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새로운 목회자가 오고 있다
새로운 목회자가 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포스트-성장’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며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위치를 재정비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회가 예수님이 펼치셨던 치유와 가르침과 축귀의 사역을 이어가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대형화되고 상업화되고 기업화된 교회는 과연 성경적일까? 그렇다고 소형화되고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에도 “부익부빈익빈”이라는 극심한 양극화가 있듯 교회도 심각한 양극화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소수의 대형교회와 그 교회의 목사들을 보며 목사는 부유하고 잘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0%도 안되는 교회와 목회자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지 나머지의 목회자들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찌들리게 가난하고 목회를 포기할 정도로 소명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의 사례와 처우를 보아도 분명하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경제적이고 복지적인 차이를 보면 괴리감과 박탈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따른 책임과 권위와 무게감을 인정하여 대우가 다른 것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누가 봐도 상대적인 소외감과 비상식적인 격차는 교회는 무엇이고 목회자는 누구인지 고민하게 된다. 교회가 기업이고 이윤을 위한 공장이라면 이해가 되어도 그것과 상관없는 생명공동체라면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교회의 성장이 멈추었고 교인의 수도 줄고 반면에 목회자는 넘친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어느 교단은 대대적인 프로젝트로 동행기도회도 하고 신학교마다 여러 가지 연구와 세미나도 열리고 교회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 우리나라 경제의 부흥과 함께했던 교회의 부흥은 멈추었고 산업과 문화의 성장과 함께했던 교회의 성장은 정지를 넘어 하향선을 그리고 있다.
교회의 수요와 목회자 공급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교단 신학교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대부분 운영을 하니 학생들이 줄어드는 것에 불안해한다. 기본적인 소양과 실력과 자격을 갖춘 자들을 엄격하게 선별해야 하는데 이미 대량화 되어서 기본과정만 이수하면 5-6년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 안수 후에는 전임교역자로 교회의 직원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가 그들을 다 받아줄 수가 없다. 게다가 비인가 신학교에서도 많은 목사가 배출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목회자가 다른 일을 선택하여 이중직을 겸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부름을 따라 목회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중대형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들은 다른 일을 가질 수 없다. 합당한 사례를 주어서라기보다 그에 따른 사역량이 많기 때문이다. 새벽기도부터 교회에 나가서 정해진 심방과 일과를 감당하고 저녁에 심방까지 있는 날은 10시가 되어 퇴근한다. 그리고 다음날 또 새벽기도회에 나간다.
그러니 이런 중대형교회에 목회자들은 이중직은 가질 수가 없다. 사역과 목회를 은혜롭고 능력있게 감당하기 위한 기도시간과 말씀준비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있는데 이중직은 꿈에도 꿀 수 없다. 이 고귀하지만 힘들고 무겁게 여겨지는 소명이 주는 부담감과 중압감을 늘 지니고 살아간다. 게다가 정말 바쁘고 쉼없이 돌아갈 때는 삼디 업종에 근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외 작은 교회나 미자립교회에서 목회하는 분들과 경제적인 자립이 안되는 목회자들은 다른 직업을 택하여 가정을 꾸리고 소명을 이어간다. 이들이 실력이 미천하거나 목회적 소명이 부족하고 믿음도 약해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따른 양극화 현상과 교단의 무(無)대안과 교회의 어긋난 가치관 등으로 살아갈 길이 막힌 것이다. 누가 그들을 향해 소명이 부족하고 노력을 안해서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목회자들 중에는 교회를 섬기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자들이 있다. 여러 가지 중독에 허덕이는 자들도 있고 성경지식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없이 목회한다고 달려든 자들이 있다. 자신의 상처에 얽매여 사람을 품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자신이 괴로워 동역자들을 괴롭히고 교회를 힘들게 하는 자들도 있다. 순수하고 선한 마음이 아니라 불순하고 세속적 욕망으로 교회를 섬기는 직원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이중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교회를 섬기는 자들 중에도 있다. 그렇다고 이중직을 선택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고 기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벼랑 끝에 몰려 있으니 기존 목회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목회 외에 다른 일을 선택하게 한 것일까? 저자는 이것을 인류학적으로 풀어간다.
