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바울의 새 관점으로 본 칭의란 무엇인가?
바울의 새 관점에 불을 지핀 스텐달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부담스럽다. 잠시 틈이 나서 Th.M 과정에 들어가 한 학기 내내 ‘바울의 새 관점’과 제2성전기 문헌에 빠져 있었을 때 스텐달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어디 스텐달뿐이겠는가. E.P 샌더스는 비롯해, 제임스 던, 톰 라이트까지 오고 나면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른다. 특히 톰 라이트의 책들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방대하다 보니 시작이 불가능하다. 불행히 하필이면 그해 바울의 새 관점에 종지부를 찍겠다며 <바울과 선물>을 쓴 존 M. G. 바클레이까지 등장했으니 할 말을 잃었다. <바울과 선물>은 바클레이가 기존의 ‘바울의 새 관점’의 약점을 보완하여 ‘선물’이란 주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재해석했다. 거두절미하고 <바울과 선물>에서는 ‘상응성’이란 단어가 기억하면 될 것 같다. 즉 선물은 공짜지만 사실은 공짜가 아니라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당시의 선물의 사회적 의미로 하나님의 은혜를 해석한 것이다. 물론 반대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바클레이의 개념은 기존의 바울의 새 관점 주의자들의 개념을 보완하는 동시에 새롭게 바라도록 돕고 있다.
바울의 새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제임스 던의 <바울에 관한 새 관점>도 2018년 감은사에서 번역 출판한 적이 있다. '바울의 새 관점'을 아직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필자의 어눌함이 있기는 하지만 제임스의 책은 지금까지의 바울의 새 관점 주의자들의 다양성과 일치성을 가장 명확하게 구분한 책이라고 본다. 2018년 알맹e를 통해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국내 처음으로 완역본으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부담스럽게도 이러한 책들은 작게는 수백 페이지에서 많게는 천 페이지가 수월하게 넘어가는 책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적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지만 새 관점과 헌 관점?이 충동하는 가운데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부담은 이들의 논쟁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거나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 져야 한다.
스텐달은 한마디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 불을 지른 사람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첫 장에 실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이란 작은 에세이가 스텐달이 불을 지른 성냥이다. 논문도 아닌 작은 에세이 하나가 당대 바울 연구의 최고의 거장이었던 에른스트 케제만을 퇴물(退物)이 되게 만들었다. 스텐달은 이 책을 통해 바울이 언급한 칭의의 개념을 재해석한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루터에 의해 정점에 다다른 칭의는 심리학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바울이 말한 칭의는 자기내향적 개념이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이방인의 입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즉 칭의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스텐달을 계승한 E.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잘 드러나 있다. E.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40주년 기념판의 서문을 쓴 마크 챈시 교수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성경학계에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처럼 출간 직후는 물론이요 이후에도 계속하여 영향을 미친 책은 드물다. E.P 샌더스는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에 이르는 기간에 나온 팔레스타인 유대교 텍스트 중 우리가 사실상 입수할 수 있는 모든 텍스트-랍비 문헌 중 초기 자료, 이제까지 출간된 사해 사본, 이 연구에 가장 적합한 외경과 위경-를 샅샅이 조사함으로써 이전에 분명 어떤 신약학자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대목은 소위 제2성전기 문헌이라 불리는 고대 문헌을 최대한 끌어모아 연구했다는 점이다. 샌더스의 목적은 바울이 살았던 1세기 전후의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배경, 사회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바울의 서신들을 읽기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이다. 물론 이후 제임스 던과 같은 다른 새 관점 학자들에게도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샌더스는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엄청난 과업을 달성한 것을 분명하다.
다시 스텐달로 돌아가 보자. 그는 이 책에서 루터 중심의 바울 읽기는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루터는 죄에 대한 심각한 예민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자책하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는 바울 서신에 담긴 ‘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야말로 자신을 죄인인 동시에 의인으로 보게 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칭의 개념이 ‘서구의 성찰적 양심’이라고 스텐달을 말한다. 스텐달은 이러한 루터적 칭의 개념은 바울이 말하려 했던 칭의를 왜곡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체험을 회심이나 개종이 아니라 ‘소명’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개종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유대인으로 남았고, 율법을 지켜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정결 의식을 행한다. 또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울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초기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스텐달을 비롯한 이후 새 관점 주의자들은 1세가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살펴 바울의 칭의 개념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결혼 관계를 통해 ‘선한 율법과 악한 죄를 구별하는’(193쪽) 논증을 도구로 사용한 것을 ‘바울의 인간론의 핵심 진리를 이루는 틀’(193쪽)로 왜곡 시켰다고 말한다. 스텐달은 칭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다른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을 보강하는 것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심판과 자비’이다. 심판의 자비 사이에 ‘회개(메타노니아)’가 있다. 서구적 관점은 회개를 개인과 심리적 관점으로 보고 자신 안에 있는 죄책의 문제로 보았다. 하지만 성경은 관계로 보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받을 일이 생각나면 제사를 중단하고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그다음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뿐 아니라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마 6:12) 달라고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가 아니가 이 땅에서 먼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스텐달은 정확하게 ‘회개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반응하는 행동’(210쪽)이라고 말한다.
책을 두 번이나 읽었지만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책의 서두에 김선용의 해제를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스텐달의 주장은 여러 부분에서 동의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스텐달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과도하게 개인적이고 심리학적 측면으로 제한시키고 평가 절하한 부분을 공동체적으로 해석하도록 추동(推動) 한다. 큰 강을 하나 건는 듯한 쾌감을 선물하지만 내용을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여전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