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묵상] 현대 복음주의에 대한 재고 - 아더 핑크

이종수 | 2003.08.20 17:05
A.W. 핑크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 위에 기초를 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지금 가스펠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 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빠져  있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남의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멋진 찬양, 유모 있는 익살, 재미있는 예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영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으로 비통한 오열을 토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그저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일까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그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 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거짓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이 존귀히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는 안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증거되었나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 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29절).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30절). 일곱째,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영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따로 도와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간수의 그러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방향제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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