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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십자가 복음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미국제 영성에 속지말라/마이클 호튼/규장/[권지성]
마이클 호튼의 신작 ‘In the Face Of GOD’(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는 대단히 위험한 책으로 우리의 세속화된 신앙에 뒤통수를 날린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대 사회의 영지주의에서부터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 중심적인 신앙으로 바뀐 우리 스스로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 복음주의만은 아니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영지주의, 신비주의, 성공주의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순절 교파 전반과 죤 웨슬리, R.A. 토레이, 빈야드 교회와 신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주류 복음주의 계열의 인사들에게 까지 저자는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즉, 이 책의 전체 구조는 영지주의의 역사적인 근원을 자세히 제시하고, 이러한 신학적인 패턴이 현재의 미국 복음주의에 어떠한 해악을 끼쳤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십자가 신학과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제시한다.
첫째, 영지주의와 인간 중심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이다. 이 책은 영지주의의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다루는데, 저자는 현재의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경향성을 고대의 영지주의의 영향의 하나로 보고 있다. 마이클 호튼의 생각에 100%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재 한국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예배와 하나님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제어가 가능하도록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인기 있는 부흥사였던 찰스 피니는 상당히 영지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신조와 신앙고백서와 교회 권위와 예배의식과 하나님의 주권을 배격하였으며 성례전을 중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그러한 점을 그의 신비주의적인 완전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P.123)
현재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적인 화두는 ‘긍정의 힘’인 것 같다. 마치 기업의 CEO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할 법한 연설의 내용을 카피한 듯하다.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힘보다 대단하게 비취어지고 기독교 서적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공’ 및 ‘영광의 복음’과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십자가의 복음을 버리고 개인의 출세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오순절 성령운동은 우리에게 사도행전 8장의 ‘Simony’적인 영적 테크닉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보여줄 수 있는 신앙,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과시하는 신앙,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신앙의 모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거기에도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복음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예언, 치유, 방언등의 은사주의와 복음의 결합은 사사기의 혼탁한 신앙의 모습일 뿐이다.
‘비록 그 자신이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신비주의의 적수도 아니자만, 하비 콕스는 오순절운동을 향해 “현시대의 ‘감정’찬양과 자극과 쾌락의 새로운 원천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에 발맞추어온 ‘체험숭배’”임을 경고하면서 “오순절운동은 뉴에이지의 자기탐닉이라는 유행 가운데 빠져 사라질 수 있다. 건강과 부의 신학의 인기는 이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그들이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예배는 일종의 ‘대중적 신비주의’에 해당한다.’ (P.65)
성경을 중심으로 현 시대의 신앙적인 현상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저자의 말은 나에게도 회개의 메시지가 되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었지만, 이 승리에 취한 나머지 진정으로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교만히 행하는 종교화되어 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십자가의 공로와 구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나의 선행의 모습으로 꾸미려는 외식적인 모습 말이다. 한 사람의 ‘선생’임을 자처하는 나로서 성도들에게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움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고, 교회에 잘 출석하라는 식의 말씀만을 증거하였다.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주님은 영광과 승리에 도취한 제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나의 진로와 현재의 상황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 눈곱만큼도 있는지, 그것을 거부하려고 도망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회개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피하고 영적인 단물만을 취하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둘째,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제 3부 ‘미국제 영성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에서 저자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싸워줄 왕을 필요로 했던 사사 시대와 같이 현재 교회의 모습도 스타와 영웅을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에 직격탄을 날린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보다 시장경제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명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심지어 좀 더 주류에 속하는 복음주의자들까지도 믿음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영지주의적 영성 테크닉이다. 이것은 주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극단에 치달은 ‘영광의 신학’이다.’ (P.208)
미련하고 거친 십자가보다 대중은 현란한 ‘경배와 찬양’속에서 감동과 눈물과 환희를 주는 기독교와 예배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례전과 설교라는 은혜의 수단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해서 소비자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국 교회의 강단은 점점 설교의 강한 능력을 상실해가는 듯하다. 성례전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개념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영적인 액션을 취함으로 얻어내는 것으로 예배의 경향은 바뀌었다.
여기서 음악은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한다. 감정적인 짜릿한 것을 마치 성령의 역사인 양 치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어느새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물론,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말자거나, 예배의 다양한 형식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은혜의 수단’인 여호와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성화의 원리들이 우리 안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성령님과의 직통교제를 통한 신비주의적인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권위는 성경과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더 높이 여겨지고 있다. 영적인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영적 대결이나 기적적인 은사들이 보기 좋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영향에서 기인한 것에 다를 바가 없다.
제자의 길은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의 순간을 반드시 통과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롬8: 17)바로,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서 필요한 고난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걸어가신 길이고,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서 오직 붙들어야 하는 험한 십자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 복된 복음이 승자를 변호하기 위한 복음으로 변질되고, 성공지상주의라는 기업가 사상으로 탈바꿈한다면 우상숭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 2)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죄악 된 마음과 그릇된 동기에서 나오는 영지주의와 성공주의 신앙을 경계하고, 십자가 아래로 달려가고 싶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성례전과 말씀 이외의 복음의 내용이 아닌 문화의 차이조차도 싸잡아 한 통속으로 비판하는 작가의 시각에 완전히 동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순절 교파나 복음주의 기독교를 영지주의화 되었다라고 비판하는 작가의 다소 독선적인 시각도 다분히 학자적인 생각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현재 세속화된 교회에 해독제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는 까닭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동감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호튼의 신작 ‘In the Face Of GOD’(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는 대단히 위험한 책으로 우리의 세속화된 신앙에 뒤통수를 날린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대 사회의 영지주의에서부터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 중심적인 신앙으로 바뀐 우리 스스로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 복음주의만은 아니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영지주의, 신비주의, 성공주의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순절 교파 전반과 죤 웨슬리, R.A. 토레이, 빈야드 교회와 신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주류 복음주의 계열의 인사들에게 까지 저자는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즉, 이 책의 전체 구조는 영지주의의 역사적인 근원을 자세히 제시하고, 이러한 신학적인 패턴이 현재의 미국 복음주의에 어떠한 해악을 끼쳤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십자가 신학과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제시한다.
