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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령을 기대하자
초자연적 삶을 살라/신디 제이콥스/쉐키나기획/[김정완]
가정주부에서 성령사역자로 변화된 저자가 독특한 제목의 책을 들고 나왔다. 그는 이 책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치유의 역사가 계속되는 현장을 가감 없이 증언하고 있다. 실제 그를 통해 드러난 치유 뿐만 아니라 근세사에 기록된 치유의 역사를 수록해 놓음으로써 그것이 현 시대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현상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천 명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기록이 수두룩하고, 또한 여러 곳에서 각기 수천 명이 치유받은 사실이 분명히 있는데 왜 그 동안 보도되지 않았을까?
특정 매체에 소개됐음에도 부주의해서 보지 못했거나, 평소 그런 기사에 관심을 두지 않은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개인적인 차원의 부주의나 무관심 탓으로 돌릴 수만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내 안에 똬리를 튼 그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기성교단의 관념과 풍토에 관한 것이다. 책에 비친 기성 교단의 관념과 통념을 두 가지로 풀어 보았다.
첫째, 저자가 책에 밝힌 바와 같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특히 방언)에 이물감을 드러내는 통념에 관한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일회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보수 교단에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교단과 사람에 대해 낯선 시선을 던진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기도원이 때아닌 특수를 맞은 70년대 말 교회마다 수련회 장소로 기도원을 택했고, 기도원은 교인들로 연중 북새통을 이뤘다. '수련회는 기도원에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연상될 정도였으니 그 열풍은 지금 강남의 아파트 열풍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매일 수차례씩 열리는 집회마다 열정적인 찬송소리와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성령 받으라, 는 단상의 메시지가 고요 속에 묻힌 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려댔다.
성령의 은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교회를 휩쓸었다. 교회에선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게 목격됐고, 그것에 비례해서 그들의 행동을 으아스럽게 바라보던 교인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것이 3, 4년이 지나면서부터 악령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기도원 운영자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과 갈망 또한 시들어갔다. 동시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방언은 낯선 것의 대명사처럼 됐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수 교단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 낯선 시선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강단을 통해 강물처럼 흐르는 한편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은 성령의 역사에 관한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기가 쉽지 않은 현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 또한 보수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해온 터라 성령의 은사에 관한 한 배타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탓에 책을 펼쳐들면서부터 이물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수 십 페이지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도 '혹시 잘못된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경계심과 '저자에게 체험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는 적극적 수용의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성령의 은사에 관해 세세하게 가르치지 않는 교단의 풍토에 관한 것이다. 현재 교단은 크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와 여타 교단으로 분기돼 있다. 특정 부분의 입장 차이가 그런 분기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일정 부분 그런 입장 차로 인해 상호 견제에 의한 질적 성장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교단에 뚜렷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현 시점에서 어느 교단이 옳고 어느 교단이 그르다 하는 식의 판단은 본질을 흐리기 쉽다. 본 리뷰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교단의 풍토에 한정해 이야기를 끌고 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제한적인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이 두어 개 교회에서 목격한 바를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의 전반적 양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가 경험한 교회가 모두 장로교라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 교단의 풍토에 견줘 다른 교단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언설도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본류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교단은 달라도 그 중심은 하나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이 비춰주는 바를 따라 순전한 양처럼 걸음을 딛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택할 바다.
교단의 방침과 주의가 성경을 재단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주의와 방침이 그 교단에 속한 교인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정화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물론 몽학선생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몽학선생에게 학생을 비인격적으로 다룰 권리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전인격적인 교육이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이 책은 워크북처럼 활용할 수 있다. 성령을 갈망하고 그 역사를 위해 기도했다면 각 장의 말미에 수록된 '나의 성령 체험기'에 기록할 수 있다. '나의 성령 체험기'에는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한 질문이 있어 읽은 내용을 귀납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해당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간편하다.
중요한 것은 기록 자체에 있기 보다 기록을 하는 심정에서 오는 '기대'에 있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내게 어떻게 임할지 기대하는 마음,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초자연적 삶'의 바탕이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11-13)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라 해서 그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령의 은사가 마가의 다락방처럼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만 남아 있다고 보는 한 그것을 구한다는 것부터가 부질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엄연히 동일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면 달리 봐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의 제한적인 생각과 행태로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지 못한다면 반쪽 자리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교인이 능력있게 살지 못하는지, 교회에서 돌이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수가 또 왜 그리도 많은지에 관한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의 능력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아보지지 않으려는 태도와 구체적으로 성령을 구하지 않는 태도는 어딘지 어색하다.
물론 악한 영을 분별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과 그렇게 때문에 미혹 당하기 쉽지 않겠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런 항변은 실제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해 나온 항변이기도 해서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성경 말씀이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음에도 내가 그 초대를 거부하고 있다면 서글픈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모두를 성령이 초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
성령을 기대하자. 초자연적인 삶 가운데로 인도하실 성령을 기대하자.
저자 신디 제이콥스 (Cindy Jacobs)
영적 전투와 중보기도를 훈련시키는 '중보의 용사들'이라는 선교단체의 대표이다. Women's Aglow Fellowship의 국제자문으로 활동중이다.
