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나상엽스무 살 어린 시절 만나 20여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한 아내의 남편, 10대에 접어드는 예쁘면서도 드센 두 아들의 아빠로, 지금 경기도 안성의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머리 굵어가고 얼굴 두꺼워지는 중학생 아이들과 성경과 문학, 아름다운 우리 주님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자라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인해, 이제껏 기독교 문서사역과 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함께 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또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기대하며 따르기 소원합니다.
귀 기울이는 총명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기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1
‘벌써?’인가요 아니면 ‘뭘 새삼스럽게’인가요? 12월말입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보여주는 숫자들은 왠지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숫자에만 불과할 뿐, 짧게라도 매일의 기록을 담아내는 수첩이나 종이 다이어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세월의 질감이 전해지지 않아 아쉽습니다. 잡아두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낸 날들의 기록이 더 많은 2024년도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헛헛하기만 합니다. 이맘 때 늘 그랬듯 서점에 들를 때마다 잠깐이나마 내년도 다이어리 판매 코너를 기웃기웃하는 마음을 다들 아시겠습니다.
이러다 금세 2025년도라며 떠들썩하게 새해가 와버리면 또 정신없이 새날을 맞이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기어이 단 하루라도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자신을 정돈하는 고요한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해보긴 합니다. 안 그러다가는 시간과 그 안에 있는 선물 같은 기회를 고스란히 내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시간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이 ‘총명’이라고 시인 윤동주는 벌써 젊은 날에 노래했더군요.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 나는 총명했던가요.’ (윤동주, ‘흰 그림자’ 중에서)
2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들끓던 선교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2년의 시간은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날들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야 만날 수 있다 해도, 찾아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만날 수 없고, 먼 데서 들려오는 소식들에 안타까운 마음을 쓸어내릴 따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계속된다면 대부분 영적인 하락과 퇴보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고, 그렇게 된다 해도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며 얼마든지 이유를 댈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어떠한 장애나 부자유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활달한 자유가 잔뜩 깃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비록 그는 가택 연금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달음질하고 있었으며(살후 3:1), 전혀 매이지 않았습니다(딤후 2:9). 한술 더 떠 그는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말을 하기까지 합니다.
“...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14)
갇혀 있음에도 여전히 달려가는 삶이라니요!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는 사실이었으며 오늘날 비록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으나 도리어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갇혀 있었기에 단순한 삶을 살았겠고, 갇혀 있었기에 오히려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귀에 담을 수 있었기에, 갇혀 있었기에 삶에서 들려오는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총명했겠습니다.
3
올해도 많이 바쁘셨지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숨 가빴던 우리의 지난 날도 푯대를 향해 달려갔다 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 삶의 부르심을 향해 단 한 걸음이라도 분명한 전진이었는지는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한 최선의 달리기였는지 말입니다.
“천천히 가는 것을 두려워마라. 다만 멈춰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라[不怕慢, 只怕站(부파만 즈파짠)]”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걸어도 됩니다. 쉬엄쉬엄이어도 됩니다. 조금 느려도, 천천히 왔어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힘겨워 주저앉았던 때도 있었겠지요. 어쩌면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는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 역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또 사랑하는 청년들과 함께 오늘 여기에 또 있는 것이니까요.
에이브러햄 링컨도 이렇게 말했다지요.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돌아가지는 않습니다. I am a slow walker, but I never walk back.”
2024년 한 해, 충분히 눈길 주지 못하고 마음 쓰지 못해 아쉬운 점도 많았겠지만, 그런 중에도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열매를 맺으셨겠습니다. 또 우리의 걸음을 굳게 하시고 인도하셨겠고 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내년도에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시편 48:14). 다만 그 인도하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총명이 우리에게 있기를, 그리하여 그 발자취를 따라 푯대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 우리의 날을 계수하며 세월을 아끼는 우리가 되길 바랄 따름인 것입니다. 한해가 저무는 이 때에, 우리 모두에게 이 신령한 지혜를 더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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