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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나님 나라와 언약
하나님 나라와 언약/크레이그 블레이징/기독교문서선교회/[나상엽]
1. 본서의 의의
일반적으로 세대주의가 현대 국가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특별히 19세기 영국의 플리머드 형제교회 Plymouth Brethren (형제 교회는(Brethren)은 종파와 교파 간의 파벌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영속화시키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의 특수한 직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일반 성도들의 영적인 은사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서로 성경으로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유에 강조점을 두었다. 평신도들의 온전성과 책임감을 증진시킴으로써 형제회는 개인적인 경건과 성경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목도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많은 양의 주해적이고 경건한 문학 서적들이 탄생하였으며 존 넬슨 다비, 벤자민 윌스 뉴톤, 조지 뮬러, 사무엘 트레겔스, 윌리암 켈리, 찰스 헨리 매킨토쉬 같은 저자들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본서, p. 18)으로서 시작되었다고 인식되어왔기에, 세대주의는 애당초 다분히 반대와 적의를 내재적으로 껴안고 시작되었다. 또한 세대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편만했던 소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결구도에서 근본주의 진영의 대표적 주자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사실 세대주의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들은 세대주의 그 자체에 대한 진실하고 치밀한 학문적 연구보다도 격렬한 전쟁(?)에서 방어하고 이기기 위한 전투적 연구 위주였다. 따라서 이미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세대주의에 관한 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산된 저작들이 다수였기에, 세대주의의 우군이 저술한 책이든 세대주의의 적군이 저술한 책이든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용어들로 가득 차서, 그 실제의 내용과 상관없이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다가 그 번역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문어체로 되어 있었고(개중 나은 것은 전도출판사에서 역간한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나, 지금은 절판된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역간한 드와이트 펜테코스트의 『세대주의 종말론』 정도이다.), 또한 사회를 어지럽혔던 몇몇 극단적인 종말론자들 때문에 오늘날 세대주의와 및 관련 도서들은 외면당하고 천대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시대 가운데 있는 듯한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의 분위기와는 달리 미국의 복음주의계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의 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듯 보인다. 주의(-ism)와 교파(denomination), 인종, 사회적 계급을 넘어서 한 분 임금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위해 협력하는(또는 협력하고자 애쓰는) 시대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의 태도와 연구 역시 그러한 점에서 대단한 본이 된다. 그들은 구세대주의 진영과 언약신학자들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힘든 여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하면 성경을 좀더 잘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세대주의라 불리든 언약주의라 불리든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기를 원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그들의 진실한 태도야말로 모든 진실한 신자들이 본받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응당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또한 대세인 오늘날에, 본서가 충실한 번역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세대주의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한 한국 교계, 더 솔직히 말해 각자 속한 전통과 기득권에 대한 맹목적인 변호로 인한 소모적인 분열들로 가득한 한국 교계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본서는 세대주의를 변호하려는 또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세대주의의 긍정적인 유산들을 물려받으면서 동시에 그 해석 전통과 신학 시스템의 부족과 약점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들을 성경적이고도 학문적으로 해결하고자 솔직한 땀을 흘려 노력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 본서를 읽을 때에는, 그 독자가 세대주의자이든 언약주의자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대로 편견과 선입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각자의 선이해를 솔직하게 이 책과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저자들 역시 세대주의 전통에서 자라났지만 성경과의 솔직한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선입견과 선이해들을 변화시켜가며 본서에까지 이르렀으니 독자들도 그러한 솔직한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어떠한 모양으로든 유익을 얻을 것이다.
2. 본서의 내용 -요약
1) 세대주의의 범위와 다양성
저자들은 1부에서는 세대주의의 발생과 확산, 그리고 세대주의적 전통의 공통된 특징들과 차이점들을 설명한다. 형제 교회(Brethren) 활동에서 구체화된 세대주의는 나이지리아 사경회를 비롯한 사경회 운동, 그리고 스코필드를 거쳐 근본주의자들의 교회와 교파, 수많은 성경 학교와 교육기관과 대학교 신학교 등을 비롯해 적어도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에서만큼은 확실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D.L. 무디를 비롯한 수많은 인명들과 학교들, 운동들과 단체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본서 18-22쪽을 참조하라.).
