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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도의 진정한 성화
칼빈의 성화론/알드레드 괼러/한국장로교출판사/[김재윤]
종교 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은 개혁주의 신학계와 복음주의 신학계,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계에서조차 이론의 여지없이 기독 교회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때문에 칼빈에 대한 연구서,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저서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런데 칼빈에 대한 연구서는 우리가 읽을 때에 특히 조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저자의 신학 방향에 따라서 칼빈에 대한 이해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괼러라는 독일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궁금한 것은 역자보다도 저자일찐대 저자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어 아쉽고, 독일 신학계에 대한 일반적인 신학적 평가에 의해 나는 저자에 대해 선입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평소 존 칼빈에 대한 지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칼빈의 성화론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성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보고 있으며, 이것이 이 책의 1장의 내용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난제인지도 모른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일찐대 오늘날에는 믿음과 삶과 행위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 책의 제2장에서는 성령을 통한 죄인의 중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 내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되어져 버렸다. 교회 안에만 있으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만연된 나머지 중생의 필요성이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도외시되고 있다.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시 오늘날에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율법에 대한 문제인 듯 하다. 아직도 이 율법에 대한 바른 신학적 정립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십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을뿐더러, 성도가 살아야 할 율법을 이야기하면, 마치 율법주의자처럼 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율법을 떠난 무율법주의에 빠진 나머지 율법을 혐오하는 사상까지 생겨났고,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듯한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율법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팽배하게 되었다. 십계명 중에서도 오계명과 칠계명, 팔계명에 대한 칼빈의 통찰력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4장에서는 칭의론과 성화론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내가 이 책을 주의깊게 읽으면서 저자의 논지의 혼동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칼빈의 구별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또한 5장의 내용에서는 오히려 성화에 근거한 칭의를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화에 대해 오늘날 강조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성화를 배제한 칭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성화를 강조하는 것이 칭의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을 4장에서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저자는 논리적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신학적 혼돈을 주고 있다. 물론 저자의 칭의에 근거한 성화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저자는 4장에서 마치 성화를 칭의에 있어서 혐오스러운 것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곧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칼빈은 선행을 구원에 있어서 강조하고 교리화한 로마 카톨릭에 반대하여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이지, 성화 없는 칭의를 말한 것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이 4장은 칼빈에 대한 저자의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칼빈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 선택, 율법에 대한 신학적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성화와 칭의에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장을 읽으며 독자는 칭의와 성화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신학적인 개념 면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 것이지, 성화를 배제한 칭의를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도 이러한 부분들을 말하고 있지만, 저자의 4장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독자의 판단과 개인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마지막 5장에서 저자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가 가지는 칼빈의 교리에 대한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내용들은 요약적이고 간략하게 칼빈의 신학 전반에 관련된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지만, 한 가지 아쉬운 면은 좀더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 5장의 주제만으로도 한편의 논문을 쓸 수 있는 좀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하여 내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자.
Ⅰ. 칭의와 성화
중생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제 2의 종교개혁의 교리적 재발견이 필요한 교리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회심의 문제가 너무 쉽게 생각되고 있는데, 성화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구원관에 대하여 생각할 때, 과연 종교개혁 이전과 무엇이 다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다시한번 칭의와 성화 문제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리적 사색의 단계를 넘어 내 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전체 주제를 가지고 이 책을 쓰고 있다. 성화는 칭의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고, 또한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해 주는 시금석이다. 저자는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정적인 차이와 단절을 바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순종의 여부 문제로 귀결짓고 있다. 내가 남보다 더한 것이 무언가라는 실제적인 고민과 질문을 이 책을 읽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Ⅱ. 중생의 점진적 성취
이 책에서 저자는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칼빈이 세가지로 이해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 칼빈은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경주자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성도는 이 땅에서 달리고 있는 존재이다. 아직 성취되지 아니한 그러나 이미 시작된 점진적인 성화를 위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성도이다. 때문에 참된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칭의에 안주하게끔 하지 않고, 성화를 위해 달려가게끔 도전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둘째, 칼빈은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는 끊임없이 배우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학교를 통하여 성도를 기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빈의 영향으로 그가 목회했던 제네바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존 낙스(John Knox)로부터 '사도 시대 이후 그리스도의 학교'라는 찬사를 얻게 된다. 칼빈은 진리만이 계속하여 우리에게 성숙과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곧 이것은 그의 설교 사역과 교육 사역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자라나는 식물의 성장으로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이해하였다. 곧 그것은 매일 조금씩 자라는 식물처럼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매일 조금씩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Ⅲ. 칭의론
저자는 이 책의 76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순종은 인간의 성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칭의는 문제는 우리의 당면한 문제이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 최대의 난제이다. 칼빈은 칭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하심에 두고 있다. 그는 우리가 옷입은 의는 우리에게 낯선 의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불의할 뿐인데, 의로우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를 견고히 붙들 것을 칼빈은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받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자, 하나님의 선택이다. 칼빈은 성화조차도 하나님의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 책에서 타인의 구원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라고 강조하며, 우리가 주제넘게 이 문제에 있어서 심판자가 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역자이면서도 거룩하지 못한 나의 삶과 모습들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었으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개인적인 경건과 성화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칼빈의 원전에 대한 연구에로 우리를 자극하여 주고 있다. 