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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경계선상에 서있는 '믿음의 역동성'
믿음의 역동성/폴 틸리히/최규택/그루터기/[이종수]
폴 틸리히를 가리켜 ‘경계선상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틸리히는 자신을 가리켜 철학과 신학 사이, 인간적 문화와 종교 사이,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사상적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느낌이 든다. 틸리히는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경계선상에 서서, 문화적 격변기에 처한 자기 시대 사람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허무주의에 의해 지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가능한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려고 했으며, 또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살아있는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 교리와 표현 형태의 재해석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것들이 본래 가진 능력을 더욱 새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때로 ‘지성인의 사도’로 불리기도 한다. 급속한 세속화로 인해 영적 공허감 속에 빠져 있던 당시 지성들을 위해 기독교라는 종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주고자 했다. 그는 교리들, 신조들, 그리고 종교적 교조들과 같은 ‘오랜 상징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문자적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별히 이 책 ‘믿음의 역동성’은 현대인들에게 폴 틸리히의 사상을 소개하는데 꽤 유용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말해준다. 그는 믿음의 상징들과 믿음의 유형들, 믿음의 진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의 삶을 기술한다.
이제 안을 들여다 보자.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믿음을 소개한다. 그는 믿음은 궁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비록 다른 모든 주장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그 이름들조차도 거부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충만을 약속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또한 믿음은 총체적인 인격의 행위이기에 개인의 역동적인 삶에 참여한다.
반면 맹신도 거짓 궁극성을 가지고 있기에 참된 믿음과 구별해내는 바른 기준이 필요하다. 맹신도 황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은 위험성을 은폐할 수 있다. 하지만 맹신은 ‘존재적 실망'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이러한 맹신적 행위는 인간의 속사람을 상하게 하고, 인격의 붕괴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틸리히가 제시하는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 곧 맹신과의 차이점은 거룩에 대한 자각, 즉 거룩한 것의 임재 체험이다. 현 시대에는 ‘거룩’이라는 용어는 윤리적 완전성과 동일하게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는 틸리히의 통찰력에 따라 믿음과 거룩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 우리는 ‘악마적인 거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상징과 신화에 대한 부분은 이해하기 상당히 어렵다. 필자의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인지, 틸리히는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철학적 사색과 접근으로 일관되어 있어 따라 잡기가 힘들다. 성경의 역사가 사실일 가능성을 증명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틸리히는 보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이에 그의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일어났던 마술적 행위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아담은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서 살았고 그의 타락은 인간 개개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동정녀의 메시아 잉태 또한 생물학적 용어들로 이해되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또한 물리적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의 재림 또한 지구적인 것 또는 우주적인 것 또는 대참사로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하나님께서는 우주에 이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동하시고 특정한 장소에 거하시고 사건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시고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시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진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궁극성을 앗아갔다.”
결국 틸리히의 관심은 단순히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지 않고도 그리스도가 되려고 했다면 그 예수님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상징을 창조한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역동적인 믿음의 성격은 많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나타내고 있는 광범위한 믿음의 태도와 거리가 멀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표현된 궁극성과 궁극성 그 자체가 구별되지 않고서는 맹신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는 극렬한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이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승화될 수 있다고 끝맺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틸리히의 사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답게 그의 지성은 유난히 돋보이며 빛을 발한다. 성경의 축자 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믿는 필자로서는 상당 부분 그의 기독교적 믿음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부분 깊이 있는 사색과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폴 틸리히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소개서가 될 줄로 안다.
저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완성된 세계적 신학자 틸리히는, 1933년 나치 정권과의 충돌로 독일에서 추방되기 전부터 이미 철학 과 신학의 교수로서 활동했으며, 망명 후 미국에서는 주로 유니온 신학교와 하버드 대학 및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 활동을 벌였다. 그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20세기의 신학 사조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철학과 문화 일반 등에 대하여 통합적, 변증적, 상 관적인 관계성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안겨주고 있다.
폴 틸리히를 가리켜 ‘경계선상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틸리히는 자신을 가리켜 철학과 신학 사이, 인간적 문화와 종교 사이,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사상적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느낌이 든다. 틸리히는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경계선상에 서서, 문화적 격변기에 처한 자기 시대 사람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허무주의에 의해 지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가능한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려고 했으며, 또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살아있는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 교리와 표현 형태의 재해석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것들이 본래 가진 능력을 더욱 새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때로 ‘지성인의 사도’로 불리기도 한다. 급속한 세속화로 인해 영적 공허감 속에 빠져 있던 당시 지성들을 위해 기독교라는 종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주고자 했다. 그는 교리들, 신조들, 그리고 종교적 교조들과 같은 ‘오랜 상징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문자적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별히 이 책 ‘믿음의 역동성’은 현대인들에게 폴 틸리히의 사상을 소개하는데 꽤 유용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말해준다. 그는 믿음의 상징들과 믿음의 유형들, 믿음의 진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의 삶을 기술한다.
이제 안을 들여다 보자.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믿음을 소개한다. 그는 믿음은 궁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비록 다른 모든 주장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그 이름들조차도 거부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충만을 약속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또한 믿음은 총체적인 인격의 행위이기에 개인의 역동적인 삶에 참여한다.
반면 맹신도 거짓 궁극성을 가지고 있기에 참된 믿음과 구별해내는 바른 기준이 필요하다. 맹신도 황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은 위험성을 은폐할 수 있다. 하지만 맹신은 ‘존재적 실망'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이러한 맹신적 행위는 인간의 속사람을 상하게 하고, 인격의 붕괴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틸리히가 제시하는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 곧 맹신과의 차이점은 거룩에 대한 자각, 즉 거룩한 것의 임재 체험이다. 현 시대에는 ‘거룩’이라는 용어는 윤리적 완전성과 동일하게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는 틸리히의 통찰력에 따라 믿음과 거룩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 우리는 ‘악마적인 거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상징과 신화에 대한 부분은 이해하기 상당히 어렵다. 필자의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인지, 틸리히는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철학적 사색과 접근으로 일관되어 있어 따라 잡기가 힘들다. 성경의 역사가 사실일 가능성을 증명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틸리히는 보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이에 그의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일어났던 마술적 행위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아담은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서 살았고 그의 타락은 인간 개개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동정녀의 메시아 잉태 또한 생물학적 용어들로 이해되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또한 물리적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의 재림 또한 지구적인 것 또는 우주적인 것 또는 대참사로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하나님께서는 우주에 이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동하시고 특정한 장소에 거하시고 사건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시고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시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진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궁극성을 앗아갔다.”
결국 틸리히의 관심은 단순히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지 않고도 그리스도가 되려고 했다면 그 예수님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상징을 창조한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역동적인 믿음의 성격은 많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나타내고 있는 광범위한 믿음의 태도와 거리가 멀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표현된 궁극성과 궁극성 그 자체가 구별되지 않고서는 맹신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는 극렬한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이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승화될 수 있다고 끝맺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틸리히의 사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답게 그의 지성은 유난히 돋보이며 빛을 발한다. 성경의 축자 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믿는 필자로서는 상당 부분 그의 기독교적 믿음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부분 깊이 있는 사색과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폴 틸리히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소개서가 될 줄로 안다.
저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완성된 세계적 신학자 틸리히는, 1933년 나치 정권과의 충돌로 독일에서 추방되기 전부터 이미 철학 과 신학의 교수로서 활동했으며, 망명 후 미국에서는 주로 유니온 신학교와 하버드 대학 및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 활동을 벌였다. 그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20세기의 신학 사조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철학과 문화 일반 등에 대하여 통합적, 변증적, 상 관적인 관계성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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