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삶의 곳곳에서 “그럼에도”라는 역전의 장미
후우카 김의 저서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은 일본인 작가처럼 보이는데 번역자가 없다. 후우카 김은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다. 한국 이름은 순분, 그런데 후우카, 풍향(風香, 바람의 향기), 후우카 김이다. 그의 남편의 블로그에는 “그녀에게 항상 향기가 있다. 사랑과 그리움, 애틋함과 따스함의 향기가 있다. 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왠지 모른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라는 글이 있기도 하다.
후우카 김은 자기 자신을 ‘간서치(看書癡)’라고 소개한다. 간서치는 “지나치게 책을 읽는 데만 열중하거나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엄청난 장서를 자랑하는 장서가들이 있는데, 그분들께는 간서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간서치하면 책과 함께 초가집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여인이 ‘간서치’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모습이 고난의 인생을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저린다. 남편도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간서치인데, 아내까지 간서치라고 하니 웃고픈 모습이다.
후우카 김 작가의 소개의 글에서 저서 전체를 그려지게 하고, 한 여인으로 깊은 심상까지 엿볼 수 있다. 대가족을 이루고 있고, 교육전도사로 사역 중이다. 남편과 함께 책을 쓰고 사진을 찍는 글을 쓰는 삶, 그 글쓰기의 결실이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이다.
후우카 김, 일본과 한국의 두 문화 경험, 재혼하여 두 가족이 만난 삶, 그런데 책과 사진으로 하나가 되어 역경 과정 속에서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치유와 회복으로 가는 삶은 보통 사람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역경의 삶에서 나온 글, 그래서 그럼에도.... 눈부신 계절....
"자서전적 에세이"라고 하고 싶다. 어린 생애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첫 작품인 것 같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 와서 살게 된 사연이 있다. 1장은 “장미는 왜가 없다. 그것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앙켈루스 셀레시우스의 글로 시작한다. 운명, 그 자체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표현이다. 삶을 기계론적이나 비관적인 운명론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성경과 인문학 그리고 자기의 삶이 함께 융화된 글이다. 그런 상황을 겪었던 교회, 작가의 고난의 삶의 현장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부조리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모든 조건을 아름다움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결코 부조리가 되지 않는다.
글쓰기를 훈련하는 학생으로서 후우카 김의 글쓰기에 감동을 받는다. 역경의 삶에서 글쓰기를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간서치의 필력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산뜻하고 세련된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후우카 김의 글은 잔잔하게 내려가며, 삶의 역경을 담은 담담한 글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고구마나 슬픔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고백처럼, 담력처럼... “그럼에도 ~~”가 있을 것이다. 저자와 함께 글을 진행하면 슬픔을 뚫고 올라온 장미꽃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학은 영상의 빠름에서 느낄 수 없는 깊고 잔잔한 감동이 있다.
에세이가 극적인 드라마가 쉽지 않은데, 저자가 역경에 삶에서 글을 쓰니 자연스럽게 드라마가 있는 에세이가 되었다. ‘후우카 김’의 글이 아닌 ‘순분’의 글을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