인류학적 접근이라고 하여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고 우리나라 역사적 배경과 교회의 배경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아울러 일하는 목회자들의 인터뷰와 현실을 조사하여 그들의 의식과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이 연구와 노력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핵심부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연구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내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고민과 대안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필자는 저자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일하는 목회자가 죄도 아니고 이들이 목회생태계를 흐리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왕좌에 앉아서 교회를 기업화하고 교회를 독점하여 권력화하는 목회자가 더 문제이고 여러 성적인 문제와 무속적이고 비성경적인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가 더 목회환경을 더 어렵게 한다. 목회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이중직이 아니라 세속에 찌든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직을 가진 자들을 향해 정죄하고 비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를 허무는 자라는 판단은 섣부른 생각이다. 물론 이중직에 있는 자들도 루터의 만인제사장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 또한 목회라고 주장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 루터는 직업의 평등과 만인제사장을 주장했지만 목사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는 막중한 사명과 책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목사의 고유성과 사명은 유효하기에 이것을 일반직업으로 연결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는 이중직을 선택하는 자들이, 그들의 인터뷰와 함께, 새로운 교회를 원해서라고 한다. 기존 교회의 불합리함과 모순과 문제를 벗어나 평등하고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회는 안전한 교회이고 교회에서 안전한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교회는 목회자가 경제적으로 독립되어야지만 가능한 것일까?
재정적 독립과 관련된 여러 사례들을 저자는 모아놓았고 저자 또한 이 경제적 자립을 안전한 교회로서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목사가 이중직을 겸해서 교회로부터 손을 벌리지 않고 교회의 헌금으로 사례를 받지 않으며 자신의 은사로 재정을 채워가며 사역하면 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자신의 수입으로 교회에 헌금하고 사역하면 교회가 더 안전해질까?
필자는 이중직에 대한 문제와 연구와 그들의 아픔과 우리의 현실을 보며 충분히 공감하고 아픔도 느낀다. 그리고 이중직을 하고 있는 목회자와 나라는 목사도 별반 차이 없는 자이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들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다. 오히려 기존 교회의 문제와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교회를 원하고 자신의 은사와 노동으로 생을 살아가는 그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또한 이중직을 겸하며 찾아오는 여러 가지 환멸과 비난과 정체성 혼란이 있음에도 꿋꿋하게 버텨가는 그들을 공감하며 오히려 힘내주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길 응원한다. 저자도 ‘이중직 목회자’보다는 ‘일하는 목회자’라는 표현을 쓰며 이들이 ‘포스트-성장’ 한국교회에 돌파구를 열어줄 대안이라고 한다. 외부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개혁을 끌어낼 수 있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러나 과연 새로운 교회와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 인격적인 교회는 목회자가 재정적인 독립을 하면 이루어진다는 인터뷰들과 저자의 생각은 약간 나이브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돈으로 인해 목회자들이 너무 신음하고 교회 또한 재정에 있어서 합리적이지 못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예상한다. 목회자가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구조와 목회자에 대한 잘못된 기대 또한 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안전한 교회는 목회자의 재정 독립으로 성립되지 않고 인격적인 교회는 목회자의 재정 확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것만큼 세속적이고 비인격적인 교회가 없는 것 같다. 교회가 목회자에게 사례를 줄 능력이 없으니 돈을 버시며 목회하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교회는 재정독립으로 성립되지 않고 목양으로 성립되는 곳이고 재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양관계로 세워지는 곳이다.
교회라는 곳은 바른 목양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세우신 목회자를 통해 교회와 성도에게 전달되고 그 말씀 앞에 교회는 변화하는 곳이다. 목회자는 그 일을 위해 부름받았고 그것을 위해 생명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에 성도들이 우리 목회자가 돈을 벌어와 헌금하기를 원한다면 교회일까? 성도들이 목회자의 재정독립을 지원해주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라고 한다면 성경적인 교회일까?
끝으로 우리의 교회가 얼마나 무너졌고 정도를 벗어났으면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일하는 목회자’를 향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아무도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없다. 교회의 가장자리에 있지만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목회자가 은사와 실력을 겸비하여 다른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중직이 문제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고 고뇌하며 그 자리까지 몰리게 된 원인을 알아야한다.
‘일하는 목회자’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회의 대안이 될까? 저자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이 중요한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안은 아닌 것 같다. 교회의 대안은 일하는 목회자가 아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바른 목양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여 시대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 ‘포스트-성장’, ‘포스트-코로나’의 시기에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