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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회심을 위한 불같은 외침

김재윤 | 2004.04.01 17:29
회심을 위한 불같은 외침


찰스 스펄젼 / 지평서원  

이 책은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젼의 전도설교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복음적이고 전도적인 이 설교들에서 스펄젼 목사는 죄인의 비참함과 죄의 극악함, 죄인에게 임하는 지옥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혜택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잘 일깨워주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설교들 중의 한 편을 소개한다.

강론 :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복음을 어떻게 영접하는가? 그 대답은 믿음으로이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근거해서 행하는 것이다. 일부 청교도들은 믿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곤 하였다. 그것은 타당하지는 않지만 교훈적이다.

첫 번째 부분은 자아의 포기이다. 그것은 아마도 믿음 자체라기보다는 믿음을 받을 준비일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자아와 자기 자신의 선행을 의뢰하는 모든 것을 벗어난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의 두 번째 부분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세주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믿음의 세 번째 부분은 전용(轉用: 자기 것으로 삼음)이다. 사람은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약속하신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삼는다. 그 약속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즐거워한다. 확실히 자아의 포기, 의존, 최소한의 전용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가 축복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된 자들에게도 그와 꼭 같다.

Ⅰ.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 그와 꼭 같았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을 얻었다. 행위로나 육체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었다. 17절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읽는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데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것을 확고히 실제적으로 행했다.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는 저 멀리 갈대아 땅에 있었다. 그때 그는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즉시 앞으로 나아갔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 왔을 때에는 발붙일 만한 땅도 없었다. 장막을 치며 이리 저리 떠돌았다. 하지만 그가 나그네로 여행하고 있는 그 땅이 그 자신의 땅이 될 것을 지극히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일년이 가고 이년이 흐르고 세월이 자꾸 흘러갔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는 늙었고, 그의 아내도 늙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연령이 훨씬 지났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하녀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났지만, 그의 소망은 땅에 곤두박질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마엘에게 있지 않음을 계시 받았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도 육체의 편의를 따라 길을 잘못 걸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오래도록 끄는 약속을 실현시키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가 백세가 되고 사라가 구십 세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고, 엎드려서 거룩한 기쁨으로 웃었으며, 심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또한 이삭이 태어나고 자라났을 때, 그는 이삭에게서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었다. 여호와께서 이삭을 취하여 번제로 드리라고 그에게 명하였을 때에는 그는 그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수 있으심을 믿었다.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지키실 것을 믿었다.

자, 우리에게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약속들은 영감된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따금씩 구두(口頭)로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그 약속을 굳게 붙들고 그 약속에 의존하였다. 그가 세상의 후사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그 약속을 성취할 자손에 대한 징조나 증거가 없고, 의뢰할 만한 다른 아무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는 확신을 가질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만이 있으면 되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요점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 즉 메시아, 예수 우리 주님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주어진 언약의 모든 의미를 이해했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과 그를 인하여 열방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이해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땅의 열방들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그 기이한 말씀의 모든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저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것을 알았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이러한 저의 주장에 대한 권위 있는 증거가 된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아브라함이 늙고 기력이 쇠하고 아내는 구십 세가 되었고, 그가 아버지가 될 것 같은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도, 그는 자신이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온전히 믿었다. 그에게 그렇게 약속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 외에는 그렇게 믿을 다른 근거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우리가 보듯이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러 가지 난제들이야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형제 여러분, 그 형편들은 그 자체가 끔찍한 어려움 들이었다. 그 약속들이 자기를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과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한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지 그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지으셨음과,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셨음을 그가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는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음을 느꼈다. 그 자신의 나이가 자식을 낳을 나이가 지난 것과 그의 아내의 연령 또한 그러한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는 오직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만족을 느꼈다. 오, 얼마나 고귀한 믿음인가! 그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여납하실 만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부른 자들 외에는 하나님께 그런 믿음을 돌려드릴 자가 아무도 없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을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다. 저는 앞에서 20절 중반까지만 말씀드렸다. 이제 그 나머지 부분을 모두 읽어야겠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또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는 불경스럽게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신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자신의 종을 놀리시거나, 내일 철회할 것을 오늘 중얼거리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호와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하시지도 않으심을 그는 알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리를 찬양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하실 수 없으신 것은 말씀하시지 않으시며, 자신이 성취하실 수 있으신 것을 약속하셨음을 그는 확신하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과, 자주 자기의 팔보다도 해를 더욱 길게 늘이는 것은 연약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루시지 않으시겠는가? 여호와께서 어려워 못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아브라함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변함과 진리의 능력을 경배하며 믿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이 강하고 약하여지지 않는 믿음은 전적으로 여호와 한 분만을 의뢰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여러분이 21절을 읽으면 그러함을 알게 될 것이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그의 집에나, 그의 아내, 그 자신 또는 어떤 다른 것에서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오직 이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사람이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 그것뿐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표적이나, 징조나, 증표나, 지시 등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오직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였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종류의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분명하고 확실한 여호와의 말씀을 지지해 줄 다른 버팀대나 징조나, 표적이나, 증거나 도움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실행하실 것을 단순히 안다. 만물이 그 약속은 거짓말이라고 속삭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는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불변하심이 저지 당하거나 방해받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불가능을 조롱하고 불가능성에 경멸을 퍼붓는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그 말씀대로 된다. 재판장의 언도! 집행! 말씀하심! 성취! 지존자에게는 말씀하신 것이 곧 성취된 것이다.

