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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카운터 컬쳐(데이비드 플랫, 두란노)

북뉴스 | 2016.06.27 09:20

순종할 자리를 선택할 수없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정한 사회문제에 열정을 드러내는 걸 보면 적잖이 격려가 되는 반면, 똑같은 크리스천들이 또 다른 이슈에 대해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걸 보면 상당히 걱정된다. 빈곤과 성노예 문제처럼 크리스천들의 활동이 박수를 받는 듯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지만, 크리스천들의 입장이 비판을 받고 있는 동성애나 낙태 같은 이슈들을 두고는 자리 에 앉아 입을 다물어 버린다. 마치 어떤 사회문제에는 맞서고 또 다른 문제는 덮어 두는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자세를 취하기로 입을 맞춘 듯하다. 그리고 그 선별과 선택은 대개 현대 문화와 부대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돌아간다.(12-13)

실제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명망 높은 크리스천 지도자에게 빈곤, 인신매매, 고아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면 분명하게 기꺼이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할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나 낙태에 대한 입장을 밝혀 주기를 부탁한다면, 안절부절 머뭇거리거나 이단에 가까운 주장을 펼 공산이 크다. 기껏해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라든지 관심 분야가 달라서 제가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라고 얼버무릴지 모른다.

사실상 이런 분위기는 기독교계 전반에서 또렷이 감지된다. 빈곤을 완화시키고 현대판 노예제도를 종식시키는 이슈에 관해서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너나없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사진을 포스팅하고 트윗을 날리고, 집회에 참석한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맡아 돌보고 세계각지에서 고아를 입양하는 이들도 있다. 훌륭한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 크리스천들이 낙태라든지 이른바 동성결혼처럼 문화적으로 애매모호한 사안들에 관해서는 논의의 장으로 나오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속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야. 다른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는 쪽이 마음이 편해.”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현대 문화 속에서 안온하게 지내는 데 있지 않다면 어찌하겠는가?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가 문화에 맞서라고 등을 떼미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12-13)

 

사실 개인적으로 특정한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삶과 가족, 목회를 통해 활발하고 담대하게 개입하는 반면, 또 다른 사안들은 수동적이며 비성경적인 자세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깨달음이 이 글을 쓰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삶과 가족, 교회를 정직하게 돌아본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사회정의 가운데 상당 부분이 몇 가지 사회 불의에 선택적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별개의 사회문제로 여기는 사안들이 실제로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느냐에 대한 인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다보면 깨닫게 된다. 성매매와 맞서 싸우는 전쟁에 우리를 내보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모든 성적인 부도덕과 맞서는 싸움에도 나가게 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가난과 전투를 벌이게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 이 결혼을 지키는 씨름에도 참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삶과 가족, 교회의 전열을 재정비해서 무겁게 짓누르는 이 시대의 사회문제에 한층 지속적이고, 그리스도적이며, 대항문화적으로 대처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문화를 거스르고 복음의 길을 걷기로 결론을 내리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일단 판단이 선 뒤에는 더 이상 눈길이 가장 편안한 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더없이 영화롭게 히는 방향에 고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이 줄 수 있는 최대치보다 훨씬 큰 상급을 주님 안에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15)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생명선인 동시에 대항문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복음은 저마다 속한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이슈들에 맞서도록 크리스천들을 몰아간다. 뿐만 아니라, 안팎을 둘러싼 문화와 실제로 충돌하는 상황을 빚어내기도 한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들이 갈수록 멸시와 배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령, 동성에게는 호감을 느낀다 해도 결혼할 뜻을 품거나 사랑을 표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조만간 크리스천들은 이와 관련한 논의가 벌어질 때마다 충돌을 빚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궁색한 처지에 몰릴 공산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게 있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인 입장은 기독교 신앙이 갖는 가장 강력한 공격적인 포인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쯤은 순위가 밀려도 한참 밀린다. 오히려 공격성이 가장 뜨겁게 드러나는 지점은 복음, 그 자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정말 복음을 믿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현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밑바닥부터 바꿔 놓을 것이다(19-20)

 

예수만이 답인가? (31)

 