세대주의는 유일무오한 언어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확고히 붙든다. 또한 우리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하는 어떤 특별한 협정을 의미하는 “세대들”을 성경에서 발견한다. 교회의 독특성도 세대주의의 전통 중 하나이며, 관련하여 연합적인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우주적 교회의 실제적 중요성도 그들의 믿음이다. 성경 예언을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보다 넓은 의미의 구속의 개념을 소유한다. 전천년주의의 한 형태로서 세대주의는 “대환란”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미래주의적 전천년주의를 믿으며, 또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소망아래 있었다. 그리고 문자적-역사적 해석에 따라 이스라엘의 독특한 국가적 미래를 인정한다.
저자들은 어떻게 세대주의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 또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세대주의의 차이점들을 핵심적 이원주의, 세대들, 교회의 본질, 성경 해석, 성경적 언약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라는 이슈들로 묶어 크게 고전적 세대주의로부터 개정 세대주의, 그리고 점진적 세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고전적 세대주의는 일반적으로 다비에서 루이스 췌이퍼까지의 영국과 미국의 세대주의를 일컬으며, 개정 세대주의는 1967년에 완성된 개정판 스코필드 성경에서 따온 말로, 대표적인 이로는 존 월부워드, 찰스 라이리, J. 드와이트 펜티코스트 등이 있다. 본서의 주제에 해당하는 점진적 세대주의는 세대주의적 전통의 관심사들과 강조점들에 대한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통해 개발되어진 좀더 현재적인 형태의 세대주의적인 사고로서, 현대 복음주의적 성경 해석에 좀더 가깝다. 본서의 저자들이나 로버트 소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를 간략하게 통시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이슈들을 확대하여 토론한 것이 본서의 중심내용으로서 2부와 3부로 이어진다.) 이러한 개관은 세대주의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재해석이라는 역동성을 따라 재확증되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2) 해석학
2부에서는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로서 해석학을 다룬다. 본서는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인 저자들과 본문, 독자들, 그리고 세계관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짝을 지어 토의한다. 여기서 점진적 세대주의의 배경이 되는 해석의 전제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본문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본문 중심적인 접근이 되어야 하며, 또한 항상 그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진리를 인지함에 있어서 확신과 명확성의 단계(본서에서는 이러한 확실성의 단계를 절대적인 확신, 강한 확신, 부드러운 확신, 진정한 불확실성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들이 있음을 잊지 않게 했고, 결국 점진적 세대주의라는 신사적인 세대주의를 낳게 했다.
저자들과 본문에 있어서 성경에는 중재된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러한 중재에는 저작권의 중재와 메시지의 중재, 그리고 역사의 중재라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러한 복잡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메시지의 깊이, 아름다움 그리고 정교함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재된 자료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저작권, 본문과 그 의미, 그리고 후대에 인간 저자들에 의한 재사용이라는 세 가지 이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진술은 세대주의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성경 해석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해석방법을 “역사적-문법적 방법”이라고 말해왔으나 과연 이 평범하면서도 수많은 오해를 낳은 이 “역사적-문법적 방법”을 역사적․문법적․문학적-신학적 영역으로의 접근 방식으로 세분하여 정밀하게 탐구한 부분을 포함한 2부의 내용은 해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3) 강해
3)-A. 성경 신학에서의 세대들 및 성경 언약들의 구조
이제 해석학을 밑바탕에 깔아 둔 채 시작되는 3부부터 점진적 세대주의의 실체적인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3부는 석의적이기보다는 강해적으로 진술되고 있기에 전체를 아울러 강해(exposition)이라는 제목아래 두었다. 먼저 성경에서 발견되는 세대의 개념과 그 세대들, 그리고 이에 대한 세대주의의 이해들을 도표와 더불어 차분하게 짚어본다(4장).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서로 다른 조정들(arrangements)이라는 “세대”라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는 바, 성경을 세대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특별히 이 시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즉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이해는 수많은 문제들을 안은 채 종말론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와 및 점진적 세대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씨앗 개념이 된다.
