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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잔인한 자비’ 앞에서 ..
잔인한 자비/쉘던 베너컨/김동완/복있는사람/[조영민]
수많은 서평을 썼기에 어느덧 전문 서평가처럼 되어져버린 나에게 있어서 서평을 쓰는 원칙은 분석이다. 이성으로 책에 대해서 판단하고 책의 장점과 단점을 찾아내며 가장 적절한 대상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을 서평을 쓰는 목적으로 삼아서 최근의 서평들을 써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글을 쓸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다음 페이지를 읽기가 싫었고, 읽혀진 페이지에 동의하기 싫었고, 그러면서도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이상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읽었던 많은 신앙서적들과 또 많은 신학 서적들에서 경험해 보기 힘들었던, 아니 정말 솔직하게 책을 책으로 읽었던 시절에 가끔 경험할 수 있었던 그런 감정의 기복과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적어야 할지 않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스런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이 책의 깊이와 넓이가 제한될까 심히 두려운 마음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게 된 건 ‘C.S.루이스와 나눈 우정의 편지 18편 수록’이라는 작은 표지의 문구 때문이었다. 약간의 상술처럼 여겨졌지만 루이스의 광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 그가 쓴 개인적인 편지들의 내용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그러다 책의 서문을 읽게 되었고,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 자체가 갖는 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이었지만 이 책은 이틀 만에 다 읽혀졌다.
이 책은 1977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고, 그 책의 많은 내용은 1950년대의 이야기들이다. 또 한 개인과 개인사에 관한 스토리가 책의 주 내용이 되기에 그 시대의 시대성의 산물이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와 그의 아내가 된 데이비와의 연애와 결혼생활 회심과 사별, 그 후기는 철저하게 그 시대의 시대성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을만한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의 독자에게 무엇을 어필 할 수 있을까. 마치 오래전 가끔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미국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질감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시대성에 메여있는 책이 아니다. 그런 책이라면 이 책은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를 향해 말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시대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보여줬다. 사랑과 회심과 죽음과 회복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대해 시대성을 뛰어넘는 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을 독자 전체를 향해서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방식에 있어 또 연애의 방법과 데이트 방법, 결혼의 방법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우리는 50년 전 미국 사회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그 언어들 속에 있는 진실함, 집중, 서로를 향한 헌신과 같은 부분에서 보편적 상호헌신으로서의 ‘사랑’을 읽는다. 회심에 있어서 영국과 옥스퍼드, C.S.루이스와 신앙을 가지고 논쟁하는 분위기 등은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시대성 속에서 여전히 일하시며 오늘도 집요하게 한 인간을 향해 걸어가시는 분은 여전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 앞에 결국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인간의 반응은 보편적이다. 죽음을 맞아가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있는 저자의 모습과 그 죽음을 맞아가는 병상에 누워 마지막 호흡을 내쉬며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는 아내의 모습도 보편성이며 죽은 아내에 대해서 사랑하는 이를 먼저 가게 하신 이를 향한 저자의 치열함 저항과 아픔과 그 내적인 치료와 깨달음의 과정은 더 이상 그 시대의 산물이라 말할 수 없는 보편성을 지난다. 이 책은 시대성을 뛰어넘어 인간 보편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독자로 하여금 ‘나를 다시 읽게 하는데’ 이르게 만든다.