세속적인 학자들을 포함해서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알고 있는 세상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선한 인간으로 평가한다. 서슴없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치부한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움과 갈등, 고난을 겪은 평범한 인간쯤으로 보는 셈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주님은 사랑이 넘치고 친절하셨으며 가난하고 부족한 이들의 입장에 서셨다. 보잘것 없고 연약하며 압박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셨다. 멸시와 거절을 당하는 이들과 더불어 사셨다. 원수를 사랑하시고 누구나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의 놀라우리만치 겸손한 성품만이 아니라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말씀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러한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다. 예수님의 삶과 관련한 기록 가운데 몇장만 읽고도 주님 이 스스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는 결론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게 오라면서 만나는 이마다 주위로 불러 모으셨다.(31)

 

 

그리스도의 복음은 두려움에 굴복해 문화적으로 타협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반문화의 십자가를 지라는 부르심이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자신을 죽여 가며 세상의 조류를 거스르라는 뜻이다.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믿고 그 믿음에 기대서 문화에 개입하기를 기대한다. 책을 읽어 나가는 사이에 부디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우리 문화와 주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필요를 확인하고, 눈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확신과 긍훌과 용기를 품고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를 겸손하게 전파하는 동시에, 죄와 고통, 부도덕과 불의가 마침내 사라지는 날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며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여정에 나서게 되길 기도한다. (46-47)

 

이른바 선진국의 적지 않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만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주변 세계에 널렸지만 문을 닫고눈을 감은 채 손을 놓고 있다. 안락하게 해 주는 온갖 것들로 집과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다른 이들의 절박한 가난에 대해서는 앞을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시늉으로 일관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눈을 열어 복음이 어떻게 살아가라고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53)

 

이른바 선진국 시민들은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부자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우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제3세계 수십 억 인구에 비하자면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중산층에 해당하는 미국 직장인은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귀족이나 다름없다. 예수님은 그런 이웃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세상의 뿌리 깊은 가난에, 다른 한쪽에서 누리는 부요한 현실을 결부시키는 그리스도의 이 명령은 우리네 생활방식에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주변 세계의 상황에 눈을 떴다면 하나님 말씀이 던지는 질문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웃의 궁핍한 크리스천들(우선 순위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려고 한다)을 보살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적임에 틀림없다.(55)

 

한마디로, 복음은 노동을 통해 세상 문화와 맞서길 요구한다. 현대인들은 일을 하나님의 귀한 선물로 보지 않는 문화에 젖어 있다. 젊은이들이든 은퇴한 어른들이든 매한가지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사춘기놀음을 계속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20-30대에 들어선 뒤에도 당당한 사나이가 되길 마다하는 남자들이 사방에 널렸다. 공부를 더 하거나 일자리를 갖는 대신 비디오게임에 매달린다. 흔히 말하는 알바로 용돈이나 벌고 그밖의 비용은 모조리 부모에게 기댄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가 뭇사람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시건만 그 엄연한 성경의 진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주님이 시키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신령한 화법을 구사해 가며 게으름을 부추기는 이들까지 있다. 최악의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은퇴 이후의 생활을 화려하게 부풀리면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문화 속에 사는 현대인으로서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기준대로라면, 성공은 더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경지를 가리킨다. 방금 플로리다 남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참인데, 거기서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러한 문화가 주는 즐거움에 폭 빠져 만년을 보내는 남녀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식의 은퇴 생활을 언급하신 적이 단한 번도 없다. 하나님이 건강한 이들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명령하셨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69)

 

단순하게 살며

 

다음으로, 복음을 품으면 단순하게 살 수밖에 없다 최대한 많이 벌라고 격려할 때 유일하게 덧붙이는 경고가 있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수입을 올리는지에 극도로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건 특별히 부유한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쓰면서 앞장에서 소개한 본문 앞쪽에 이렇게 적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돈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게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죄에 물든 인간의 손에 든 돈은 극도로 위험한, 심하게는 파멸을 부르는 물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10:23)고까지 말씀하신다. 우리가 부자라는 점은 이미 설명했으므로, 이 말씀은 우리 삶의 뿌리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지적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믿지 않는다. 현대 문화(또는 현대 교회)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십중팔구 물질적인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파악할 뿐, 주께 나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71-72)