5장부터 8장까지는 본서의 본문 중의 본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점진적 세대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 가운데, 역사를 통해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 예수님”이다. 노아 언약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곧 이 땅이 생명이 가득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로 가득찰 것을 의도하셨다. 또한 이제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심판 이후에 앞으로 이루어질 구속 계획,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에서 확증되며, 이 언약에는 새로운 창조 계획을 제시되고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그런 점에서 핵심적인 언약이며, 이후의 모세 언약, 새 언약, 다윗 언약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확증과 확장, 부분적 실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약들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들을 맺으시고 유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실현시키시고 더욱 구체화시켜오셨다. 이 언약들은 첫 창조시에도 그러하셨듯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생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이다. 곧 생명으로 가득 찬 땅, 평화와 번영 속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땅에 관한 이야기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구속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언약들의 성취의 흐름 가운데 단연 주목할 만한 사건은 그 “아브라함의 씨”로서, 다윗 가문의 한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나셨다는 것이다.
3)-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경 언약의 성취
그분은 다윗 언약의 완전한 성취자이시다. 그분의 일으키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곧 가장 위대한 이름과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진 자로서 그분은 다윗 왕에 대한 묘사의 실체이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다윗 언약에 대한 약속이 성취이시다.
또한 동시에 그분은 아브라함 언약의 완전한 성취자이시다. 그분은 그 씨(the Seed)이시다. 그분은 축복의 중재자요 전달자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전달되는 축복은 유대인은 물론 모든 족속들에게도 동일하다.
예수님은 모세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 그분은 모세 언약의 성취와 종결을 가져왔으며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이러한 종말과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쓰셨으며 이로 인해 그들이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는 새 언약의 설립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은 곧 새 언약의 형태 안에 있는 법이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새 언약의 법을 “성령의 법”(롬 8:2)이라고 말하며,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약 2:8,12)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세대주의자들은 도덕률 폐기론자들이 아니라, 더 크고 놀라운 새 언약의 법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써 새 언약을 중재하신 중재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축복들은 새 언약의 바로 그 축복들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주어지며(이것이야말로 새 언약의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성령님으로 인해 마음이 새롭게 되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소망하게 된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언약이 명백하게 막이 열렸지만,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완전한 성취의 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우리는 소망한다.
3)-C. 하나님의 왕국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새 언약의 완전한 성취로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하나님의 왕국을 “마지막 날”이라고 불리는 그때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종말론적 왕국은 시편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윗과 솔로몬의 복된 통치와 유사한데, 이는 곧 다가올 왕국에 대한 전형이며, 결국 다윗과 솔로몬 그 이상의 다윗 가문의 왕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신약 성경에도 종말론적 왕국이라는 주제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차이점은 구약이 그 왕국을 예견하기만 했다면 신약은 그 왕국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예수이다. 다윗의 그 아들이신 예수, 곧 역사에 그분이 나타나심은 종말론적 왕국의 성취가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복음서의 기록들은 그 왕국의 그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구약에 의해 왕국을 이해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 자신도 요한처럼 왕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셨다. 그분의 가르치심의 전반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이었다. 그 왕국은 그분의 사역 전반에 걸쳐 지침이 되는 주제였다. 그분의 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은 구약의 예언이 고대하던 왕국 사역의 일부였다. 또한 그분은 자신을 인자로 부르셨는데, 이는 다니엘이 종말론적 왕국을 다스리실 분에 대해 사용했던 바로 그 말이다(단 7:13). 베드로는 이 인자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했는데(마 16:13-16), 이는 종말론적 왕국을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하다. 감람산 강화의 끝부분(마 25:31-46)에서 그 분은 전 세계적인 정치적 왕국을 가르치셨다. 그 왕국은 물질적이며 물리적인 동시에 영적인데, 이는 그 왕국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산상설교와 왕국의 의는 이 땅 위에 세워질 영적인 왕국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계시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구약이 하나님과 메시아의 통치의 최고의 조화를 고대한 반면, 신약은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결국 다가올 나라에 관한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차이점은 이 나라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계시에 있는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이시다!
신약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존하는 왕국에 대한 암시는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활동과 그분 자신을 통해 종말론적 왕국의 특징들이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여기 계셔서 성령의 권능을 행하신다는 것(마 11:11-12; 마 12:22-30)은 종말론적 왕국의 존재를 믿는 믿음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 종말론적 왕국의 실현 이전에 왕국이 존재할 형태에 대해서는 마 13장의 천국의 비유들이 설명해준다. 이는 왕국의 신비로 불리는데, 그 해석이 약간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든 이것이 다가올 왕국의 임함에 선행하는 단계임은 분명하다. 요컨대 예수님이 가르치신 종말론적 왕국은, 왕의 위격과 인격 안에 현존하는 왕국에서 신비적인 형태 안에서의 왕국, 그리고 주의 날 이후 그 충만함 속에서의 왕국으로라는 점진적인 단계들을 보인다.