첫째, 영지주의와 인간 중심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이다. 이 책은 영지주의의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다루는데, 저자는 현재의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경향성을 고대의 영지주의의 영향의 하나로 보고 있다. 마이클 호튼의 생각에 100%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재 한국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예배와 하나님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제어가 가능하도록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인기 있는 부흥사였던 찰스 피니는 상당히 영지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신조와 신앙고백서와 교회 권위와 예배의식과 하나님의 주권을 배격하였으며 성례전을 중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그러한 점을 그의 신비주의적인 완전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P.123)
현재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적인 화두는 ‘긍정의 힘’인 것 같다. 마치 기업의 CEO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할 법한 연설의 내용을 카피한 듯하다.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힘보다 대단하게 비취어지고 기독교 서적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공’ 및 ‘영광의 복음’과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십자가의 복음을 버리고 개인의 출세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오순절 성령운동은 우리에게 사도행전 8장의 ‘Simony’적인 영적 테크닉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보여줄 수 있는 신앙,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과시하는 신앙,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신앙의 모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거기에도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복음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예언, 치유, 방언등의 은사주의와 복음의 결합은 사사기의 혼탁한 신앙의 모습일 뿐이다.
‘비록 그 자신이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신비주의의 적수도 아니자만, 하비 콕스는 오순절운동을 향해 “현시대의 ‘감정’찬양과 자극과 쾌락의 새로운 원천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에 발맞추어온 ‘체험숭배’”임을 경고하면서 “오순절운동은 뉴에이지의 자기탐닉이라는 유행 가운데 빠져 사라질 수 있다. 건강과 부의 신학의 인기는 이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그들이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예배는 일종의 ‘대중적 신비주의’에 해당한다.’ (P.65)
성경을 중심으로 현 시대의 신앙적인 현상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저자의 말은 나에게도 회개의 메시지가 되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었지만, 이 승리에 취한 나머지 진정으로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교만히 행하는 종교화되어 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십자가의 공로와 구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나의 선행의 모습으로 꾸미려는 외식적인 모습 말이다. 한 사람의 ‘선생’임을 자처하는 나로서 성도들에게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움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고, 교회에 잘 출석하라는 식의 말씀만을 증거하였다.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주님은 영광과 승리에 도취한 제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나의 진로와 현재의 상황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 눈곱만큼도 있는지, 그것을 거부하려고 도망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회개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피하고 영적인 단물만을 취하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둘째,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제 3부 ‘미국제 영성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에서 저자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싸워줄 왕을 필요로 했던 사사 시대와 같이 현재 교회의 모습도 스타와 영웅을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에 직격탄을 날린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보다 시장경제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명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심지어 좀 더 주류에 속하는 복음주의자들까지도 믿음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영지주의적 영성 테크닉이다. 이것은 주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극단에 치달은 ‘영광의 신학’이다.’ (P.208)
미련하고 거친 십자가보다 대중은 현란한 ‘경배와 찬양’속에서 감동과 눈물과 환희를 주는 기독교와 예배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례전과 설교라는 은혜의 수단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해서 소비자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국 교회의 강단은 점점 설교의 강한 능력을 상실해가는 듯하다. 성례전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개념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영적인 액션을 취함으로 얻어내는 것으로 예배의 경향은 바뀌었다.
여기서 음악은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한다. 감정적인 짜릿한 것을 마치 성령의 역사인 양 치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어느새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물론,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말자거나, 예배의 다양한 형식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은혜의 수단’인 여호와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성화의 원리들이 우리 안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성령님과의 직통교제를 통한 신비주의적인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권위는 성경과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더 높이 여겨지고 있다. 영적인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영적 대결이나 기적적인 은사들이 보기 좋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영향에서 기인한 것에 다를 바가 없다.
제자의 길은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의 순간을 반드시 통과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롬8: 17)바로,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서 필요한 고난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걸어가신 길이고,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서 오직 붙들어야 하는 험한 십자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 복된 복음이 승자를 변호하기 위한 복음으로 변질되고, 성공지상주의라는 기업가 사상으로 탈바꿈한다면 우상숭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 2)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죄악 된 마음과 그릇된 동기에서 나오는 영지주의와 성공주의 신앙을 경계하고, 십자가 아래로 달려가고 싶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성례전과 말씀 이외의 복음의 내용이 아닌 문화의 차이조차도 싸잡아 한 통속으로 비판하는 작가의 시각에 완전히 동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순절 교파나 복음주의 기독교를 영지주의화 되었다라고 비판하는 작가의 다소 독선적인 시각도 다분히 학자적인 생각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현재 세속화된 교회에 해독제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는 까닭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동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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