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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사도신경 강해 1

김재윤 | 2004.08.02 22:20


사도신경 강해1


윌리엄 퍼킨스 지음 / 개혁된신앙사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는 대륙의 개혁신학을 영국에 정착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한 청교도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특히나 루터, 칼빈, 블링거와 베자 등의 신학을 소화해서 영국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참된 교회의 표식은 사변적인 신학과 외적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설교 사역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교리와 실천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단순히 사변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풍성하면서도 냉철한 주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Ⅰ. 믿음

믿음은 신경의 고백과 근거가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동의하고 신뢰한다.” 왜냐하면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일반적인 속성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히 11:1).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을 의롭게 하는 믿음과 일시적인 믿음과 기적들에 대한 믿음으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이 실상이라는 의미는 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수많은 약속들에 대해 현재 누리지 못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들이 마치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이 증거라는 의미는 비록 어떤 일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이 마치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믿음은 두 종류 곧 일반적인 믿음과 택자의 믿음으로 구분된다. 바울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하나님의 택자의 믿음으로 사도가 되었으며, 이 믿음은 또한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다. 첫째로, 일반적인 믿음은 택자와 유기자가 모두 가지는 믿음이며, 이것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로, 역사적인 믿음인데, 그것은 사람이 말씀의 외적인 문자나 역사를 믿을 때 갖게 된다. 이 믿음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이 지식에 대한 동의이다. 이런 믿음은 심지어 귀신과 그의 영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일시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잠시 머물러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또 다시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일시적인 믿음은 그 안에 세 가지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복음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셋째, 그것에 대해 고백하지만 더 이상은 나가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일시적인 믿음은 그 안에 다섯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말씀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다. 셋째, 그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다. 넷째, 그 말씀을 내적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섯째, 그 말씀으로 인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지만 그 믿음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일시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첫째 원인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결한 동기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가지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성경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둘째 원인은, 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부어주시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온갖 종류의 은혜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한다.
일시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는 세 번째 원인은 세상적인 유익이나 부를 얻고자하는 것이다. 그가 종교를 선택하거나 거절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복음이 구원을 주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와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인다. 바로 이것들이 일시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는 세 가지 원인들이다.

셋째로, 기적들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약속이나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고 예견하는 특별하고 기이한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날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역사적인 믿음과 일시적인 믿음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의 믿음을 가지고 있던 마술사 시몬은 기적에 대한 믿음도 가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돈을 주고 사도들의 명성을 사고자 했다(행 8:19).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적에 대한 믿음은 유다의 경우에서처럼 위선자들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악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이 그리스도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붸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마 7:22, 고전 13:2).

믿음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약속과, 이 약속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로 정의된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갱신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 이후에 죄인들의 회심을 통해서 마음에 비로소 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마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일종의 특별한 지식이거나 설득이기 때문이며,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는 설득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은 약속을 붙잡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갈 3:14)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그를 “믿는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요 1:12).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붙잡는다는 것은 사람이 손을 내밀어 어떤 것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는 행동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영혼의 손인 믿음과 비슷하다.
믿음으로 붙잡는 것은 의지의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실하고 특별한 설득에 의해서 행해진다. 우리는 이 설득에 의해서 결심을 하게 되고 구원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설득은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일어나게 된다(고전 2:12).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보편적이던 약속은 사람에게 특별히 적용이 된다.
바로 이러한 행동에 의해서 구원하는 믿음은 다른 모든 종류의 믿음과 구별이 된다. 그것은 역사적인 믿음과 구별되는데, 이는 역사적인 믿음에는 전적으로 붙잡는 것이 없고 오직 일반적인 동의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일시적인 믿음과도 구별되는데, 이는 일시적인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고백하고 이를 즐거워하게 만들지만 철저히 그리스도와 그의 은덕을 적용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믿음은 사람의 양심에 이를 철저히 적용하지 않으며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동일한 선상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믿음의 핵심적인 주요 대상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와 같은 구원에 대한 약속이다.

Ⅱ. 하나님의 섭리

창조된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정한대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창조주”라고 말한다(벧전 4:19).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대장장이나 목수가 물건을 만든 뒤 내버려두는 것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에 따라 가장 현명하게 그들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섭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섭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의심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확증하기 위해 네 개의 논증을 사용할 것이다.