이러한 점진적인 단계 가운데, 교회의 위치가 규정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신비적인 형태 로 감추어진 다가올 왕국의 축소판이다. 교회의 탄생일은 성령님이 임하신 오순절이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동일한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 둘은 이제 한 새 사람이 되어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왕국의 현재적 계시로서의 교회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특별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주목하라). 교회에 주어진 성령과 성령님의 축복은 미래 왕국에 대한 보증이다(엡 1:14). 다시 여기서, 새 언약의 시대는 분명코 개막되었다. 신약에서 교회를 묘사하는 모든 말은 언약의 약속과 메시아적 왕국이라는 장르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연유했거나 이것과 양립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호칭과 축복들이 새 언약 아래 교회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이며 왕국의 신비이다. 그러나 계시가 점진되는 과정 가운데 새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교회는 완전히 다르거나 혹은 덜 중요하거나 병행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것이다.
4) 사역적․신학적 이슈들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의 축소판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책임으로 이 책이 마무리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제 점진적 세대주의는 어떻게 연구실에서 벗어나 현대의 신학과 사역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본문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비록 그것이 개인과 맺은 것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이지 않고 통전적이다. 오늘날 우리의 용어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면 바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진적 세대주의의 맥락에서 우리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과 같은 맥락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사역이다.
먼저는 응당 교회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사역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거룩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의 정치적 구조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교회의 통치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날 복음주의적인 교회와 선교 단체들의 권력구조는 어떠한가? 기독교 사역에서의 직원 고용의 문제는? 자금을 분배하고 봉급을 책정하는 기준은? 우리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의 사회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교회들의 사회적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 교회들 사이에서 사회적 사역이 자란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적인 의와 거룩함이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지 않는다면, 종말론적 왕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근거는 사라진다. 점진적 세대주의자들은 단지 개개인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 교제, 그리고 사역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의 공의와 평화의 모델로서 교회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도시들과 국가에서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복음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에 교회의 외적인 사회적 사역은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이 될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개인과 사회의 변혁(구원)이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논의에서 점진적 세대주의가 그 동안 개혁주의 진영에서 고전적 세대주의나 개정 세대주의의 한계로 늘 도마 위에 올렸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편, 점진적 세대주의는 오늘날의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그리고 우리 자신과 어떠한 관련되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예언과 현 사건들과를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는 노력을 피해야 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는커녕 사람들을 환멸과 불신앙으로 인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련된 주제도 점진적 세대주의 신학의 또 하나의 이슈이다.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공동체인 교회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는 인종적인 문제, 그리고 정치 문제, 외교 문제 등과 다분히 연관되어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점진적 세대주의에서 그리스도론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점진적 세대주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성경 언약들의 역사적 약속들을 보충하는, 그리고 구속의 깊이와 폭의 점진적 계시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를 온전한 구속으로 인도하는 그런 것이다. 또한 다윗의 통치와 하나님과 통치 사이의 긴장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행위의 일치 안에서 제거된다. 그래서 성육인은 인간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분은 성경에서 그 언약의 약속들과 예언들에 요약된, 운명의 사람, 언약들과 예언들에 의해 예언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하나님이시다. 오셔서 영원한 왕국에서 우리와 친밀히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또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경륜들(세대들)의 열쇠이다.
3. 맺으며
점진적 세대주의를 단순한 학문적 결과라고 보기에는, 그래서 학문적인 안목에서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다른 성격학도들이 그러하듯) 성경이 계시하는바,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삼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는 이들이기에 그들의 연구에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등 그분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 연구의 중심에는 최고의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우리는 본서에서 점진적 세대주의를 배운다기보다는 그것이 가리키는바 언약의 성취자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고 폭 넓게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주의”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이름 아래 우리 자신을 두지 말자. 원대하고 깊으신 그분의 생각과 계획 가운데 우리 자신을 두자. 사람들이 무어라 부르는 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어라 부르는 게 뭐 중요하겠는가? 창조주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드러운 부르심에 만족하자. 참으로 우리를 원하시고 부르시며 찾으시는 그분, 우리와의 그 관계를 위한 그분의 지혜로우신 계획과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분의 열심,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저자 크레이그 블레이징
크레이그 블레이징(달라스 신학교 신학박사)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 실행부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신학회의 차기 회장으로 선임되어 있다.
