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조정의초등학교 5학년 때 유평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2007년 유평교회에서 보내심을 받아 미국 아이오와 주에 있는 엠마오 성경 대학교에서 성경공부 일년 코스를 마치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LA에 있는 The Master’s Seminary(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쳤습니다. 2013년 6월부터 유평교회에서 청년회교사와 주일설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유평교회 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내 김선미 자매와 2008년 결혼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강해서인 <야고보서>와 칼럼집 <정직한 크리스천의 솔직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조정의 | 2020.01.30 14:51



“긍휼”이라는 단어는 생각만 해도 은혜롭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전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33:19). 지긋지긋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왜 버리지 않으셨는지 느헤미야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단지 버리지 않으신 것만이 긍휼의 전부가 아니다. 주님은 “크신 긍휼로…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다(느 9:19). 또한 하나님은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느 9:27).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은 새 언약의 백성에게 더욱 넘쳤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신자의 구원에는 그들의 행위가 조금도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신자의 거룩한 삶 역시 긍휼하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나님의 긍휼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긍휼이 새 언약의 백성을 택하신 동기였다.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께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동행하는 강력한 이유였다.

긍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긍휼”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긍휼’(ἐλεήμων)은 신약성경에 두 번 등장하는데, 마태복음 5장 7절 본문 외에 히브리서 2장 17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도 이 단어는 대부분 ‘자비’, ‘은혜’를 의미하며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한다(출 22:27; 34:6; 대하 30:9; 시 85:15; 102:8; 110:4).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주석에서 마태복음 5장 7절을 심도 있게 다루는데, ‘긍휼’은 구약의 헤세드(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긍휼’은 고통받은 자를 돕는 것, 도움이 필요한 자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존 맥아더, 마태복음 1-7장, 맥아더 신약 성경 주석, 190페이지).

당신은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운 경험이 있는가?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는가?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얼마 안 되지만 기꺼이 모금함에 돈을 낸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에 이르려면, 불의한 동기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참 ‘긍휼’은 나의 이름을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마음, 선을 베풀어 후에 무언가 이득을 보려는 생각 등이 하나도 없는, 오직 어려움에 처한 이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또한 긍휼은 마음에서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긍휼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긍휼에 관하여 “단지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 단지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주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거절당한 자를 사랑하고, 대적을 용서하며, 고독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존 맥아더, 마태복음 1-7장, 맥아더 신약 성경 주석, 190페이지).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긍휼’은 바른 동기와 실질적 행동을 수반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긍휼’을 언제나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은 긍휼이 없는 사람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 그렇다면 당신은 긍휼히 여기는 자인가? 야고보는 더 공격적으로 이렇게 몰아붙인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그러면 이제 ‘긍휼이 좀 없으면 어때?’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팔복의 모든 약속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그 복을 얻기에 얼마나 충분하지 못한 상태인지 똑똑히 보여준다. 우리 마음은 세상의 많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님에게 부요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애통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온유하게 행동하는 데 실패하고, 의를 추구할 때도 있지만 거기에 굶주리거나 목말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긍휼을 간간이 베풀지만, 순수한 동기와 실천적인 행동으로 긍휼을 신실하게(상대방의 반응과 관계없이) 베푸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기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꼼짝없이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 아래 멸망 당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수평적인 관계 속에 긍휼을 눈곱만큼도 성실하게 베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받은 긍휼에 대한 마땅한 도리를 다했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긍휼을 맛보기 원한다면, 먼저 당신의 긍휼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기 바란다. 죄인이 무거운 자기 죄의 빚 앞에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손을 내밀 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신다. 문제는 자신의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긍휼한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이유가 없다. 당신에게 긍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주심으로 당신에 대한 자기의 사랑, 그 크신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그분의 긍휼하심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긍휼 없음을 자백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긍휼히 여기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팔복은 그들의 정체성, 그들이 주와 선생으로 따르고 있는 분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땅히 긍휼히 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병자들의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 14:14).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무리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들을 직접 먹이셨다(마 15:32). 예수님은 두 맹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고 고쳐주셨고(마 20:34), 초상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셨다(눅 7:13).

