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서평
쉽지 않은, "쉽게 쓴 기독교 기본진리"!!??
복음이란 무엇인가?/마이클 호튼/부흥과 개혁사/[나상엽]
책을 덮고 조금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말 그대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믿었던, 믿는 복음은 무엇인가? 기독교 기본진리라 하였다. 그런데 쉽게 풀어썼댄다. 기본 진리인데 쉽게 풀어쓴다? 기본 진리가 그렇다면 기본 이상의 진리는? 아니, 진리라고 할 때에 기본 진리가 있고, 기본 아닌 진리가 있는가? 약간은 혼란스럽고, 무언가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물론 진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은 시간이나 교육 등의 요소에 따라 달라지기는 마련이지만, 내가 거듭날 때 믿었던 복음은 사실 대속의 진리가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내 영혼이 안식하고 만족하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거기에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소위 조직신학의 모든 영역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 창조, 인간, 타락, 죄, 예수 그리스도, 구원, 지옥, 천국 등등의 요소가 다 들어있지 않았던가?
본서는 이와 같은 복음이 포괄하고 있는 영역을 개혁주의의 전통의 기반에 서서,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현대적인 상황에서 현대적 의미로 설명하려 애썼다. 거기에는 창조, 타락, 예정, 성육신, 구속,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 성례, 종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이것이다. 복음이 포괄하는 영역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
또 하나 본서의 유익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복음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과 쟁점들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의 쟁점이라든가, 완전 성화에 대한 오해들이다. 성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로운 죄인”이라는 부제를 통해 자신의 논점을 명쾌하게 제시하며, 이에 대한 진리로서 에베소서를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갑기 그지없다. 또한 수년 전 교계를 달구었던 주재권 구원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도 “주님”을 강조하는 측과 “구주”를 강조하는 측 사이의 주장의 맹점들을 성경으로 지적해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바, 즉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는 그 어떤 사람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에 대한 루터의 말은 대단히 요약적이다. “만일 행위와 사랑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며, 아직까지 복음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바로 인식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여과 없이 기록한 대로, 의문과 혼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의문과 혼란이 독자에게 또 다른 연구 과제를 준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정리를 기대하는 일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쉽게 풀어 썼다는 말 치고는 비교적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이 복음,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스스로 감격해 벅차하며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찬양과 경배를 아끼지 않았던 이 복음이건만, 복음에 대한 쉬운 설명을 담았다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와 같은 예배의 심령은 생겨나지 않고 의문과 혼란을 품고 있다면. 이는 다만 내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인가?
둘째, 개혁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지나치게 배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정론에 대한 내용이 공평한 분량 배분에서 벗어나 두 장(4, 5장)에 걸쳐 할애되어 있다는 점이라든가, 구원론에 있어서 “보편 속죄론”과 “제한 속죄론”을 대조하는 내용(7장)은 전적으로 다 이해가 되지도 않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가 말하는 바, “유용한 구별”이라는 말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일까? 물론 이 구별은 100% 성경적이며, 또한 거듭난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별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어 감사와 경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어적 진술이 얼마나 한계가 있어왔던가? 그것은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켰던가? 게다가 성령님으로만 알 수 있는 이 오묘한 진리를 복음 전도의 영역에 까지 확대 적용하여 기존의 전도 메시지(“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가 그릇되었다고 하니, 미신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소위 평신도 전도자들은 전도에 있어 신학적 두려움을 지니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아쉬움은 성례(11장)나 종말(12장)을 논의한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성례에 있어서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발언은 직접적인 성경 구절에 기반을 두지 못한 주장으로서, 만약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발언도 동일한 상황(직접적인 성경 구절의 부재)이라면, 차라리 공평한 입장을 취하며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대로 세례의 의미, 곧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롬 6장)의 진리들을 더 심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기본 진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더 적절하다 여겨진다.
종말에 관한 논의 역시 그러하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 배경이니, 세대주의 신학의 해석과 분별이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세대주의 신학 진영이 쓴 같은 종류의 기독교 기본진리서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적어도 기독교 기본진리를 표방하는 책들은 말 그대로 기본(essential)을 넘어서지 않는 것, 또는 양 측에 대한 공정한 제시를 해주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와 걸림을 피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필자는 본서를 다 읽고 이해해나가는 동안에 몇 군데 덜컥 덜컥 걸음이 멎곤 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필자의 신학적 배경과 신념, 선지식들의 작용으로서, 필자 자신만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조언을 부탁한다.