1. 본서의 의의
일반적으로 세대주의가 현대 국가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특별히 19세기 영국의 플리머드 형제교회 Plymouth Brethren (형제 교회는(Brethren)은 종파와 교파 간의 파벌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영속화시키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의 특수한 직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일반 성도들의 영적인 은사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서로 성경으로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유에 강조점을 두었다. 평신도들의 온전성과 책임감을 증진시킴으로써 형제회는 개인적인 경건과 성경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목도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많은 양의 주해적이고 경건한 문학 서적들이 탄생하였으며 존 넬슨 다비, 벤자민 윌스 뉴톤, 조지 뮬러, 사무엘 트레겔스, 윌리암 켈리, 찰스 헨리 매킨토쉬 같은 저자들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본서, p. 18)으로서 시작되었다고 인식되어왔기에, 세대주의는 애당초 다분히 반대와 적의를 내재적으로 껴안고 시작되었다. 또한 세대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편만했던 소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결구도에서 근본주의 진영의 대표적 주자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사실 세대주의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들은 세대주의 그 자체에 대한 진실하고 치밀한 학문적 연구보다도 격렬한 전쟁(?)에서 방어하고 이기기 위한 전투적 연구 위주였다. 따라서 이미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세대주의에 관한 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산된 저작들이 다수였기에, 세대주의의 우군이 저술한 책이든 세대주의의 적군이 저술한 책이든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용어들로 가득 차서, 그 실제의 내용과 상관없이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다가 그 번역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문어체로 되어 있었고(개중 나은 것은 전도출판사에서 역간한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나, 지금은 절판된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역간한 드와이트 펜테코스트의 『세대주의 종말론』 정도이다.), 또한 사회를 어지럽혔던 몇몇 극단적인 종말론자들 때문에 오늘날 세대주의와 및 관련 도서들은 외면당하고 천대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시대 가운데 있는 듯한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의 분위기와는 달리 미국의 복음주의계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의 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듯 보인다. 주의(-ism)와 교파(denomination), 인종, 사회적 계급을 넘어서 한 분 임금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위해 협력하는(또는 협력하고자 애쓰는) 시대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의 태도와 연구 역시 그러한 점에서 대단한 본이 된다. 그들은 구세대주의 진영과 언약신학자들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힘든 여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하면 성경을 좀더 잘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세대주의라 불리든 언약주의라 불리든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기를 원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그들의 진실한 태도야말로 모든 진실한 신자들이 본받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응당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또한 대세인 오늘날에, 본서가 충실한 번역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세대주의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한 한국 교계, 더 솔직히 말해 각자 속한 전통과 기득권에 대한 맹목적인 변호로 인한 소모적인 분열들로 가득한 한국 교계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본서는 세대주의를 변호하려는 또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세대주의의 긍정적인 유산들을 물려받으면서 동시에 그 해석 전통과 신학 시스템의 부족과 약점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들을 성경적이고도 학문적으로 해결하고자 솔직한 땀을 흘려 노력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 본서를 읽을 때에는, 그 독자가 세대주의자이든 언약주의자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대로 편견과 선입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각자의 선이해를 솔직하게 이 책과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저자들 역시 세대주의 전통에서 자라났지만 성경과의 솔직한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선입견과 선이해들을 변화시켜가며 본서에까지 이르렀으니 독자들도 그러한 솔직한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어떠한 모양으로든 유익을 얻을 것이다.
2. 본서의 내용 -요약
1) 세대주의의 범위와 다양성
저자들은 1부에서는 세대주의의 발생과 확산, 그리고 세대주의적 전통의 공통된 특징들과 차이점들을 설명한다. 형제 교회(Brethren) 활동에서 구체화된 세대주의는 나이지리아 사경회를 비롯한 사경회 운동, 그리고 스코필드를 거쳐 근본주의자들의 교회와 교파, 수많은 성경 학교와 교육기관과 대학교 신학교 등을 비롯해 적어도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에서만큼은 확실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D.L. 무디를 비롯한 수많은 인명들과 학교들, 운동들과 단체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본서 18-22쪽을 참조하라.).