첫 번째는, 주사위를 던지는 것같이 우연처럼 보이는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처분에 속한 것이라는 성경의 증언이다(잠 16:33). 이것은 이성과 이해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통제받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잠 20:24).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는 기능을 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27).

두 번째 논증은, 자연의 모든 과정에 나타난 질서로부터 취해질 수 있다.
첫째, 먼저 가족 안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질서가 있다. 마찬가지로 마을에도, 도시에도, 지역에도, 국가에도 질서가 있다. 심지어 온 세상에도 질서가 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 나무들과 채소들과 들의 잔디들도 짐승들과 우양들을 위해 존재하며, 짐승들과 우양들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위에 있는 하늘은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 존재하며,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자신의 가장 현명한 섭리에 따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 논증은, 양심 특히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의 양심으로부터 취해진다. 살인을 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며, 법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설령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를 고소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심지어는 그가 두려움으로 제 정신을 잃게 될 것이고, 혹시 잠시 안식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공포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정죄나 두려움은 모든 피조물의 주이시며 모든 사람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두려운 심판이 미리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만일 양심이 사람의 잘못에 대해 정죄할 수 있다면, 양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더 잘 볼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마지막 논증은 이것이다. 다가올 일에 대한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불확실하거나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년 전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예언된 내용들이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확실히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섭리는 두 부분 곧 지식과 통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것이,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 언제가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라고 말한다(시 11:4). 그리고 또한 “그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신다”라고 말한다(시 113:6). 그리고 선지자 하나니는 아사에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신다”라고 말했다(대하 16:9). 그리고 야고보는 “세상의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아신다”라고 말한다(행 15:18). 이것은 우리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두 가지 의무를 감당하게 한다. 곧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며 주의 낯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시기” 때문이다(벧전 3:11,12). 둘째로, 이것은 선한 양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기” 때문이다(역대하 16:9).

통치는 하나님의 섭리의 두 번째 부분인데,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배열하시고 선하신 목적에 맞게 그것들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이나 땅에 있는 가장 작은 것 곧 참새나 소나 사람의 머리카락까지에도 해당되어야 한다(마 6:26, 신 25:5, 막 10:30).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곧 통치의 방법과 수단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통치의 방법은 그 대상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에 따라 다양하다. 선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창조이래로 남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본질은, 심지어 마귀들의 본질도 그 자체로는 선하다. 둘째로, 모든 피조물이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그들의 양과 질과 움직임과 행동과 성향은 선하다. 또한 선한 것은 자연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것이 있다. 자연적인 것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도덕적인 것은 도덕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지혜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것들을 두 가지 방법으로 통치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하고 보존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목적에 맞게 그들을 움직이신다. 해와 달과 별과 나무와 식물과 씨 등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움직이도록 힘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죽어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악은 본성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죄로 여겨지며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죄는 두 가지 행동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통치된다.
1. 죄를 짓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2. 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행동은 죄를 정당하게 허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이 있다.
1. 일반적인 것은 모든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마귀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섭리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자산이 창조할 때 설정해 놓은 질서를 계속해서 유지하신다. 그리고 그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본질과 존재를 종류대로 보존하신다.
2. 특별한 섭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와 자기의 선택된 백성에게 보여주시고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신 힘으로 지옥의 권세에 대항하여 그들을 모으시고, 인도하시고, 보존하신다(사 43:1,2, 슥 2:8).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의 왕국이라고 불려지는데,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일반적인 권능을 보이실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의 특별한 역사를 베푸신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다루었다. 이제 우리는 의무들에 대해 다루겠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2.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만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3. 이 땅에서 건강과 명예와 부와 평안과 기쁨과 같은 외적인 보존의 수단들이 풍부할 때, 우리는 감사하기를 기억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자기를 신실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 동안 자신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졌다. 그는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말한다(삼하 17:37).
5.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하기로 합법적으로 약속할 때,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며”이라는 조건을 집어넣거나 적어도 생각해야 한다.
6. 하나님의 섭리가 일상적인 수단들에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소명에 맞게 그것들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수단들이 부족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수단이 없으셔도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지만 그것들 밖에서 어떤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위로들에 대해 언급하겠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큰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귀와 악한 자들의 분노를 해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시 16:8).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기 때문에 두려워했을 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라고 말한다(창 45:7). 마찬가지로 다윗 왕은 자신의 군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돌을 던지려 할 때 크게 슬퍼하면서도 “자신의 주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했다”(삼상 30:6).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놀라운 평강과 위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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