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본 탈교회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
미카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가 우연히 읽게 된 책의 내용 이야기와 교감을 이룬다는 것을 느끼다가 그 책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런데 책 속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그 여정을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며 자신이 누군인지 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이번에 읽은 <하나님의 나그네된 교회들에게>(김승환, 비타토르)는 바스티안의 모습과 고민처럼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의 정체성의 상실과 갈등의 문제를 현 시대의 대표적 신학자라 할수 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여러 저작을 통해 분석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는 듯하다.
저자는 탈교회 시대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교회가 그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원인을 분석한다. 바스티안처럼 교회가 자기의 이야기로 품어야 할 ‘예수님의 이야기’를 잃어가며 다른 이야기로 그 자리를 대치해가고 변질시켜 나가는 문제를 지적하며 ‘예수님의 이야기’를 회복해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그저 이것을 말함으로 옳고 그름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 이야기에서 말하는 덕을 공동체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요새 주목받는 공공신학의 접근방식이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한 시도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시도가 될 수 있으며 결국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 교회를 맞추려는 시도가 될 수 있고 그것은 교회가 본연의 역할과 사명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교회다움의 구별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이러한 교회다움은 각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야 함을 말한다. 개인의 신실한 제자됨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시대가 주장하는 각 개인으로 살아가고 성공해야 한다는 세속의 신화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를 추구하면 할수록 나를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진정한 좋은 성품은 탁월한 사회제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각 개인들이 서로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공신학도 교회의 입지를 드러내기 위해 복음과 예수님 이야기를 말하지만 그것은 세속적 언어와 기준으로 증명하려 하기에 결국 하나의 세속종교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이 된다고 말한다. 공공신학이 말하는 충성된 제자도도 세속적인 수준 있는 시민의식으로 대치하는 잘못된 시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정체성의 드러냄은 콘스탄티누스 주의처럼 체제와 시스템을 통한 국가종교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교회가 세상을 잘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존재나 역할이 아니라 교회 없이는 세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에 교회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평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도 어떤 운동을 넘어 과정 안에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세상이 추구하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비폭력 평화주의는 그 평화를 이루어가는 데에 있어서 아주 느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었던 것처럼 장애인들과의 식사를 할 때 그들이 식사하는 속도에 맞추는 것은 아주 느리고 답답하게 여겨진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의 여정의 속도는 군인의 속도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이들의 속도에 맞추어야 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고 공공신학을 교회의 책무로 여기는 것은 결국 성도가 자신의 정체성, 곧 예수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말한다. 이러한 정체성을 깨달을 때 세례와 성찬은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저자는 스텐리 하우어워스를 통해 탈교회의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그 길을 제시한다.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꼭 정답일 수는 없지만 한국교회의 고민에 대한 하나의 도움을 더할 수 있을 듯싶다. 그렇지만 이 고민을 위해서는 이 책에서 계속 제기하는 공공신학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있어야 할 듯싶다. 이 시대 상당히 주목받는 공공신학이 그저 교회에 한때 부는 일시적 시대의 바람일지를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공공신학을 주장하는 분들은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추신: <한나의 아이>에서도 나타나지만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성추문으로 논란을 겪는 존 하워드 요더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듯싶다. 신학자의 신학적 성취와 그 인격적 문제와 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요더에 대해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좀더 분명한 언급과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그의 책에 과문(寡聞)함에서 오는 무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