 

수입이 늘수록 생활수준도 높아져야 한다는 거짓말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는 문화의 호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돈이 많아지면 자신에게 더 많이 쏟아붓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더 많은 물건들, 더 근사한 소지품, 더 대단한 사치품들을 사들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자부하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재물이라는 게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태도는 성경말씀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더 많은 선물을 주셔서 거룩한 자녀들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베풀게 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님은 재물을 넘치도록 허락하셔서 언젠가 사라져 버릴 지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하늘의 보화에 투자하게 하신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 그런 인생관은 위험할뿐더러 악마적이다.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크고 귀한 보물이며, 인간이 지상에서 누리는 삶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것들을 쌓는 데 투자될 때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73)

 

복음과 낙태

 

세계적으로 매년 42백만 건의 낙태가 자행된다. 매일 115,000건의 임산중절이 이뤄지는 셈이다. 밤마다 네 아이를 침대에 데려다 재우고 한참이나 얼굴을 들여다보는 나로서는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숫자다. 바로 그 순간에도 목숨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이나 약물과 마주하는 아기가 115,000명이나 된다니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납득할 수 없는 건 어떻게 이처럼 섬뜩한 세상의 현실에 그토록 둔감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임신중절 행위의 실상을 생각하면 낙태를 현대판 홀로코스트라고 부르는 게 결코 허풍이 아니다.(93)

 

만사를 움직여 선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낙태는 피조물 가운데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주님과 태아 사이의 관계를 공격한다. 하나님이 뱃속의 아이와 어떻게 판계를 맺으시는지 슬쩍 엿볼수 있다는 점은 시편 139편이 가진 놀라운 면모 가운데 하나다. 주님은 수정 시점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아기의 삶에 자상하게 관여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1:5).

시편 기자는 부르짖는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모태에서 나을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103)

 

몇 년 전, 우리 부부는 무심코 입양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기길 한 달 두달 기다리기를 무려 5년이나 계속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기도하고 갈망하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하나님은 이편에서 소망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지 않으셨다. 임신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가 되자 마침내 입양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젠 차선책을 쓸 때인 것 같아.” 서로에게 이야기했다.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아직 입양이란 방법이 남았잖아.”

하지만 입양이 차선이 아니라 또 다른 최선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불임이라는 악조건을 사용해 아내와 내 눈을 여셔서 온 세상 고아들이 마주한 심각한 위기 상황을 직시하게 하셨다. 대략 15,3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아,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적어도 어느 한 쪽을 잃은 채 살아간다.

부모가 모두 없는 친구도 1,800만 명에 이른다. 이 수치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각종 시설이나 거리에서 생활해서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아이들도 수백만을 헤아린다. 여기에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있다 해도 거의 볼 수 없거나 가족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른바 사회적 고아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119-120)

 

복음과 신앙의 자유

 

섬뜩함...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무기를 손에 잡은 채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이편을 똑바로 쏘아보던 북한군 병사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 단어가 떠오른다.

그날, 난 비무장지대에 있었다. 보통 DMZ라고 부르는데,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좁은 땅덩어리를 가리킨다. 길이는 230킬로미터, 너비는 4킬로미터 정도로 한국과 북한, 그리고 양국 동맹국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한다. 비무장지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화력이 대치한 경계선이다.

흔히 공동경비구역(JAS)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비무장지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남북의 병사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곳이다. 오래전에 남북 양국은 이 작은 마을을 협상 장소로 지정했다. 마을 한복판에 국제회의가 열리는 공간이 있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자그마한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협상 테이블이 나타났다. 정중앙으로 하얀 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식 회담이 열리면 한쪽에는 남측 대표들이 다른 한편에는 북측의 당국자가 자리를 잡는다.