읽으며, 수없이 많은 장을 접어놔야 했다.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너무 귀중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루이스가 들려주는 탁월한 통찰과 따뜻한 마음 때문에, 저자와 데이비가 나누는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그 사랑 앞에, 그리고 죽음 뒤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간들 앞에서 그 죽음을 승화시켜 가는 저자의 일기와 편지들의 문장들이었다. 예리한 지성이 돋보이는 문장들과 통찰이 가득했다. 표현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고, 최선의 표현과 인용들을 발견하게 되는 지적, 문학적 기쁨이 있었다.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눈물을 쏟아내도록 만드는 억지스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그냥 마음을 찌르는 고통 때문에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났다. 난 아내를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 앞에서 감정 이입이 된 채 울었고, 상실의 고통 속에서 홀로 버려진 채 그 아내의 죽음이 자신에게 또 아내에게 주어진 ‘잔인한 자비’임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는 저자의 고백 속에서 찢어지는 아픔으로 인해 울었다. 책의 결말을 아는 이로서는 책의 전체를 처음부터 읽는 것이 점점 더 심한 고통이었다. 아름다운 연애도 그들의 회심도 그들의 위기도.. 비극으로 흘러가는 과정으로 읽혀지는 아픔 때문이었다. 행복했던 중반까지 읽고, 더 이상 읽는 것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경험하며 끝까지 이어나가야 할 만큼 이 책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아픔을 짊어지고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읽으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격렬하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 속에 계셨다. 저들만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그곳에도 ‘나무 십자가’로, 우연하게 편지를 쓰게 된 C.S.루이스를 통해서도, 옥스퍼드 유학시절 속에 수많은 친구들 속에서도, 그날 밤 그 회심의 순간에도, 그리고 한해만 더 살게 해달라며 남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기도하던 데이비의 기도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 마지막 의식으로 하늘을 향해 ‘여보 저것 좀 봐....’라고 말하는 데이비의 낮은 마지막 속삭임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가 있었다. 무서운 그분의 자비, ‘잔인한 자비’가 이 책 전체 속에 말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밀려온다.
서평이라는 ‘무익한 것’을 다 써 가고 있는 지금,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의 두 사람의 웃고 있는 행복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파지는데 말이다. 얼마간 난 이 책을 다시 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책장 어딘가에 잘 꽂아 둘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내 둘 중 하나가 먼저 하나님께 가는 일이 있다면 그때쯤 남겨진 한 사람이 이 책을 꺼내 읽도록 하려 한다. 죽음마저도 ‘자비’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그 때, 이 책은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쉘던 베너컨 (Sheldon Vanauken)
1914년 출생. 젊은 시절옥스퍼드에서 C. S. 루이스를 만나 회심했다. 미국 버지니아에 소재한 린치버그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하다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지은 책으로 <잔인한 자비> 등이 있다.
수많은 서평을 썼기에 어느덧 전문 서평가처럼 되어져버린 나에게 있어서 서평을 쓰는 원칙은 분석이다. 이성으로 책에 대해서 판단하고 책의 장점과 단점을 찾아내며 가장 적절한 대상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을 서평을 쓰는 목적으로 삼아서 최근의 서평들을 써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글을 쓸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다음 페이지를 읽기가 싫었고, 읽혀진 페이지에 동의하기 싫었고, 그러면서도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이상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읽었던 많은 신앙서적들과 또 많은 신학 서적들에서 경험해 보기 힘들었던, 아니 정말 솔직하게 책을 책으로 읽었던 시절에 가끔 경험할 수 있었던 그런 감정의 기복과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적어야 할지 않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스런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이 책의 깊이와 넓이가 제한될까 심히 두려운 마음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게 된 건 ‘C.S.루이스와 나눈 우정의 편지 18편 수록’이라는 작은 표지의 문구 때문이었다. 약간의 상술처럼 여겨졌지만 루이스의 광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 그가 쓴 개인적인 편지들의 내용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그러다 책의 서문을 읽게 되었고,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 자체가 갖는 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이었지만 이 책은 이틀 만에 다 읽혀졌다.