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바로 그와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한다. 구원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으로 구원을 영접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을 때는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고, 그 약속을 의지한다. 이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적용되고, 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저 말씀이 적용된다. 그러나 지극히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감미로운 말씀에 우리의 소망을 두고 있고, 그 말씀을 우리 영의 정박소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살피고, 살핀 말씀을 자기 약속으로 취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약속은 참되다", "이 약속은 참되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약속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과 화목한 여러분 모두가 바로 그렇지 않는가?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큰 어려움을 다스리심을 믿는다.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힘이 들었다면, 무거운 죄짐을 지고 있는 연약한 죄인, 자신의 중한 죄를 인식하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를 벌하실 것을 의식하는 죄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자신에게 예언하는 희망찬 것들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범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기다리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캄캄하기만 할 때,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구속을 계획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사 죽게 하셨으며, 이제는 주에게 오도록 초청하시며, 하나님의 손에서 온전하고 완벽하고 즉각적인 사죄를 받을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복음의 메시지가 나와 같이 쓸모 없이 거역하는 자에게로 해당될 수 있겠는가?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가 복음이 선포하는 그런 놀라운 긍휼의 행위의 사실을 반대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죄에 상처 입은 마음으로 복음의 선포를 믿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은 그러한 모든 위협 속에서도 복음의 약속을 믿으며, 율법의 모든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약속을 믿는다. 놀란 영(靈)이 두려워 떠는 데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그 영으로 하여금 성부의 말씀을 영접할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화목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의 죄를 없이하신 것을 확신함으로 잠잠할 수 있도록 하신다.

동시에, 우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기적 즉, 중생을 믿는다. 그것을 믿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부모에게서 자식의 출생을 믿은 것만큼이나 위대한 믿음의 행위라고 여겨진다.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은 성화의 중생의 가능성을 믿는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 믿음은 예수님을 믿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죄를 이길 힘을 얻도록 한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만 더 살펴보도록 하자. 또 하나의 다른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을 안다. 이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일생동안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것같이 여겨지지 않는가? 그러나 그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할 것을 믿도록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속자에게 의탁한 것을 구속자께서 능히 지키실 것과, 그분께서 우리와 관련된 것을 온전히 이루실 것과,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손안에 두는 것으로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으실 것, 그리고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성취하실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신실한 자라 불릴 만하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도록 하자.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언젠가 우리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이 없이"(엡 5:27)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약속하신 분께서 능히 그렇게 이루실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영광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이것이 믿음이다-구속자의 기쁨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는 믿음, 그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구속자께서 사랑하셨고 생명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형제 여러분, 영광에 참여하는 그 일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개의치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은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다름없이 여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리로다"(고전 15:57).우리는 우리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께서 살아 계시기에 우리도 살 것과, 그분 있는 곳에 우리도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안다.

4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이 구원하는 믿음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듣는다-"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음과, 보통 사람이 죽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죽으셨음과 제 삼일 아침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은 우리가 못 믿을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기 때문에 죄로 죽은 우리도 또한 살리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범죄를 없이 하셨음을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대신 죽으신 주 예수의 대속 위에 서 있으며, 그 위에 견고히 서 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대속이 하나님께 열납 되셨고, 우리의 범죄함이 영원토록 제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 사실 위에 우리의 믿음이 서 있다. 믿는 자들 대신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을 하나님께 열납 하셨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의뢰하며, 그 길이 모든 신자들이 구원받게 되는 길이다.- 그 길뿐이며 어떤 다른 길도 없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처럼 우리도 믿는다. 그것이 믿음이다.

Ⅱ. 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정하셨는지 그 첫 번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약간의 업적을 쌓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도록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이 은혜에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축복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는 조금도 행위에 의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며 은혜가 더 이상 은혜 되지 못한다. 또 그것이 행위에 속한 것이라면 조금도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이 불과 물을 함께 조용히 섞어 둘 수 없듯이, 행위의 원칙과 값없는 긍휼의 원칙이 결코 함께 공존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를 은혜의 축복을 받는 조건으로 만들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즉시로 상반되는 모순적인 요소가 생겨나고, 실제로 그 영혼을 행위의 언약아래 놓아두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긍휼의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게 된다. 은혜와 믿음은 일치한다. 함께 동일한 마차를 끌 것이다. 그러나 은혜와 행위는 서로 서로 상반된다. 서로 반대편 방향으로 당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와 행위가 함께 멍에를 메도록 정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화합할 수 없는 재료들로 건축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조화되지 않는 회반죽을 바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으로는 금이고, 부분적으로는 진흙으로 구성된 형상을 만드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가 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가 은혜에 속한 것이다.

