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역에서 무기력을 느낄 때
역시 코맥 매카시다. 이것은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코맥 매카시 특성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연극적 형식을 빌어 자살하려고 열차에 뛰어들었던 백인 교수와 그 백인교수를 살리긴 했지만 과거에 살인을 했던 경험을 가진 흑인 목사와의 대화를 담은 소설이다. 죽으려 했던 교수이기에 그냥 보내면 다시 열차에 뛰어들까봐 그를 설득하려는 슬럼가의 흑인 목사. 더불어 그에게 영혼의 구원을 전하고자 하는 목사.
그에 반해 시니컬하고 회의론적인 교수. 처음엔 나름 흑인 목사의 한발 앞섬을 보여주지만 '로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건 영화로 봤었다)에서 보여주었던 코맥 매카시의 깊은 어둠은 여기서도 작동한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기위해, 소망을 놓치 않기 위해 혹은 생의 한 자락을 잇기 위해 열차를 타지만 교수는 더 이상 소망을 볼 수 없어 그 끈을 놓기 위해 열차를 기다린다. 열차를 기다리지만 서로 목적은 다르다.
내가 접하는 세상은 바로 그런 곳일지 모른다. 내가 매일 만나고 접하는 여러 사람들 중에 그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소망을 잃어버렸지만 그저 뛰어들 용기가 없어서 생을 잇거나 잘못된 소망과 구원의 방법으로 자신이 선로 위에 서 있다는 것조차 꺠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흑인목사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교수를 보내게 되면 다시 열차 앞으로 갈지 모른다는 염려로 그를 나가지 못하게 하고 대화를 이어가지만 결국 교수는 떠나간다. 떠나간 교수를 보며 목사는 기도한다. 변하지 않는 교수를 보며 구원할 수 없는 교수를 왜 아무 쓸모없이 만나게 하게 하셨냐고 하나님께 묻는다. 그저 그거면 되는 거냐고? 그를 구원하지 못해도 노력한 것만으로 되는 거냐고....
종종 목사로서, 상담자로서 그런 절망을 느낄 때가 있다. 열심으로 수고하고 도왔지만 결국 나락의 길로 가는 이들을 보며 잘못된 선택을 바꾸지 않는 이들을 보며 맥이 풀리고 로뎀 나무의 엘리야 마냥 나의 무익함과 쓸모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어떤 땐 믿는 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조차도 예배 후 교수마냥 열차를 기다리는 이들을 보기도 한다.
결국 목회자는 그 흑인 목사 마냥 내 노력만 하면 되냐고 하나님께 반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 같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라면 내려놓아야 한다. 당장 내 앞에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직 끝은 아니니까?
※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서적이 아니어도 기독교를 주제로 한 책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읽고 소화해내는 것도 기독교인에게는 필요하다.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코맥 맥카시나 니코츠 카잔차키스 같은 책도 기독교인으로서 재해석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책보다도 소화력이 문제다.
"분노는 사실 좋은 시절에나 생기는 겁니다. 이제 그런 분노마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사실 내 눈에 보이는 형체들은 서서히 속이 비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거기에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모양만 있는 겁니다. 기차, 벽, 세상, 또는 사람, 사람이란 울부짖는 공허 속에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하나의 물건이지요. 그 생명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에도. 내가 왜 그런 것과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왜?"
- 『선셋 리미티드(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