건물을 나서자 경계선 너머에 우뚝 선 북한군 병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매서운 눈길로 우리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었지만 그때도 그다지 섬뚝하진 않았다. 정말 소름이 끼쳤던 순간은 그 군인들 뒤편에서 살아가는 백성들, 특히 크리스천들에 생각이 미쳤을 때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북한은 인권 지수가 바닥을 헤매기로 널리 알려진 나라다. 식량 부족강제 노역성폭력조직적인 고문공개 처형 따위가 이 공산주의 국가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북한 당국은 특히 신앙을 지키는 이들을 잡아들여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살아 나을 수 없는 이른바 관리소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크리스천들이 가장 가혹하게 탄압받는 세계 50개국을 꼽아 순위를 매기는 워치 리스트(World Watch List)에서 북한은 오랫동안 1등 자리를 지켰다. 성경을 소지하거나 남한, 또는 중국 크리스천들과 접촉한 혐의가 있는 북한인은 총살형을 받는다. 북한 경찰관들은 탈북자로 위장하고 중국 전역의 교회들에 침투해서 북한 교회와 연결이 있는지 확인하는 훈련을 받는다. 북한 크리스천들을 색출해 살해할 목적으로 가짜 기도 모임까지 연다.

두말할 것 없이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수많은 이들이 비슷한 형편 속에 살아간다. 신앙의 자유를 부정하는 정책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크리스천들은 그 어느 종교 집단보다 더 광범위하고 혹독한 박해를 받고 있다. 미국 정부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60개국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이 세상에서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요구하는가? 바로 그 복음은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정령신앙을 가졌든 무신론자든 저마다의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얼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가?(283-285)  

 

요즘동성애는 잘못이며 죄라고 말하면 곧장 불관용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공격적이거나 편협하거나 가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당장은 불관용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불관용은 성경말씀에 대한 개인의 믿음에 토대로 삼고 있다. 간단히 말해그 믿음이 의 믿음과 다른 탓에 볼관용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딱지는 회한하리만치 자가당착적이다. 불관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부터가 실제로는 남의 신앙을 관용하지못하고 않은가! ‘편협하다고 비난하는 사이에 스스로 편협함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셈이다. 현대 문화 속에서 이런 사례는 흔하디흔하다. 미국인들만 하더라도 편협하고 관용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치이고 깔려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천은 관용할 줄 모르는 이들로부터 관용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그러니까 스스로 관용하지 못하는 기괴한 처지에 몰렸다.

관용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은 분명 뒤틀려 있다. 우선, 관용에는 반드시 불일치가 따라야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이편이 믿는 걸 상대방도 그대로 믿는다면 관용이 아니다. 야구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을 관용하는 게 아니다.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언제라도 나란히 홈플레이트 뒤편 관중석에 앉아서 핫도그를 우물거리며 게임을 즐길 것이다.(295)

 

세계적으로 정부의 통제는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현실은 정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특정 종교(또는 무신론을)를 지정하고 시민들에게 그 신앙에 부응하도록 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 국가들에서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국가와 교회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종교(혹은 무신론)의 가르침은 나라의 법이 되고 거기에 불순종하면추방이나 처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징벌을 받는다. 정부의 규제가 지나가자마자 사회의 압력이 꼬리를 물고 들이닥친다. 가족에서부터 친구광신자지역사회 지도자범죄 집단들이 특정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겁주고 을러대고 해치고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다. 오늘날 허다한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핍박은 대부분 그런 형태를 띠고 있다. 시리아 반군들은 엉뚱하게도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폭력과 성폭행처형참수를 일삼고 있다. 2013, 이집트에서는 한 달 새 38개의 교회가 파괴되고, 23개 예배당이 헐렸으며, 38채의 가옥이 불타고, 85곳의 상점들이 강탈당했으며, 7명의 크리스천들이 납치됐고, 6명이 살해됐다. 바로 다음 달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표적으로 파키스탄 역사상 가장 참혹한 공격이 있었다. 자폭 테러범이 페샤와르에 있는 교회 (Al Saints’ Church) 앞마당에서 유산탄을 장착한 조끼를 폭발시켜 81명에 이르는 교인들의 목숨을 빼앗고 백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모두가 현지 행정당국 관계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크리스천들을 박해한 사건이었다.