가정주부에서 성령사역자로 변화된 저자가 독특한 제목의 책을 들고 나왔다. 그는 이 책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치유의 역사가 계속되는 현장을 가감 없이 증언하고 있다. 실제 그를 통해 드러난 치유 뿐만 아니라 근세사에 기록된 치유의 역사를 수록해 놓음으로써 그것이 현 시대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현상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천 명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기록이 수두룩하고, 또한 여러 곳에서 각기 수천 명이 치유받은 사실이 분명히 있는데 왜 그 동안 보도되지 않았을까?
특정 매체에 소개됐음에도 부주의해서 보지 못했거나, 평소 그런 기사에 관심을 두지 않은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개인적인 차원의 부주의나 무관심 탓으로 돌릴 수만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내 안에 똬리를 튼 그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기성교단의 관념과 풍토에 관한 것이다. 책에 비친 기성 교단의 관념과 통념을 두 가지로 풀어 보았다.
첫째, 저자가 책에 밝힌 바와 같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특히 방언)에 이물감을 드러내는 통념에 관한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일회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보수 교단에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교단과 사람에 대해 낯선 시선을 던진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기도원이 때아닌 특수를 맞은 70년대 말 교회마다 수련회 장소로 기도원을 택했고, 기도원은 교인들로 연중 북새통을 이뤘다. '수련회는 기도원에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연상될 정도였으니 그 열풍은 지금 강남의 아파트 열풍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매일 수차례씩 열리는 집회마다 열정적인 찬송소리와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성령 받으라, 는 단상의 메시지가 고요 속에 묻힌 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려댔다.
성령의 은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교회를 휩쓸었다. 교회에선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게 목격됐고, 그것에 비례해서 그들의 행동을 으아스럽게 바라보던 교인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것이 3, 4년이 지나면서부터 악령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기도원 운영자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과 갈망 또한 시들어갔다. 동시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방언은 낯선 것의 대명사처럼 됐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수 교단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 낯선 시선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강단을 통해 강물처럼 흐르는 한편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은 성령의 역사에 관한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기가 쉽지 않은 현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 또한 보수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해온 터라 성령의 은사에 관한 한 배타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탓에 책을 펼쳐들면서부터 이물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수 십 페이지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도 '혹시 잘못된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경계심과 '저자에게 체험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는 적극적 수용의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성령의 은사에 관해 세세하게 가르치지 않는 교단의 풍토에 관한 것이다. 현재 교단은 크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와 여타 교단으로 분기돼 있다. 특정 부분의 입장 차이가 그런 분기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일정 부분 그런 입장 차로 인해 상호 견제에 의한 질적 성장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교단에 뚜렷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현 시점에서 어느 교단이 옳고 어느 교단이 그르다 하는 식의 판단은 본질을 흐리기 쉽다. 본 리뷰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교단의 풍토에 한정해 이야기를 끌고 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제한적인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이 두어 개 교회에서 목격한 바를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의 전반적 양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가 경험한 교회가 모두 장로교라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 교단의 풍토에 견줘 다른 교단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언설도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본류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교단은 달라도 그 중심은 하나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이 비춰주는 바를 따라 순전한 양처럼 걸음을 딛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택할 바다.
교단의 방침과 주의가 성경을 재단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주의와 방침이 그 교단에 속한 교인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정화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물론 몽학선생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몽학선생에게 학생을 비인격적으로 다룰 권리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전인격적인 교육이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이 책은 워크북처럼 활용할 수 있다. 성령을 갈망하고 그 역사를 위해 기도했다면 각 장의 말미에 수록된 '나의 성령 체험기'에 기록할 수 있다. '나의 성령 체험기'에는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한 질문이 있어 읽은 내용을 귀납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해당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간편하다.
중요한 것은 기록 자체에 있기 보다 기록을 하는 심정에서 오는 '기대'에 있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내게 어떻게 임할지 기대하는 마음,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초자연적 삶'의 바탕이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11-13)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라 해서 그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령의 은사가 마가의 다락방처럼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만 남아 있다고 보는 한 그것을 구한다는 것부터가 부질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엄연히 동일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면 달리 봐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의 제한적인 생각과 행태로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지 못한다면 반쪽 자리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교인이 능력있게 살지 못하는지, 교회에서 돌이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수가 또 왜 그리도 많은지에 관한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의 능력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아보지지 않으려는 태도와 구체적으로 성령을 구하지 않는 태도는 어딘지 어색하다.
물론 악한 영을 분별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과 그렇게 때문에 미혹 당하기 쉽지 않겠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런 항변은 실제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해 나온 항변이기도 해서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성경 말씀이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음에도 내가 그 초대를 거부하고 있다면 서글픈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모두를 성령이 초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
성령을 기대하자. 초자연적인 삶 가운데로 인도하실 성령을 기대하자.
저자 신디 제이콥스 (Cindy Jacobs)
영적 전투와 중보기도를 훈련시키는 '중보의 용사들'이라는 선교단체의 대표이다. Women's Aglow Fellowship의 국제자문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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