다시,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자.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받았던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이 은혜에 속하였던 것이 매우 명백하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구원을 그의 행위 탓으로 돌리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아브라함은 특별히 거룩한 사람이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 흠들이 있다-누구의 생애 속에서 허물이 발견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고 말한 바리새인과 관련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는 어느 사람이 저 위대한 족장 아브라함은 그런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칭호는 "무죄한 자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그를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고, 육체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약속에 따라서 약속된 자녀가 태어났음을 우리가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영생에 이르는 의가 철저히 은혜로 되어짐을 보게 된다. 우리가 약속들을 영접하는 그의 믿음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이 수많은 방법으로 설명된다. 아브라함의 거룩함은 그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축복 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 외의 다른 탓으로 결코 돌릴 수가 없다.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는 이 원칙은 인간의 공로를 언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믿는 자들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자들에 한한다.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온전히 확신하기까지 은혜 가운데서 성장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몸과 혼과 영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성결해질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좀더 확신케 되고자 논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 업적, 성취 등을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믿는 자는 자신의 말이나 감정의 상태를 감히 의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믿음으로 서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제가 여러분에게 권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9).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을 누리며 살고, 그 평강을 더욱 더 풍성케 하라. 너무 많은 평강을 누리게 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여러분이 자신의 부족함들을 인하여 스스로를 질책해야할 때에라도, 주님의 약속을 의심하지는 말라. 죄가 여러분을 압도하고, 허물을 고백해야 할 때에라도, 예수님께서 변함 없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사죄를 의심하지 말라. 사방으로서 통렬한 유혹들과 혹심한 시련들이 일어날 때에도, 그것들이 폭풍처럼 여러분을 휘몰아 가도록 허용하지 말라. 여러분의 영(靈)의 요새와 성(城)이 함락되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불신으로 말미암아 약속 앞에서 우물쭈물 하지 말라. 여러분이 대낮의 광명 속에서 행하거나 애굽에 임했던 흑암 중에서 행하든지 약속을 견고히 붙들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주님께서 또한 성취하실 수 있으시다. 그것을 의심하지 말라. 신실한 약속을 확실히 의지하라.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을 느낄 때에는 그럴수록 더욱 더 견고하게 약속을 의지하라. 왜냐하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여러분이 자신이 죄악됨을 더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여러분의 능력은 더욱 더 많아진다. 여러분이 죄의 최하부층에 화석처럼 묻혀서 누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아내실 수 있으시며, 그 무시무시한 구덩이에서 여러분을 끄집어내실 수 있으시며, 메마른 석고 같은 여러분의 마음이 생기가 돌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여러분이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모든 신자에게 하신 약속을 믿으라. 여러분도 그 약속을 굳게 붙들라. 그렇게 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여러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제가 아무런 기쁨이나 평강도 얻지 못한다면 어찌하는가?" 약속을 계속 믿으라. 그러면 기쁨과 평강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제가 아무런 표적도 보지 못하면 어찌 합니까?" 아무런 표적도 구하지 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 외의 다른 어떤 보장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믿으라. 그렇게 함으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여호와께서는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믿으라.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를 용서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 말씀을 견고히 붙들라. 그러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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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질학습과 영적성숙 이종수 2004.05.20 14:47
29 초대 언더우드선교사의 생애, 연세출판부,1991 강석천 2004.04.16 17:53
28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김재윤 2004.04.11 22:32
>> 회심을 위한 불같은 외침 김재윤 2004.04.01 17:29
26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김재윤 2004.03.12 10:13
25 천지 창조의 목적 김재윤 2004.02.26 17:24
24 회심, 하나님께로 돌아서다 김재윤 2004.02.13 09:36
23 마틴 로이드 죤스의 크리스마스 메세지 김재윤 2003.12.29 09:13
22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김재윤 2003.12.18 17:13
21 부흥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채천석 지음/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강석천 2003.12.17 15:27
20 칼빈의 여성관 김재윤 2003.12.15 20:17
19 리챠드 백스터의 회심 김재윤 2003.12.05 13:37
18 죠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김재윤 2003.11.28 11:38
17 존 오웬의 죄와 유혹 김재윤 2003.11.20 18:05
16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토마스두리틀/기독교문사 김재윤 2003.11.14 11:06
15 토마스 왓슨의 경건을 열망하라 김재윤 2003.11.06 21:28
14 시험당하신 그리스도 김재윤 2003.10.30 16:19
13 청교도 사상 김재윤 2003.10.30 16:12
12 진돗개전도왕/박병선/생명의말씀사 황성구 2003.10.29 22:00
11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김광훈 2003.09.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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