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성령님의 역사는 사회적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회적이다
10년 전에 읽었던 책이다. 교수님께서 조금 수정하여 타 출판사에서 다시 내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 책에 대한 관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며칠에 걸쳐서 교수님의 박사 논문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다 읽었다. 에드워즈의 주요 전작을 면밀히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의 성령론을 정립한 탁월한 책이다. 그의 인생에서 부흥을 두 번이나 경험하고 체험하였기에 부흥과 신학과 성령님에 대한 중요한 기준과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빚진 마음이 있다. 물론 나 같은 무명한 소인이 에베레스트로 비유되는 그를 따라간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멀게 느껴지지만 20대 중반 청교도영성훈련원을 만들어 전국에 시골교회와 개척교회 목사들을 불러 모으고 정치하는 목사들을 동원하여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성령운동을 펼친 전광훈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과 제3의 물결과 신사도운동 등으로 혼란하던 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난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는 전광훈으로 물들어 있어서 예배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고 교회에 갈 때도 영적인 혼탁함에 힘겨운 신음을 했었다. 그때 에드워즈의 그 어려운 신앙감정론은 나에게 한 줄기 빛이었고 힘이었으며 바른 신학을 갖고 참된 신앙을 추구하게 하는 출발점이요 목표점이 되었다. 신앙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교회는 무엇인지, 목회자는 무엇인지 검은 커튼이 제거되어지는 경험을 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것들의 비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출간된 교수님의 이 책 또한 밑줄 그어가며 열심히 보았다. 그리고 10년 후 오늘 다시 보게 되니 그 의미와 가치는 여전히 살아있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더 많은 유익과 도전과 성찰을 준다. 에드워즈는 칼빈과 여러 개혁주의자의 전통을 따라 삼위의 사역과 구속 그리고 성령의 역할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은 성령을 구속에 있어서 더 우위를 둔다는 것이고 삼위의 구속사역의 복과 결정체로 성령을 말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과 이신칭의로 주어지는 전가 교리에서 성령의 사역도 이 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성령이 어떻게 역사되어지는 그의 부흥론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성령론을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논문을 통해 파악되어지는 그의 성령론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영적인 일에 활력을 불어넣어 이전보다 더 경건한 일에 힘쓰고 기도와 찬송과 예배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의 눈에 들어왔던 공동체적인 성령의 역사는, 물론 개인적인 역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영이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거룩을 추구하게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평화의 일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흥의 때에 각자의 일상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오히려 에드워즈는 절제하고 탐욕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살기에 그런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회심과 구속에 있어서 전적인 성령의 주권을 강조한다. 회심 시에 영혼은 새로운 본성으로 변하고 영적인 원리와 하늘에 대한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회심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중요한 주제였고 이 회심을 경험한 자가 믿음을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본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비신자들과 아직 교인 수준에 머무르는 자들에게 회심을 위해 준비하고 열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인류의 창조보다 한 영혼의 회심이 더욱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창조시에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던 세력이 없었지만 타락과 함께 구속을 향해 달려가는 역사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큰일에 거대한 세력이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을 죄의 세력에서부터 건져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니 첫 창조보다 회심은 더욱 존귀한 일인 것이다.
필자가 이 시대에 이 책이 더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바로 영혼의 변화와 회심이다. 부흥의 때에 나타났던 은혜로운 사건은 불신자가 신자가 된다는 것도 있었지만 메마르고 냉랭하고 철 같은 마음을 가졌던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불타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차갑고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고 교회를 습관처럼 다녔던 자들이 깨어나고 교회가 각성하여 세상을 섬기는 손과 발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지식만 추구하는 메마르고 건조한 신앙의 모습과 반대로 지식 없고 분별없이 열광적으로 박수만 치는 극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닮아가는 신앙의 모습이 다양하기에 구원이 없다라고까지 말할 수 없겠지만 과연 거기에 구원이 있을까라고 의심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에드워즈는 개인의 영혼의 상태와 신앙의 수준을 점검하여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는 기준과 나침반이 된다.
에드워즈 당시에도 찰스 촌시를 중심으로 하는 반부흥론파와 제임스 데븐포트를 중심으로 하는 열광주의 사이에서 그는 균형잡힌 부흥론과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고 기준을 세우게 된다. 그러하듯 에드워즈를 통해서 현대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과 사역을 고치고 개혁할 수 있고 목사의 신학도 정립하여 건강한 교회를 세워갈 수 있다. 또한 한 성도로서 하늘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로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또 하나는 에드워즈는 한 영혼의 회심이 내면의 변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변화와 공동체와 사회의 회복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령론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오해가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고 이타적이고 사회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예배에 목숨 걸었기에 정부의 방역지침에 순응할 수 없고 탄압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믿음의 선배인 에드워즈는 어떻게 말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에드워즈는 회심된 영혼은 열매를 통해서 그의 진실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만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허물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학은 거짓 신학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교회를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로 세우는 것이며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회심은 영혼을 독하게 하고 고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게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보이는 목사와 성도의 모습은 잘못된 성령을 받아 거짓 회심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성령님은 부끄러워하시고 수줍어하시는 거룩한 영이신데 직통계시와 개인의 성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 때문에 성령님이 거칠고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영이 되고 말았다.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악령의 역사로 비춰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광화문에서 성령님의 역사라고 모였는데 누가 과연 그 현장을 은혜와 축복의 장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에드워즈는 삼위하나님의 사회성과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할과 활동과 연합에 있어서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다. 삼위의 언약과 구속의 사역 그 자체로 주어진 축복인 성령님께서 개인의 변화를 넘어 사회와 관계의 변화까지 이루어 가신다. 내재적인 삼위일체론과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의 균형잡힌 연합을 본다. 그의 성령론을 통해 이 시대 교회의 성령론을 점검해본다.
끝으로 약 삼백년 전에 책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옛날 신학자를 오늘날 스승으로 삼아서 교훈과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과연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 믿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선배들에게 함몰되어서 그들을 맹종하고 근거 없이 추종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과제는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오늘날 더 성경을 근본으로 하여 이 시대의 맥락에서 신실하고 적실하게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백년 전에 위대한 인물이 우리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연구하여 모든 것의 기준을 성경으로 삼았던 그가 우리에게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안내한다. 신비한 체험과 다양한 은사를 강조하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믿음으로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성숙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변질된 시절에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