저자 마이클 호튼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
국제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활동
옥스퍼드 대학교의 윌클리프홀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 기독개혁연합의 설립자이자 회장
현,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책을 덮고 조금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말 그대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믿었던, 믿는 복음은 무엇인가? 기독교 기본진리라 하였다. 그런데 쉽게 풀어썼댄다. 기본 진리인데 쉽게 풀어쓴다? 기본 진리가 그렇다면 기본 이상의 진리는? 아니, 진리라고 할 때에 기본 진리가 있고, 기본 아닌 진리가 있는가? 약간은 혼란스럽고, 무언가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물론 진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은 시간이나 교육 등의 요소에 따라 달라지기는 마련이지만, 내가 거듭날 때 믿었던 복음은 사실 대속의 진리가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내 영혼이 안식하고 만족하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거기에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소위 조직신학의 모든 영역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 창조, 인간, 타락, 죄, 예수 그리스도, 구원, 지옥, 천국 등등의 요소가 다 들어있지 않았던가?
본서는 이와 같은 복음이 포괄하고 있는 영역을 개혁주의의 전통의 기반에 서서,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현대적인 상황에서 현대적 의미로 설명하려 애썼다. 거기에는 창조, 타락, 예정, 성육신, 구속,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 성례, 종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이것이다. 복음이 포괄하는 영역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
또 하나 본서의 유익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복음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과 쟁점들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의 쟁점이라든가, 완전 성화에 대한 오해들이다. 성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로운 죄인”이라는 부제를 통해 자신의 논점을 명쾌하게 제시하며, 이에 대한 진리로서 에베소서를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갑기 그지없다. 또한 수년 전 교계를 달구었던 주재권 구원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도 “주님”을 강조하는 측과 “구주”를 강조하는 측 사이의 주장의 맹점들을 성경으로 지적해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바, 즉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는 그 어떤 사람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에 대한 루터의 말은 대단히 요약적이다. “만일 행위와 사랑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며, 아직까지 복음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바로 인식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여과 없이 기록한 대로, 의문과 혼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의문과 혼란이 독자에게 또 다른 연구 과제를 준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정리를 기대하는 일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쉽게 풀어 썼다는 말 치고는 비교적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이 복음,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스스로 감격해 벅차하며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찬양과 경배를 아끼지 않았던 이 복음이건만, 복음에 대한 쉬운 설명을 담았다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와 같은 예배의 심령은 생겨나지 않고 의문과 혼란을 품고 있다면. 이는 다만 내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인가?
둘째, 개혁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지나치게 배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정론에 대한 내용이 공평한 분량 배분에서 벗어나 두 장(4, 5장)에 걸쳐 할애되어 있다는 점이라든가, 구원론에 있어서 “보편 속죄론”과 “제한 속죄론”을 대조하는 내용(7장)은 전적으로 다 이해가 되지도 않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가 말하는 바, “유용한 구별”이라는 말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일까? 물론 이 구별은 100% 성경적이며, 또한 거듭난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별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어 감사와 경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어적 진술이 얼마나 한계가 있어왔던가? 그것은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켰던가? 게다가 성령님으로만 알 수 있는 이 오묘한 진리를 복음 전도의 영역에 까지 확대 적용하여 기존의 전도 메시지(“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가 그릇되었다고 하니, 미신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소위 평신도 전도자들은 전도에 있어 신학적 두려움을 지니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아쉬움은 성례(11장)나 종말(12장)을 논의한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성례에 있어서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발언은 직접적인 성경 구절에 기반을 두지 못한 주장으로서, 만약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발언도 동일한 상황(직접적인 성경 구절의 부재)이라면, 차라리 공평한 입장을 취하며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대로 세례의 의미, 곧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롬 6장)의 진리들을 더 심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기본 진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더 적절하다 여겨진다.
종말에 관한 논의 역시 그러하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 배경이니, 세대주의 신학의 해석과 분별이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세대주의 신학 진영이 쓴 같은 종류의 기독교 기본진리서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적어도 기독교 기본진리를 표방하는 책들은 말 그대로 기본(essential)을 넘어서지 않는 것, 또는 양 측에 대한 공정한 제시를 해주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와 걸림을 피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필자는 본서를 다 읽고 이해해나가는 동안에 몇 군데 덜컥 덜컥 걸음이 멎곤 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필자의 신학적 배경과 신념, 선지식들의 작용으로서, 필자 자신만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조언을 부탁한다.
저자 마이클 호튼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
국제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활동
옥스퍼드 대학교의 윌클리프홀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 기독개혁연합의 설립자이자 회장
현,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 mic.gif (0B) (0)
2,664개(115/13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