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저자거리에서의 말씀묵상의 순례

1. 2009년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인 관계로 부목사로서 주일설교를 가끔 한 일이 있었는데 설교해야할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그 즈음에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로 그에 대한 언급을 설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정도로 언급을 하게 됐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나오시는 성도들과 인사하는 데 한 분이 정치적으로 한쪽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런 오해가 조금이나마 생길까봐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애도정도만 언급을 했는데....
설교는 정치적 견해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사건에 대한 언급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것 자체가 정치적 판단과 편향성이 되는 걸까?
2. 오랫동안 매일 큐티 후에 그 말씀묵상한 것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는데 말씀묵상을 통해 현재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느낀 것을 적기도 하는데 개인묵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블로그에 옮기다보니까 되도록 표현을 절제해 올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요 며칠 그것에 대해 댓글로 항의어린 표현을 쓰는 분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편향적이라고까지 하는 분도 있었다. 나의 개인묵상이고 말씀묵상 속에서 이것이 말씀에 비추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는 것을 설교가 아니라 말씀묵상에 적은 것인데...
말씀묵상은 현실과 유리되어져야만 하는 걸까? 그럼 개인적 삶의 적용도 불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3. 중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읽다가 말씀에 대한 간단한 단상을 조그마한 수첩에 간혹가다 적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 일학년ㅡ때 모 선교단체에서 큐티에 대해 기본적인 방법을 배웠지만 매일 큐티를 하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쯤 모 교회대학부 신입반 교육때 큐티에 대한 성경공부를 한 이후인데, 그때부터 큐티를 거의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형식적이었다. 대학부 수련회 때 짧은 구절을 가지고 깊은 강해 설교를 하는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 후 큐티는 상당히 깊어졌고 그 이후 30여년 동안 큐티로만 성경을 몇 번 묵상하게 되었다. 매일성경에 큐티한 내용을 프린트해서 붙이다가 인터넷에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페이스북 등으로 이사를 하면서 옮기게 되었고 그 큐티 내용만으로도 비록 부족하지만 설교를 준비할 때 기초자료로서 성경전체를 아우르는 설교의 내 개인 기본 주석과 강해집이 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자랑을 위함이 아니라 내게 있어서 말씀 묵상이 내 신앙과 사역의 중심이 됨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신앙이 아무리 바닥을 쳐도 그 말씀묵상이 내게 일종의 마지노선 역할과 밑바닥의 지지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내겐 중요하다.
4. 부교역자 시절 내게 가장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간중 하나는 새벽기도회 설교였다. 집이 인천이고 교회는 마포구 성산동이었고 부목사 몇 년은 담임목사님의 투병으로 상당수를 혼자 감당해야 했었는데 그럼에도 그 시간은 내게 소중할 뿐만 아니라 기쁨의 시간이었다. 당시 새벽기도회 설교는 당일 매일성경본문으로 하다 보니 성경본문이 무엇이건 그 본문으로 강해설교를 한다는 측면에서 설교 훈련이 되기도 했지만 그날 설교를 통해서 개인적 묵상, 교회적 묵상, 사회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그 묵상들과 설교들이 개인적으로 너무나 시의적절하고 실제적인 깨달음과 적용점을 주셔서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었다(어떤 때 그 말씀들은 새벽기도 참석한 분들에게도 그렇게 아주 실제적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무슨 점궤 같은 인도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큐티의 단점으로 꼽히곤 하는 주관적 묵상과 적용으로 말씀에 대한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묵상과 설교를 하려 노력하면서도 하나님이 나의 ‘삶의 정황’ 속에서 주시는 개인적인 말씀과 인도는 큐티를 기본으로 하는 새벽기도를 하는 이들이라면 느낄 수 있는 축복이리라.
5. 이번에 읽은 ‘나를 넘어서는 성경묵상(옥명호, 비아토르)’은 나와는 또 다른 측면으로 또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결의 은혜를 말씀묵상을 통해 느낀 저자의 책이라는 측면에서 반갑고 은혜롭고 또 부러운 책이었다. 보수적 신앙과 불의한 현대사의 양 기둥 속에서 대학과 청년시절을 보낸 저자의 고민은 내게도 주어진 고민이기도 했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고민했던 저자의 모습은 모태신앙으로서 전통적 신앙의 길을 벗어남 없이 살았던 내 자신이(심지어 가장 보수적인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신앙의 기본을 접했던 나로서)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와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룬 표성흠의 토우를 접하면서 훌륭한 대통령과 아름다운 대학민국이란 연극 세트가 무너지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고 교회에 갇혀있던 신앙과 아 불의함이 어떻게 연결되어질 수 있는지의 고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었다. 세상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성경은 말하는 듯하지만 그 권력이 불의할 경우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교회에서 생각하지 않는 시대 속에서 그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도 그러한 갈등과 고민을 더 치열하게 행했고 또 그 화두를 결국 하나님과의 대면과 말씀에서 찾아 걸어간다. 그러기에 그러한 싸움은 ‘나를 넘어서는 성경묵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당시의 불의한 정권을 넘어 나름의 민주화 과정을 거친 이후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이 책에서는 이어진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악,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으로 채우고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명찰을 달았지만 실제는 거짓 선지자이거나 말씀을 가감하는 유혹에 현혹되곤 하는 설교자와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싸움을 이 책에서는 담는다.
하지만 그 싸움을 저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순례길에서 다양한 이들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처럼 수많은 순례자들의 책을 통해 저자는 힘을 얻고 길을 찾는다(이 책에서 언급된 다양한 많은 책들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많은 도전을 받을 듯 싶다).
그런 것 같다. 내 자신도 성경이 내게 가장 중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경을 보는 눈을 더욱 확장시켜주는 것은 어떤 때 꼭 전통적인 신학서적이나 신앙도서를 넘어 다양한 스팩트럼의 신학과 일반 서적과 심지어 만화, 영화, 잡지의 한줄 속에서도 도움을 받곤 한다. 그것이 성경 속에서 다시 재해석되어지고 그 빛을 더함을 경험한다. 우리는 성경을 들고 세상을 걸어가는 이이다. 서재 속에만 갇힌 성경연구는 어쩌면 천성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요나나 베드로처럼 초막을 짓는 행위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서재에서 성경공부가 아니라 졸고 있는 목회자일지도 모른다. 바브라 유르겐센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에서 이야기한 쉬르들르 부인이 성경책을 귀히 여기지만 서재에 보존만 하려는 어리석음처럼 그런 신앙 속에서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신: 이 책은 기독교출판사에서 주목할 만한 세 출판사가 힘을 합쳐 낸 귀한 작품이다. 필력과 묵상에서 뛰어나신 잉클링즈의 옥명호 대표의 글에 편집이라면 최고이신 이현주 대표가 책을 편집하시고 이 세 출판사중 가장 많은 책을 내신 비아토르의 김도완 대표가 책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