯 번의 개정판을 내었지만, 여전히 ‘중...
비평학이 아닌 계시 문서로 성경관을 확립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라 비평학이 아닌 계시 문서로 성경관을 확립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라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데이빗 B. 가너/신호섭/세움북스/고경태 편집위원


비평학이 아닌 계시 문서로 성경관을 확립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라세움북스에서 데이빗 가너가 7명이 발제한 에세이를 편집한 Did God Really Say?(2012년)를 신호섭 교수께서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세움북스는 최근에 설립된 출판사로서 산뜻한 표지 디자인과 접근하기 쉬운 주제 등으로 좋은 반응을 이끌고 있다.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책도 디자인이 산뜻하고, 사이즈도 14×20Cm 규격으로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데 처음...
삶으로 재현하는 하나님의 신비 삶으로 재현하는 하나님의 신비
신비를 엿보다: 다니엘
바바라 륭 라이/송동민/이레서원/정현욱 편집위원


이 책은 탄탄하고 명징하다. 모호한 다니엘서를 백 쪽 남짓의 작은 분량임에도 다니엘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명료하게 풀어낸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부분은 1-6장이며 그 안에는 6개의 "궁정 이야기"(court tale)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 부분은 7-12장까지다. 이곳은 일인칭 환상들로 채워져 있다. 전반부가 개관적 서술이라면 후반부는 다니엘에 체험한 개인적 환상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에 담긴 신비의 요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질문과 씨름하는 데 놓여 있다는 것’(112쪽)이...
결말에 대한 예감 결말에 대한 예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최세희/다산책방/옥은숙


영어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고, 한국어 제목과는 정반대의 뜻이다. ‘끝이나 결말에 대한 예감’이라는 뜻인데, 책 내용상 보면 주인공이 가졌던 예감과 그 종국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 제목에서는 마치 첫 예감이 결과와 다르지 않고 딱 맞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은 이 제목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이고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지, 예감에 딱 들어맞는 결과라? 어떤 이야기일까?’  이 책은 사람 기억의 온전치 않음과 그 왜곡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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