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내 이름 아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찬양의 한 구절입니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알아주는 것, 참 설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사랑하는 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먼저 그의 또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건 동서고금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하루 종일 그 이름을 되뇌고 써보기도 하며 행복감에 젖었던 일, 아마도 쉽게 떠올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어떨까요? 감격의 정도란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닐 겁니다.
우린 때때로 그분이 너무 위대하셔서 나 같은 사람의 사정일랑 알 턱이 없다고 지레짐작하곤 하지 않던가요? 특히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으면 그분이 나를 용서하실 리 없다고 단정하거나 그 정도가 아니라도 이런 나와는 가까이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마는 게 보통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분이 내 존재 같은 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막막한 상황, 아무도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 같은 고립감 속에서 위 찬양가사가 들려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지난 2005년의 일입니다. 그때 전 직장 내외에서 일과 관계의 문제로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고립감이란! 지금 생각해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이 옥죄어 오는 걸 어떻게 감당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아침 출근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의 심정을 거듭 추측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고통 속에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일에 파묻히기도 하고 부러 일을 만들어 진행하기도 하는 등 일반적인 회피기제를 동원했지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지 않고 말이죠. 그렇다보니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든 결심이라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요일인 그날도 일에 묻히는 게 낫다 싶어 사무실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막 서류를 꺼내놓고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너무도 절박하게 그 생각이 튀어나왔으니 저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습니다. 잠시 망설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 시로 곧 평소 차를 타고 지나가다 봤던 교회를 향해 앞뒤 안가리고 내달렸습니다.
예배 시작 전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기도하고 있는데 절박한 심정과 달리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절박한 심정에 비할 바 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용납받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 치밀어 오르기 십상이거든요. 사단은 참으로 집요하게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든 인생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선 안 됩니다. 필연코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요. 그렇게 혼란한 감정이 오가고 있을 즈음 찬양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얼굴을 타고 쏟아지는 눈물을 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아시는 주님이 생생하게 제 앞에 떠올랐습니다. 주위 어느 누구도 내 고통을 알거나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내 피난처 되신 하나님이 나를 알고 기억하신다는 사실이 주는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란 실로 놀라웠습니다. 제 속에 쌓인 절망적 눌림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깨닫느라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지 몰랐습니다. 그 날 후로 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줄곧 하나님은 저를 하나님의 성품 안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천박하게 알았거나 대충 알았던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 둘씩 깨달아가는 과정은 하나님이 어느 경우든 나를 기억하시고 살피신다는 분명한 사실로 귀결되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모두 장사를 하셨습니다. 보통 12시에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아버지 가게를 들르는 게 제 일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신발가게를 하셨습니다. 신발가게에 딸린 방 두칸이 우리 식구가 사는 거처였습니다. 아버지는 페인트 장사를 하셨는데 거기 들르면 열에 아홉은 아버지가 주전부리 용돈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일에 바쁘셨던 관계로 열이면 아홉은 아버지를 가게에서 보지 못햇습니다. 그러면서 제겐 버릇 하나가 생겻습니다. 기대를 하고 들렀는데 아버지를 보지 못하면 실망감이 컸던 터라 가는 길 내내 아예 아버지가 없을 거라고 믿고 보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설혹 아버지가 없더라도 실망감이 적게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부정적인 습관이 내면화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그런 부정적인 내면화가 하나님을 친밀하게 대하는 것을 막곤 했습니다. 혹시 닥칠 지 모를 거절이나 외면에 대한 회피기제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가림막이 있음을 전 알았습니다. 물론 그 가림막은 제가 세운 것으로 어릴 적 습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배우게 되면서 그것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교묘하게 내 상황을 타고 만들어놓은 허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과정은 그 가림막을 해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마침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찬양 제목과 같은 책의 존재를 언급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책의 저자 토미 워커는 세계적인 예배 인도자이자 찬양 사역자로 〈내 이름 아시죠〉의 원곡 〈He Knows My Name〉을 작사 작곡했습니다. 그는 같은 이름의 책, 〈내 이름 아시죠〉에서 He Knows My Name을 통해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섬세한 인도를 체험한 이들이 전한 글과 편지를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고 이끄시며 얼마나 세밀하게 보듬고 살피시는지 농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체험글이 주는 미덕은 생생한 상황 묘사와 갖가지 상황에 얽힌 감동에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그런 체험글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영적 해석을 시도하는 한편 그 위에 하나님의 성품을 돋을새김하여 지난 세월 독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장은 지극히 부드럽고 다감하지만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영적 깊이가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한편의 찬양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터져오르는 울림을 거듭 선사했다는 건 되돌려 말하면 작사, 작곡가에게 임한 깊이와 깨달음이 가사와 곡의 형태로 가감없이 표현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글은 그 사람의 삶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삶이 바탕이 되지 않는 글이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토미 워커가 만난 하나님이 바로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오늘 그 찬양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고통과 내 울분과 내 절망마저도 외면하지 않고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과 같은 이름의 찬양이 여러분에게 힘과 용기를 주길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강력한 사랑으로 당신이 돌아오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악한 영에게 당신이 내준 몸과 혼을 거둬들여 돌이키는 일은 전적으로 당신 몫입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당신을 도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당신을 돕고 싶어 하시지만 당신이 악한 영에게 내준 틈을 메우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틈을 메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이키기만 하면 됩니다. 돌이킨다는 것 또한 생각하듯 큰 회심이 아닙니다. 나를 도우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저처럼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너무 기뻐 단박에 당신에게 달려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내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내 모든 생각과 고통을 아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