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서평
차라리 울어라
청소년을 위한 삶을 바꾸는 Yes!의 기술/메리 루 카니/황금부엉이/[나상엽]
청소년들은 외롭다.
그들은 외로워하다가 두려워한다. 동시에, 절망과 무기력이 그들을 두텁게 감싸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과다 절망 장애 및 열등감과 무기력 증후군을 두루 보이는 외롬병 환자들이다.
이 외롬병 환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서슴지 않는다. 수업 중 병적이리만치 산만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 있다.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 어떻든 선생님이나 급우들이 한 번은 더 자신을 봐줄 테니까. 무단결석을 하는 녀석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담임교사가 한 번이라도 전화를 하니까, 아이들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래도 한 번은 더 발음되니까. 툭 하면 자살 운운하는 녀석도 있다. 그 부모는 이제 녀석의 자살 협박 공작에 눈도 깜짝 안 하지만, 적어도 학교 선생들은 아직은 호들갑이니. 이런 골수 외롬병 환자들은 수두룩하다.
물론 증세가 약한 또래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혈관에는 동일한 외로움균이 흐르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이 책이 주창하는 내용의 것이라면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기계적인 생각의 훈련을 반복한다면 도리어 이중적인 경향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본래의 자아도 아직 채 발견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실체도 분명치 않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가 필요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기만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일어나는 사실은 무엇일까?
자아가 커가는 만큼 외로움도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부터 외롭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자아가 자라나기 전에는 그만큼 외로움이 적었지만, 자아의 성장에 비례해 외로움도 자라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래,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에덴에 가까운 인간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가 겪었어야 했던 그 외로움과 상실감이란!)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유일한 만족이었던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동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동산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외로워 죽을 것 같으니까,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이 외로움을 적당히 덮어두는 기술들을 터득하기 마련인데,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막연한 자기최면적 믿음도 그중 하나이다. 그러면서 외로움의 감각은 서서히 마비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됨과 동시에 이 외로움을 해결해줄 유일한 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되는 법이다.
현대 심리학과 철학은 이 외로움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진통제를 고안해내느라 법석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완전히 좌절하게 만들던가. 그러나 기만적 존재인 사람은 좌절보다는 마비를 택해왔고, 마비 방법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오면서 끝내는 하나님마저 진통제의 성분으로 이용하는, 이 책이 주창하는바 “적극적인 사고 방식”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니, 이는 에덴 동산을 희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람의 입맛에 맞게 끌어내린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그대 외로운 족속 청소년이여, 이 책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외로움을 직면하라. 외로움은 곧 함께 할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반증이 아니던가? 그 누군가를 정직한 마음으로 추구해보라. 차라리 나는 외롭다고, 외로워 죽겠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보라. 그러면 그 눈물의 뒤안길에서, 그대의 외로움을 이미 외로워하고, 그대의 아픔을 벌써 아파한, 그래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며 그대를 기다려 왔던 한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s)이 오래 전부터 그대 곁에 함께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 메리 루 카니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두달에 한번씩 발간되는 잡지인 '청소년들을 위한 가이드포스트'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외롭다.
그들은 외로워하다가 두려워한다. 동시에, 절망과 무기력이 그들을 두텁게 감싸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과다 절망 장애 및 열등감과 무기력 증후군을 두루 보이는 외롬병 환자들이다.
이 외롬병 환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서슴지 않는다. 수업 중 병적이리만치 산만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 있다.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 어떻든 선생님이나 급우들이 한 번은 더 자신을 봐줄 테니까. 무단결석을 하는 녀석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담임교사가 한 번이라도 전화를 하니까, 아이들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래도 한 번은 더 발음되니까. 툭 하면 자살 운운하는 녀석도 있다. 그 부모는 이제 녀석의 자살 협박 공작에 눈도 깜짝 안 하지만, 적어도 학교 선생들은 아직은 호들갑이니. 이런 골수 외롬병 환자들은 수두룩하다.
물론 증세가 약한 또래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혈관에는 동일한 외로움균이 흐르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이 책이 주창하는 내용의 것이라면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기계적인 생각의 훈련을 반복한다면 도리어 이중적인 경향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본래의 자아도 아직 채 발견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실체도 분명치 않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가 필요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기만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일어나는 사실은 무엇일까?
자아가 커가는 만큼 외로움도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부터 외롭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자아가 자라나기 전에는 그만큼 외로움이 적었지만, 자아의 성장에 비례해 외로움도 자라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래,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에덴에 가까운 인간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가 겪었어야 했던 그 외로움과 상실감이란!)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유일한 만족이었던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동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동산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외로워 죽을 것 같으니까,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이 외로움을 적당히 덮어두는 기술들을 터득하기 마련인데,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막연한 자기최면적 믿음도 그중 하나이다. 그러면서 외로움의 감각은 서서히 마비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됨과 동시에 이 외로움을 해결해줄 유일한 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되는 법이다.
현대 심리학과 철학은 이 외로움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진통제를 고안해내느라 법석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완전히 좌절하게 만들던가. 그러나 기만적 존재인 사람은 좌절보다는 마비를 택해왔고, 마비 방법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오면서 끝내는 하나님마저 진통제의 성분으로 이용하는, 이 책이 주창하는바 “적극적인 사고 방식”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니, 이는 에덴 동산을 희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람의 입맛에 맞게 끌어내린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그대 외로운 족속 청소년이여, 이 책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외로움을 직면하라. 외로움은 곧 함께 할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반증이 아니던가? 그 누군가를 정직한 마음으로 추구해보라. 차라리 나는 외롭다고, 외로워 죽겠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보라. 그러면 그 눈물의 뒤안길에서, 그대의 외로움을 이미 외로워하고, 그대의 아픔을 벌써 아파한, 그래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며 그대를 기다려 왔던 한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s)이 오래 전부터 그대 곁에 함께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 메리 루 카니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두달에 한번씩 발간되는 잡지인 '청소년들을 위한 가이드포스트'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01_artofyes.gif (0B) (0)
2,664개(98/13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