바쁘고 피곤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환난 중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긍휼의 마음과 실천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할 제자들의 마땅한 삶이다.

한 두 번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삶의 한 가지 특징이 되도록, 긍휼이 그 사람을 가리키는 하나의 성품과 행실이 되도록 계속해서 신실하게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 천국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한다(골 3:12). 그런 자에게 무슨 복이 있는가?

당신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모든 복의 근원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에 그렇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다(벧전 2:10).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이 이미 ‘긍휼을 얻은 자’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구원을 단번에 획득하는 자격증처럼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된 은혜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졌다. 미래의 약속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하나님에 의해 선포되었기 때문에 현재 아직 그 긍휼의 풍성함을 다 맛보지 않았지만 신자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서 신자는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아가야 하고, 그런 뚜렷한 제자의 삶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 자임을 자신과 세상 가운데 확증하게 된다. 그런 자에게만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 영원한 자비와 사랑을 맛볼 미래가 현실로 찾아올 것이다. 제자가 보여준 긍휼한 삶을 평가하여 그에 따라 긍휼로 보상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제자는 선생이신 그리스도의 긍휼을 따라 세상 속에 긍휼을 베풂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은 자임을 명백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참된 신자는 긍휼한 자로서 살아가고, 그런 자만이 긍휼을 얻은 자라는 것이다.

결론: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생은 안개처럼 사라진다. 사람은 진토에 불과한 존재다.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죽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병균에 노출되면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다. 이런 연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남들보다 더 뛰어난 구석이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왜 긍휼을 베푸시는가? 죄의 질병에 걸려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외아들을 내어주셨을까?

다윗처럼 우린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 긍휼에 감사하고 그 긍휼을 찬양하며 그 긍휼의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기뻐한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을 삶으로 베푸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해 지금 이 땅에 아버지의 긍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긍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세상에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 긍휼의 손을 직접 내밀어라.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을 대신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전달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그런 자에게 복이 있으니,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51개(2/3페이지)
편집자 칼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1 [조정의 칼럼] 하나님식 자녀 양육법 Part 1 사진 첨부파일 조정의 2022.05.06 08:07
30 [조정의 칼럼] 5가지 사랑의 언어 그리고 MBTI 조정의 2022.04.26 21:20
29 [조정의 칼럼] 크리스마스 위드 코로나, 영혼의 치료자를 만나기를 조정의 2021.12.19 00:16
28 [조정의 칼럼]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5): 정치를 논할 때 이렇게는 하지 말자 조정의 2021.06.14 10:39
27 [조정의 칼럼]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4) 정치를 논할 때 하나님 인정하기 조정의 2021.06.07 11:33
26 [조정의 칼럼]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3) 정치를 논할 때는 무신론자가 돼야 하는 조정의 2021.05.31 12:03
25 [조정의 칼럼]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2) 한쪽 이야기만 듣기 조정의 2021.05.24 09:42
24 [조정의 칼럼]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1) 세 도끼 모델 사진 첨부파일 조정의 2021.05.17 10:53
23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6) - 주의 만찬 조정의 2021.05.10 10:16
22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5): 교제 조정의 2021.05.03 09:37
21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4): 봉사 조정의 2021.04.26 10:31
20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3): 기도 조정의 2021.04.19 09:11
19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2): 말씀 조정의 2021.04.12 09:40
18 [조정의 칼럼] 대면예배의 가치-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들(1): 찬양 조정의 2021.04.05 09:27
17 [조정의 칼럼] 코로나와 언약(5):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한마디 한다면 조정의 2021.03.29 11:05
16 [조정의 칼럼] 코로나와 언약(4):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다윗이 한마디 한다면 조정의 2021.03.22 10:06
15 [조정의 칼럼] 코로나와 언약(3):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모세가 한마디 한다면 조정의 2021.03.15 09:19
14 [조정의 칼럼] 코로나와 언약(2):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노아가 한마디 한다면 조정의 2021.03.08 15:37
13 [조정의 칼럼] 코로나와 언약(1):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아담이 한마디 한다면 조정의 2021.02.10 11:15
12 [조정의 칼럼] 팔복(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사진 첨부파일 조정의 2020.02.21 08:1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