칼빈의 전체 사상을 균형있게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그의 '기독교 강요(1536년)'와 주석들에 대한 더 심도깊은 연구와 토론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책의 주제인 칼빈의 성화론에 대하여 우리는 조금더 근접하게 칼빈에게 다다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가을, 이 책은 비록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나로 하여금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강단에서 조금더 분명하고도 균형있게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강조가 선명해 질 때 조국 교회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며, 저자의 지적처럼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 이전에 성화의 문제를 다룬 것을 우리는 평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은 개혁주의 신학계와 복음주의 신학계,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계에서조차 이론의 여지없이 기독 교회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때문에 칼빈에 대한 연구서,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저서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런데 칼빈에 대한 연구서는 우리가 읽을 때에 특히 조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저자의 신학 방향에 따라서 칼빈에 대한 이해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괼러라는 독일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궁금한 것은 역자보다도 저자일찐대 저자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어 아쉽고, 독일 신학계에 대한 일반적인 신학적 평가에 의해 나는 저자에 대해 선입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평소 존 칼빈에 대한 지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칼빈의 성화론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성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보고 있으며, 이것이 이 책의 1장의 내용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난제인지도 모른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일찐대 오늘날에는 믿음과 삶과 행위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 책의 제2장에서는 성령을 통한 죄인의 중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 내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되어져 버렸다. 교회 안에만 있으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만연된 나머지 중생의 필요성이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도외시되고 있다.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시 오늘날에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율법에 대한 문제인 듯 하다. 아직도 이 율법에 대한 바른 신학적 정립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십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을뿐더러, 성도가 살아야 할 율법을 이야기하면, 마치 율법주의자처럼 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율법을 떠난 무율법주의에 빠진 나머지 율법을 혐오하는 사상까지 생겨났고,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듯한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율법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팽배하게 되었다. 십계명 중에서도 오계명과 칠계명, 팔계명에 대한 칼빈의 통찰력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4장에서는 칭의론과 성화론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내가 이 책을 주의깊게 읽으면서 저자의 논지의 혼동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칼빈의 구별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또한 5장의 내용에서는 오히려 성화에 근거한 칭의를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화에 대해 오늘날 강조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성화를 배제한 칭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성화를 강조하는 것이 칭의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을 4장에서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저자는 논리적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신학적 혼돈을 주고 있다. 물론 저자의 칭의에 근거한 성화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저자는 4장에서 마치 성화를 칭의에 있어서 혐오스러운 것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곧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칼빈은 선행을 구원에 있어서 강조하고 교리화한 로마 카톨릭에 반대하여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이지, 성화 없는 칭의를 말한 것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이 4장은 칼빈에 대한 저자의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칼빈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 선택, 율법에 대한 신학적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성화와 칭의에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장을 읽으며 독자는 칭의와 성화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신학적인 개념 면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 것이지, 성화를 배제한 칭의를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도 이러한 부분들을 말하고 있지만, 저자의 4장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독자의 판단과 개인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마지막 5장에서 저자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가 가지는 칼빈의 교리에 대한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내용들은 요약적이고 간략하게 칼빈의 신학 전반에 관련된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지만, 한 가지 아쉬운 면은 좀더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 5장의 주제만으로도 한편의 논문을 쓸 수 있는 좀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하여 내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자.
Ⅰ. 칭의와 성화
중생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제 2의 종교개혁의 교리적 재발견이 필요한 교리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회심의 문제가 너무 쉽게 생각되고 있는데, 성화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구원관에 대하여 생각할 때, 과연 종교개혁 이전과 무엇이 다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다시한번 칭의와 성화 문제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리적 사색의 단계를 넘어 내 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전체 주제를 가지고 이 책을 쓰고 있다. 성화는 칭의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고, 또한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해 주는 시금석이다. 저자는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정적인 차이와 단절을 바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순종의 여부 문제로 귀결짓고 있다. 내가 남보다 더한 것이 무언가라는 실제적인 고민과 질문을 이 책을 읽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Ⅱ. 중생의 점진적 성취
이 책에서 저자는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칼빈이 세가지로 이해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 칼빈은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경주자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성도는 이 땅에서 달리고 있는 존재이다. 아직 성취되지 아니한 그러나 이미 시작된 점진적인 성화를 위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성도이다. 때문에 참된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칭의에 안주하게끔 하지 않고, 성화를 위해 달려가게끔 도전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둘째, 칼빈은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는 끊임없이 배우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학교를 통하여 성도를 기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빈의 영향으로 그가 목회했던 제네바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존 낙스(John Knox)로부터 '사도 시대 이후 그리스도의 학교'라는 찬사를 얻게 된다. 칼빈은 진리만이 계속하여 우리에게 성숙과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곧 이것은 그의 설교 사역과 교육 사역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자라나는 식물의 성장으로 중생의 점진적 성취를 이해하였다. 곧 그것은 매일 조금씩 자라는 식물처럼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매일 조금씩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Ⅲ. 칭의론
저자는 이 책의 76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순종은 인간의 성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칭의는 문제는 우리의 당면한 문제이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 최대의 난제이다. 칼빈은 칭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하심에 두고 있다. 그는 우리가 옷입은 의는 우리에게 낯선 의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불의할 뿐인데, 의로우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를 견고히 붙들 것을 칼빈은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받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자, 하나님의 선택이다. 칼빈은 성화조차도 하나님의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 책에서 타인의 구원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라고 강조하며, 우리가 주제넘게 이 문제에 있어서 심판자가 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역자이면서도 거룩하지 못한 나의 삶과 모습들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었으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개인적인 경건과 성화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칼빈의 원전에 대한 연구에로 우리를 자극하여 주고 있다. 칼빈의 전체 사상을 균형있게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그의 '기독교 강요(1536년)'와 주석들에 대한 더 심도깊은 연구와 토론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책의 주제인 칼빈의 성화론에 대하여 우리는 조금더 근접하게 칼빈에게 다다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가을, 이 책은 비록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나로 하여금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강단에서 조금더 분명하고도 균형있게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강조가 선명해 질 때 조국 교회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며, 저자의 지적처럼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 이전에 성화의 문제를 다룬 것을 우리는 평생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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