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방영민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부흥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개혁주의를 추구하며 작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목회자

교회의 영광

방영민 | 2016.03.0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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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물이 화려하고 구조가 탁월하다고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 규모와 크기가 세계최고라고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많이 있고 재정적으로도 튼튼하다고 영광인 것도 더더욱 아니다.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안에서 죽었던 생명이 날아나는 것이다. 이 은혜는 사람의 감정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전인을 변화시키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이 은혜는 결코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너무나 감당할 수 없고 무거운 은혜를 쉽게 취급한다. 편한 자리에 앉아 따뜻한 분위기와 좋은 음악이 들리면 은혜를 받은 것처럼 착각한다. 또는 속상한 일이나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속을 다 풀어 기도를 해서 감정이 시원해지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이상하게 변질시킨다.

 

게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은혜를 받고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현실을 한 번 진단해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 교회 속에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생각을 모아본다.

 

은혜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인가? 살아갈 힘이 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어려움이 있는 자에게 뛰어넘을 수 있는 담대함을 주는 것인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품게 해주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를 주는 것인가? 물론 이런 부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무거운 영역이다. 큰 바위 같고 감당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이 정도 수준의 은혜를 은혜의 전부인 양 그렇게 알고 이해하고 만족하려고 한다.

 

그렇다보니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한 가지 현상은 이런 삶의 조건과 나의 현재 모습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 간절하게 은혜를 달라고 열렬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울부짖음이 강할수록 느껴지고 다가오는 은혜가 짜릿하게 느껴진다. 더 외칠수록 더 울수록 그분의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적인 동기가 더 부여되고 나의 열심으로 그 은혜를 가져다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정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이방종교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는 결코 인간의 상태와 열정으로 받을 수 있는게 아니다. 이 은혜는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간절함을 무시하는건 절대 아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이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더 간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변하지 삶의 조건과 나의 모습을 보면 거룩한 은혜를 무시하는 태도다. 그저 큰 은혜 없어도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상황에 따라 적응하며 살면된다는 염세적이면서도 게으른 태도이다. 감정이 흔들리는 것은 좋은데 의지가 요동하려면 힘이 너무 들어 포기하게 되고 그래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다보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좋다가도 식상하게 되고 급기야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든다. 너무나 기독교의 본질과 사상을 놓친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식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대하는 말씀과 그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신앙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산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다. 하나님의 원리를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여기에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져 있다. 바로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와 그렇게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감정에 달린 것도 아니고 결코 식상한 것이 아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새롭게한다.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하며 하나님께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이 되게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 새로운 정신세계를 가지고 변화된 존재가 하나님의 기쁨이란 말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지정의를 통해서 전인격적으로 영향을 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이다. 성경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구절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 마음이란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 이 지성의 이해와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의 감정이 영향을 받고 의지가 작동한다.

 

그런데 타락한 본성이 책보기를 싫어하고 듣기를 싫어한다. 놀고 자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이런 깨달음의 과정을 싫어하고 근본적으로 힘들어한다. 그래서 무엇을 느끼려고만 하고 쉽게 은혜를 받으려고만 한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변화가 없고 삶의 변화가 미미하고 신앙생활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성을 새롭게하시는 이 하나님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며 이것을 안다해도 이것이 어려우니 쉬운 것을 택하려는 우리의 악함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진리의 체계를 통하여 지성의 깨달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우리의 진리의 체계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저 파편적인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흔적을 가지고 논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인간은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게 되고 자신의 원리를 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지성의 깨달음이 없어도 쉽게 받을 수 있고 편하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왜곡된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으로 은혜를 생각하고 있는가? 참된 은혜를 모르는가? 너무나 가볍게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다.

 

한 번의 메시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건 너무나 쉽다. 사람은 가르치는대로 반응하기에 체험적인 신앙을 위해 무엇이든 말하고 실행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은혜가 아니다. 순간은 변화가 있는 것 같고 분위기가 좋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될 때마다 곁길로 가고 삶에 직면하는 다양한 순간마다 일관된 선택을 못한다. 신앙의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새로운 정신세계가 되지 못하였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과거의 칭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칭의가 진실하다면 새로운 정신세계로 새롭게 되기 위해 부단히 은혜를 구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분명히 지성의 깨달음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은혜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참된목자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 구약에서 신약에 걸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목자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하신다. 참된 목자는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만난 경험과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서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가 있지만 정작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어주어 양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받은 은혜를 가지고 체험하여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목자가 얼마나 있을까? 실용적이고 당장에 필요한 것만 구하며 일회용적인 말씀 선포와 목회가 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우리의 감정만을 위한게 아닌데 인간의 기분만을 맞추기 위하여 목양하고 있는건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어쩌면 목사의 입장에서 이런 하나님의 원리를 깊게 이해하고 연구하여 분명한 진리체계를 잘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피상적인 신앙생활과 은혜의 겉핥기가 성도들에게 일어난건 아닌지 목사인 나에게 큰 찔림으로 자문해본다.

 

교회는 우정이 충만한 곳이 아니다. 취미와 공동의 관심사로 모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종교심을 위해서도 세워지고 모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이고 그 진리는 지성의 깨달음을 주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한다.

 

참된 목자는 이런 하나님의 원리를 깨달아 교회가 진리로 가득하고 큰 은혜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도록 양들을 돌봐야한다. 선한 목자는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부단히 갈고 닦아야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한 신학자를 넘어 사상가가 되어서 시대의 문제 앞에 기독적인 답도 던져주어야한다. 그래서 시대의 도전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에 이런 참된 목자가 있어야한다.

 

원리를 기억하라

글을 마무리하며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내가 교제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새새명이 심기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그분을 안다. 이 안다는 것은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이다. 바로 지성의 깨달음을 통한 감정과 움직임과 의지의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원리는 늘 우리의 지성에 지식을 심어주셔서 우리의 고집과 본성을 깨드린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도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사모한다. 우리의 복은 환경의 변화와 성공신화와 번영신학이 아니다. 이 원리를 통한 교제의 삶이며 변화의 삶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우리의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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