세대주의는 유일무오한 언어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확고히 붙든다. 또한 우리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하는 어떤 특별한 협정을 의미하는 “세대들”을 성경에서 발견한다. 교회의 독특성도 세대주의의 전통 중 하나이며, 관련하여 연합적인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우주적 교회의 실제적 중요성도 그들의 믿음이다. 성경 예언을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보다 넓은 의미의 구속의 개념을 소유한다. 전천년주의의 한 형태로서 세대주의는 “대환란”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미래주의적 전천년주의를 믿으며, 또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소망아래 있었다. 그리고 문자적-역사적 해석에 따라 이스라엘의 독특한 국가적 미래를 인정한다.
저자들은 어떻게 세대주의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 또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세대주의의 차이점들을 핵심적 이원주의, 세대들, 교회의 본질, 성경 해석, 성경적 언약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라는 이슈들로 묶어 크게 고전적 세대주의로부터 개정 세대주의, 그리고 점진적 세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고전적 세대주의는 일반적으로 다비에서 루이스 췌이퍼까지의 영국과 미국의 세대주의를 일컬으며, 개정 세대주의는 1967년에 완성된 개정판 스코필드 성경에서 따온 말로, 대표적인 이로는 존 월부워드, 찰스 라이리, J. 드와이트 펜티코스트 등이 있다. 본서의 주제에 해당하는 점진적 세대주의는 세대주의적 전통의 관심사들과 강조점들에 대한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통해 개발되어진 좀더 현재적인 형태의 세대주의적인 사고로서, 현대 복음주의적 성경 해석에 좀더 가깝다. 본서의 저자들이나 로버트 소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를 간략하게 통시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이슈들을 확대하여 토론한 것이 본서의 중심내용으로서 2부와 3부로 이어진다.) 이러한 개관은 세대주의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재해석이라는 역동성을 따라 재확증되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2) 해석학
2부에서는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로서 해석학을 다룬다. 본서는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인 저자들과 본문, 독자들, 그리고 세계관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짝을 지어 토의한다. 여기서 점진적 세대주의의 배경이 되는 해석의 전제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본문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본문 중심적인 접근이 되어야 하며, 또한 항상 그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진리를 인지함에 있어서 확신과 명확성의 단계(본서에서는 이러한 확실성의 단계를 절대적인 확신, 강한 확신, 부드러운 확신, 진정한 불확실성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들이 있음을 잊지 않게 했고, 결국 점진적 세대주의라는 신사적인 세대주의를 낳게 했다.
저자들과 본문에 있어서 성경에는 중재된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러한 중재에는 저작권의 중재와 메시지의 중재, 그리고 역사의 중재라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러한 복잡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메시지의 깊이, 아름다움 그리고 정교함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재된 자료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저작권, 본문과 그 의미, 그리고 후대에 인간 저자들에 의한 재사용이라는 세 가지 이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진술은 세대주의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성경 해석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해석방법을 “역사적-문법적 방법”이라고 말해왔으나 과연 이 평범하면서도 수많은 오해를 낳은 이 “역사적-문법적 방법”을 역사적․문법적․문학적-신학적 영역으로의 접근 방식으로 세분하여 정밀하게 탐구한 부분을 포함한 2부의 내용은 해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3) 강해
3)-A. 성경 신학에서의 세대들 및 성경 언약들의 구조
이제 해석학을 밑바탕에 깔아 둔 채 시작되는 3부부터 점진적 세대주의의 실체적인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3부는 석의적이기보다는 강해적으로 진술되고 있기에 전체를 아울러 강해(exposition)이라는 제목아래 두었다. 먼저 성경에서 발견되는 세대의 개념과 그 세대들, 그리고 이에 대한 세대주의의 이해들을 도표와 더불어 차분하게 짚어본다(4장).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서로 다른 조정들(arrangements)이라는 “세대”라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는 바, 성경을 세대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특별히 이 시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즉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이해는 수많은 문제들을 안은 채 종말론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와 및 점진적 세대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씨앗 개념이 된다.
5장부터 8장까지는 본서의 본문 중의 본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점진적 세대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 가운데, 역사를 통해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 예수님”이다. 노아 언약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곧 이 땅이 생명이 가득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로 가득찰 것을 의도하셨다. 또한 이제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심판 이후에 앞으로 이루어질 구속 계획,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에서 확증되며, 이 언약에는 새로운 창조 계획을 제시되고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그런 점에서 핵심적인 언약이며, 이후의 모세 언약, 새 언약, 다윗 언약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확증과 확장, 부분적 실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약들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들을 맺으시고 유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실현시키시고 더욱 구체화시켜오셨다. 이 언약들은 첫 창조시에도 그러하셨듯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생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이다. 곧 생명으로 가득 찬 땅, 평화와 번영 속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땅에 관한 이야기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구속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언약들의 성취의 흐름 가운데 단연 주목할 만한 사건은 그 “아브라함의 씨”로서, 다윗 가문의 한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나셨다는 것이다.
