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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거룩한 여정
하나님을 향한 여정/프레드릭 뷰크너/요단/[이민영]
아름답다. 자전적인 산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슬프다. 이 책을 읽은 후 몇 달-이제 해가 바뀌었다- 동안이 책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어 애 써 봤지만 그저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무채색의 과거에 색을 입히지도 않았다. 과거의 기억은 애틋하기 마련이지만 애틋함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가 그려주고 있는 삶 속에 스며있는 그 하나님을 내가 알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나 보다. 아니, 그것만도 아니다. 이토록 눈부신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은, 유한의 시간 속에 신비하게 빛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언어를 발견해 내는데 그가 겸손히 골몰하기 때문인가 보다.
물결처럼 고요히 흐르며 때로 슬픔의 격랑으로, 기쁨의 파도로 변하여 나를 압도한다. 그의 글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목소리 높이지 않으며 잔잔히 스쳐가지만 나의 마음에 엄청난 흔적을 남긴다. 책을 읽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 오후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고요하게 다가오며 나를 감싸던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이따금 책장을 휘리릭 넘기기만 해도 스치는 문장들이 가슴을 찌른다.(다시 꼼꼼하게 읽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서 난 왜 가슴이 아플까. 아주 오래 전 시인의 시에서 느꼈던 그 슬픔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일어난다.
.......
바로 당신
내 안의 나인 당신
왜 여태 몰랐었을까.
당신 안의 나인 나를
왜 여태
몰랐을까.
......
어떻게 나는 이제까지 그것을
까맣게 몰랐고
못 믿었을까
목수여.
'聖內在'(부분)-박두진
그렇다. 이제야 알았다는 한탄인가 보다. 뒤늦게야 알았다는 슬픔인가 보다. 더 일찍 알아야 했는데 나의 어리석음과 둔함이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은 그 여정을 계속 이끌어 오셨음을 바라보는 슬픔이다. 아니, 긴장이 풀어지면 슬픔이 밀려오듯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열렸다는 안도감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삶이 그렇고 시인의 삶이 그렇듯.
내 곁에 계신 그 빛을 향해 무지함으로 거부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억지로 억지로 주께 굴복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고 싶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의 기다리심 때문에.
감사한다. 이 책을 읽는 순간을 주신 하나님께,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해 주신 이에게. 특히 이 아름다운 글을 번역하느라 고군분투했을 역자에게. 어떤 곳에서는 더 애를 썼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른 이의 모국어가 이만큼 아름답게 전달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친절한 설명의 의역보다 원제목대로 '거룩한 여정(The Sacred Journey)'이 좋다. 저자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삶의 순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여정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거룩한 여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게다. 흔적없이, 도드라지지 않는 그 은혜의 모음들로 채워진 순간들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는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아니, 마음 깊이에 영원을 향한 갈망은 있었겠지만 이 여정을 시작하신 이는 그 분이시기에 그 갈망조차도 그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도 결국 알게 되는 것은 그 분이 먼저 더욱 절실하게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이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 않으셨기에 '거룩한 여정'이다.
이 책은 이미 그 하나님을 발견한 이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감으로 감사와 기쁨을 얻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작부터 자신의 여행에 함께 하신 그 분을 아직은 모르지만 삶을 겸손히 걸어가는 그런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 속에도 또한 스며있는 하나님의 알파벳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발을 내딛게 되면 그들도 고백하게 되리라. 인생은 단지 시간을 통과하는 여정이 아니더라고.
(나는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정말 바라건대 빨리 나오지 않아도 좋다. 오래오래 시간과 마음들여 잘 번역된 책이면 좋겠다. 너무나 성의없이 번역된 책들에 분노를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아름답다. 자전적인 산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슬프다. 이 책을 읽은 후 몇 달-이제 해가 바뀌었다- 동안이 책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어 애 써 봤지만 그저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무채색의 과거에 색을 입히지도 않았다. 과거의 기억은 애틋하기 마련이지만 애틋함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가 그려주고 있는 삶 속에 스며있는 그 하나님을 내가 알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나 보다. 아니, 그것만도 아니다. 이토록 눈부신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은, 유한의 시간 속에 신비하게 빛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언어를 발견해 내는데 그가 겸손히 골몰하기 때문인가 보다.
물결처럼 고요히 흐르며 때로 슬픔의 격랑으로, 기쁨의 파도로 변하여 나를 압도한다. 그의 글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목소리 높이지 않으며 잔잔히 스쳐가지만 나의 마음에 엄청난 흔적을 남긴다. 책을 읽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 오후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고요하게 다가오며 나를 감싸던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이따금 책장을 휘리릭 넘기기만 해도 스치는 문장들이 가슴을 찌른다.(다시 꼼꼼하게 읽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서 난 왜 가슴이 아플까. 아주 오래 전 시인의 시에서 느꼈던 그 슬픔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일어난다.
.......
바로 당신
내 안의 나인 당신
왜 여태 몰랐었을까.
당신 안의 나인 나를
왜 여태
몰랐을까.
......
어떻게 나는 이제까지 그것을
까맣게 몰랐고
못 믿었을까
목수여.
'聖內在'(부분)-박두진
그렇다. 이제야 알았다는 한탄인가 보다. 뒤늦게야 알았다는 슬픔인가 보다. 더 일찍 알아야 했는데 나의 어리석음과 둔함이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은 그 여정을 계속 이끌어 오셨음을 바라보는 슬픔이다. 아니, 긴장이 풀어지면 슬픔이 밀려오듯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열렸다는 안도감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삶이 그렇고 시인의 삶이 그렇듯.
내 곁에 계신 그 빛을 향해 무지함으로 거부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억지로 억지로 주께 굴복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고 싶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의 기다리심 때문에.
감사한다. 이 책을 읽는 순간을 주신 하나님께,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해 주신 이에게. 특히 이 아름다운 글을 번역하느라 고군분투했을 역자에게. 어떤 곳에서는 더 애를 썼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른 이의 모국어가 이만큼 아름답게 전달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친절한 설명의 의역보다 원제목대로 '거룩한 여정(The Sacred Journey)'이 좋다. 저자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삶의 순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여정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거룩한 여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게다. 흔적없이, 도드라지지 않는 그 은혜의 모음들로 채워진 순간들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는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아니, 마음 깊이에 영원을 향한 갈망은 있었겠지만 이 여정을 시작하신 이는 그 분이시기에 그 갈망조차도 그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도 결국 알게 되는 것은 그 분이 먼저 더욱 절실하게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이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 않으셨기에 '거룩한 여정'이다.
이 책은 이미 그 하나님을 발견한 이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감으로 감사와 기쁨을 얻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작부터 자신의 여행에 함께 하신 그 분을 아직은 모르지만 삶을 겸손히 걸어가는 그런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 속에도 또한 스며있는 하나님의 알파벳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발을 내딛게 되면 그들도 고백하게 되리라. 인생은 단지 시간을 통과하는 여정이 아니더라고.
(나는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정말 바라건대 빨리 나오지 않아도 좋다. 오래오래 시간과 마음들여 잘 번역된 책이면 좋겠다. 너무나 성의없이 번역된 책들에 분노를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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