어림잡아 매달 백 명 정도의 크리스천들이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살해되고 있다(이들은 수치를 훨씬 높여 잡는 이들도 있다). 학대를 당하고,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음식과 물과 잠자리를 빼앗기는 사례는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신앙을 이유로 압박을 받는 사건 하나하나는 곧 불과 연단으로 시험을 받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내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처럼 신실하게 불같은 시련을 견뎌 냈는지, 하나님을 찬양할 따름이다.(299-300)

 

미국처럼 신앙의 자유가 갈수록 제한되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난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신앙을 침묵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부르짖는다.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비싼 값을 치러 가면서 일어나 문화를 거스르는 걸 뻔히 알면서, 뒤로 물러앉아 상대적으로 안온한 문화에 순응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고난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사유화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리스도를 알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믿으면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세상 정부에 있지 않으며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증언하는 앞서간 증인들이 구름처럼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307)

 

지상명령은 될수 있는대로 많은 이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일반적인 요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 집단에 들어가 제자 삼으라는 구체적인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명령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궁금한가? 선교학자들은 11,000에 이르는 민족 집단 가운데 얼마나 많은 종족에 복음이 들어갔는지 살펴보았다. 복음을 고백하고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비중이 2퍼센트 미만인 민족 집단을 골라 미전도로 분류했다. ‘미전도 종족이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그 민족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복음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교회가 없고 크리스천들도 없으며 복음을 전하려는 외부의 시도도 없어서 대다수 주민들이 죽는 날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어 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아직 미전도 상태로 남아 있는 민족 집단은 얼마나 될까? 무려 6천개가 넘으며 인구로 치자면 최소한 20억에 이른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세계의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을 만나 보았다. 여러 날 동안 아시아 어느 지 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면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답이 돌아을 뿐이었다. 중동의 여러 도시들에서 들어 봤다고 말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지만 아는 건 이름뿐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진리를 제대로 전달받은 경험은 전혀 없었다. 이전까지는 크리스천을 만난 적도, 성경을 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막에서는 복음을 들어 본 일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는 이들과 둘러앉은 적도 있다. 다른 신앙과 그 믿음을 나누려는 시도를 철저히 배격하는 민족 집단에 속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322)

 

현실에 안주하려는지 아니면 소명을 위해 회생하려는지 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행군 명령을 내리셨다. 너무도 분명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지상의 모든 민족 집단에 복음,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관한 소식을 선포하라! 그렇다면 2천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6,000여 개의 민족 집단이 아직 미전도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게 어떻게 말이 되는가?

교회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은 이런 상황이 빚어진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말 그대로 수십 억 인구가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한 채 죽어 가는 판에 한가하게 뒤로 물러앉아 있는 데 만족하는 분위기가 여실하다. 온 세계를 통틀어 이만한 불의가 또 있을까 싶다. 여태 살펴본 여러 가지 이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대담한 이야기지만 한 점 망설임 없이 외칠 수 있다. 20억이 넘는 인구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으로 지금도 지상에 존재한다.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어서 구세주가 절실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을 베푸셨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에게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우시는 회생을 통해 죄에 절은 심령에 자비가 가득한 손을 내미시고 감미로운 사랑으로 일으켜 세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덧입고 그분의 보호하심으로 안전해졌으므로 두려워할 일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다.

아울러, 세상에서 고통과 oi픔을 다 몰아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하나님과 더불어 참여하며, 복음을 선포해선 안 된다. 그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실 일이다. 세상에 다시 임하시는 날, 예수님은 그런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무슨 일을 하라고 부르시든지 전심으로 충성하면 그만이다.

문제가 워낙 복잡해서 개인이나 한 가족, 또는 교회가 어찌해 볼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참말이다. 어느 이슈를 꼽을 필요도 없이 하나하나가 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복음을 널리 전하고 문화 속에 그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한 사람, 한 가정, 또는 한 교회를 들어 쓰셔서 이루실 수 있는 역사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러므로 주님 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문화 속에 두셨다는 강철 같은 확신을 품고 맡겨진 일들을 성심껏 감당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부르셨고아들의 핏값으로 구원하셨으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거룩한 사랑으로 사로잡으셨으며, 거룩한 말씀을 통해 문화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다.

치르게 될 대가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가장 큰 상급이 되셨다는 자신감을 가지라.(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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