3)-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경 언약의 성취
그분은 다윗 언약의 완전한 성취자이시다. 그분의 일으키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곧 가장 위대한 이름과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진 자로서 그분은 다윗 왕에 대한 묘사의 실체이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다윗 언약에 대한 약속이 성취이시다.
또한 동시에 그분은 아브라함 언약의 완전한 성취자이시다. 그분은 그 씨(the Seed)이시다. 그분은 축복의 중재자요 전달자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전달되는 축복은 유대인은 물론 모든 족속들에게도 동일하다.
예수님은 모세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 그분은 모세 언약의 성취와 종결을 가져왔으며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이러한 종말과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쓰셨으며 이로 인해 그들이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는 새 언약의 설립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은 곧 새 언약의 형태 안에 있는 법이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새 언약의 법을 “성령의 법”(롬 8:2)이라고 말하며,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약 2:8,12)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세대주의자들은 도덕률 폐기론자들이 아니라, 더 크고 놀라운 새 언약의 법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써 새 언약을 중재하신 중재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축복들은 새 언약의 바로 그 축복들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주어지며(이것이야말로 새 언약의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성령님으로 인해 마음이 새롭게 되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소망하게 된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언약이 명백하게 막이 열렸지만,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완전한 성취의 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우리는 소망한다.
3)-C. 하나님의 왕국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새 언약의 완전한 성취로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하나님의 왕국을 “마지막 날”이라고 불리는 그때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종말론적 왕국은 시편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윗과 솔로몬의 복된 통치와 유사한데, 이는 곧 다가올 왕국에 대한 전형이며, 결국 다윗과 솔로몬 그 이상의 다윗 가문의 왕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신약 성경에도 종말론적 왕국이라는 주제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차이점은 구약이 그 왕국을 예견하기만 했다면 신약은 그 왕국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예수이다. 다윗의 그 아들이신 예수, 곧 역사에 그분이 나타나심은 종말론적 왕국의 성취가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복음서의 기록들은 그 왕국의 그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구약에 의해 왕국을 이해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 자신도 요한처럼 왕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셨다. 그분의 가르치심의 전반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이었다. 그 왕국은 그분의 사역 전반에 걸쳐 지침이 되는 주제였다. 그분의 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은 구약의 예언이 고대하던 왕국 사역의 일부였다. 또한 그분은 자신을 인자로 부르셨는데, 이는 다니엘이 종말론적 왕국을 다스리실 분에 대해 사용했던 바로 그 말이다(단 7:13). 베드로는 이 인자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했는데(마 16:13-16), 이는 종말론적 왕국을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하다. 감람산 강화의 끝부분(마 25:31-46)에서 그 분은 전 세계적인 정치적 왕국을 가르치셨다. 그 왕국은 물질적이며 물리적인 동시에 영적인데, 이는 그 왕국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산상설교와 왕국의 의는 이 땅 위에 세워질 영적인 왕국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계시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구약이 하나님과 메시아의 통치의 최고의 조화를 고대한 반면, 신약은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결국 다가올 나라에 관한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차이점은 이 나라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계시에 있는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이시다!
신약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존하는 왕국에 대한 암시는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활동과 그분 자신을 통해 종말론적 왕국의 특징들이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여기 계셔서 성령의 권능을 행하신다는 것(마 11:11-12; 마 12:22-30)은 종말론적 왕국의 존재를 믿는 믿음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 종말론적 왕국의 실현 이전에 왕국이 존재할 형태에 대해서는 마 13장의 천국의 비유들이 설명해준다. 이는 왕국의 신비로 불리는데, 그 해석이 약간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든 이것이 다가올 왕국의 임함에 선행하는 단계임은 분명하다. 요컨대 예수님이 가르치신 종말론적 왕국은, 왕의 위격과 인격 안에 현존하는 왕국에서 신비적인 형태 안에서의 왕국, 그리고 주의 날 이후 그 충만함 속에서의 왕국으로라는 점진적인 단계들을 보인다.