이 책은 1977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고, 그 책의 많은 내용은 1950년대의 이야기들이다. 또 한 개인과 개인사에 관한 스토리가 책의 주 내용이 되기에 그 시대의 시대성의 산물이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와 그의 아내가 된 데이비와의 연애와 결혼생활 회심과 사별, 그 후기는 철저하게 그 시대의 시대성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을만한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의 독자에게 무엇을 어필 할 수 있을까. 마치 오래전 가끔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미국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질감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시대성에 메여있는 책이 아니다. 그런 책이라면 이 책은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를 향해 말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시대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보여줬다. 사랑과 회심과 죽음과 회복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대해 시대성을 뛰어넘는 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을 독자 전체를 향해서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방식에 있어 또 연애의 방법과 데이트 방법, 결혼의 방법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우리는 50년 전 미국 사회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그 언어들 속에 있는 진실함, 집중, 서로를 향한 헌신과 같은 부분에서 보편적 상호헌신으로서의 ‘사랑’을 읽는다. 회심에 있어서 영국과 옥스퍼드, C.S.루이스와 신앙을 가지고 논쟁하는 분위기 등은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시대성 속에서 여전히 일하시며 오늘도 집요하게 한 인간을 향해 걸어가시는 분은 여전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 앞에 결국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인간의 반응은 보편적이다. 죽음을 맞아가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있는 저자의 모습과 그 죽음을 맞아가는 병상에 누워 마지막 호흡을 내쉬며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는 아내의 모습도 보편성이며 죽은 아내에 대해서 사랑하는 이를 먼저 가게 하신 이를 향한 저자의 치열함 저항과 아픔과 그 내적인 치료와 깨달음의 과정은 더 이상 그 시대의 산물이라 말할 수 없는 보편성을 지난다. 이 책은 시대성을 뛰어넘어 인간 보편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독자로 하여금 ‘나를 다시 읽게 하는데’ 이르게 만든다.
읽으며, 수없이 많은 장을 접어놔야 했다.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너무 귀중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루이스가 들려주는 탁월한 통찰과 따뜻한 마음 때문에, 저자와 데이비가 나누는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그 사랑 앞에, 그리고 죽음 뒤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간들 앞에서 그 죽음을 승화시켜 가는 저자의 일기와 편지들의 문장들이었다. 예리한 지성이 돋보이는 문장들과 통찰이 가득했다. 표현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고, 최선의 표현과 인용들을 발견하게 되는 지적, 문학적 기쁨이 있었다.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눈물을 쏟아내도록 만드는 억지스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그냥 마음을 찌르는 고통 때문에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났다. 난 아내를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 앞에서 감정 이입이 된 채 울었고, 상실의 고통 속에서 홀로 버려진 채 그 아내의 죽음이 자신에게 또 아내에게 주어진 ‘잔인한 자비’임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는 저자의 고백 속에서 찢어지는 아픔으로 인해 울었다. 책의 결말을 아는 이로서는 책의 전체를 처음부터 읽는 것이 점점 더 심한 고통이었다. 아름다운 연애도 그들의 회심도 그들의 위기도.. 비극으로 흘러가는 과정으로 읽혀지는 아픔 때문이었다. 행복했던 중반까지 읽고, 더 이상 읽는 것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경험하며 끝까지 이어나가야 할 만큼 이 책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아픔을 짊어지고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읽으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격렬하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 속에 계셨다. 저들만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그곳에도 ‘나무 십자가’로, 우연하게 편지를 쓰게 된 C.S.루이스를 통해서도, 옥스퍼드 유학시절 속에 수많은 친구들 속에서도, 그날 밤 그 회심의 순간에도, 그리고 한해만 더 살게 해달라며 남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기도하던 데이비의 기도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 마지막 의식으로 하늘을 향해 ‘여보 저것 좀 봐....’라고 말하는 데이비의 낮은 마지막 속삭임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가 있었다. 무서운 그분의 자비, ‘잔인한 자비’가 이 책 전체 속에 말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밀려온다.
서평이라는 ‘무익한 것’을 다 써 가고 있는 지금,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의 두 사람의 웃고 있는 행복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파지는데 말이다. 얼마간 난 이 책을 다시 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책장 어딘가에 잘 꽂아 둘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내 둘 중 하나가 먼저 하나님께 가는 일이 있다면 그때쯤 남겨진 한 사람이 이 책을 꺼내 읽도록 하려 한다. 죽음마저도 ‘자비’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그 때, 이 책은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쉘던 베너컨 (Sheldon Vanauken)
1914년 출생. 젊은 시절옥스퍼드에서 C. S. 루이스를 만나 회심했다. 미국 버지니아에 소재한 린치버그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하다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지은 책으로 <잔인한 자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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