이러한 점진적인 단계 가운데, 교회의 위치가 규정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신비적인 형태 로 감추어진 다가올 왕국의 축소판이다. 교회의 탄생일은 성령님이 임하신 오순절이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동일한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 둘은 이제 한 새 사람이 되어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왕국의 현재적 계시로서의 교회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특별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주목하라). 교회에 주어진 성령과 성령님의 축복은 미래 왕국에 대한 보증이다(엡 1:14). 다시 여기서, 새 언약의 시대는 분명코 개막되었다. 신약에서 교회를 묘사하는 모든 말은 언약의 약속과 메시아적 왕국이라는 장르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연유했거나 이것과 양립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호칭과 축복들이 새 언약 아래 교회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이며 왕국의 신비이다. 그러나 계시가 점진되는 과정 가운데 새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교회는 완전히 다르거나 혹은 덜 중요하거나 병행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것이다.
4) 사역적․신학적 이슈들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의 축소판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책임으로 이 책이 마무리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제 점진적 세대주의는 어떻게 연구실에서 벗어나 현대의 신학과 사역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본문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비록 그것이 개인과 맺은 것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이지 않고 통전적이다. 오늘날 우리의 용어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면 바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진적 세대주의의 맥락에서 우리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과 같은 맥락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사역이다.
먼저는 응당 교회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사역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거룩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의 정치적 구조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교회의 통치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날 복음주의적인 교회와 선교 단체들의 권력구조는 어떠한가? 기독교 사역에서의 직원 고용의 문제는? 자금을 분배하고 봉급을 책정하는 기준은? 우리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의 사회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교회들의 사회적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 교회들 사이에서 사회적 사역이 자란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적인 의와 거룩함이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지 않는다면, 종말론적 왕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근거는 사라진다. 점진적 세대주의자들은 단지 개개인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교회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 교제, 그리고 사역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의 공의와 평화의 모델로서 교회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도시들과 국가에서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복음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에 교회의 외적인 사회적 사역은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이 될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개인과 사회의 변혁(구원)이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논의에서 점진적 세대주의가 그 동안 개혁주의 진영에서 고전적 세대주의나 개정 세대주의의 한계로 늘 도마 위에 올렸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편, 점진적 세대주의는 오늘날의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그리고 우리 자신과 어떠한 관련되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예언과 현 사건들과를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는 노력을 피해야 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는커녕 사람들을 환멸과 불신앙으로 인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련된 주제도 점진적 세대주의 신학의 또 하나의 이슈이다.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공동체인 교회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는 인종적인 문제, 그리고 정치 문제, 외교 문제 등과 다분히 연관되어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점진적 세대주의에서 그리스도론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점진적 세대주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성경 언약들의 역사적 약속들을 보충하는, 그리고 구속의 깊이와 폭의 점진적 계시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를 온전한 구속으로 인도하는 그런 것이다. 또한 다윗의 통치와 하나님과 통치 사이의 긴장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행위의 일치 안에서 제거된다. 그래서 성육인은 인간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분은 성경에서 그 언약의 약속들과 예언들에 요약된, 운명의 사람, 언약들과 예언들에 의해 예언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하나님이시다. 오셔서 영원한 왕국에서 우리와 친밀히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또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경륜들(세대들)의 열쇠이다.
3. 맺으며
점진적 세대주의를 단순한 학문적 결과라고 보기에는, 그래서 학문적인 안목에서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다른 성격학도들이 그러하듯) 성경이 계시하는바,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삼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는 이들이기에 그들의 연구에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등 그분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 연구의 중심에는 최고의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우리는 본서에서 점진적 세대주의를 배운다기보다는 그것이 가리키는바 언약의 성취자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고 폭 넓게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주의”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이름 아래 우리 자신을 두지 말자. 원대하고 깊으신 그분의 생각과 계획 가운데 우리 자신을 두자. 사람들이 무어라 부르는 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어라 부르는 게 뭐 중요하겠는가? 창조주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드러운 부르심에 만족하자. 참으로 우리를 원하시고 부르시며 찾으시는 그분, 우리와의 그 관계를 위한 그분의 지혜로우신 계획과 계획을 성취하시는 그분의 열심,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저자 크레이그 블레이징
크레이그 블레이징(달라스 신학교 신학박사)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 실행부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신학회의 차기 회장으로 선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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