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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수 인문학> 뒤집어 읽기

이성호 | 2016.07.08 23:41
<예수 인문학> 뒤집어 읽기 예수 인문학/차정식/새물결플러스/이성호 편집위원

예열

 

<예수 인문학>은 표절논란의 중심이 된 지은이가 자신의 심정을 직간접으로 표현한 서문으로 인해 이미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책을 펴낸 곳 역시도 파란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이런 저런 이유들로 <예수인문학>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자칫 마케팅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그만큼 많았다.

 

서문이란 것이 대체로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 용단(?)을 미화하는 내용 일색이 아닌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분노 모드의 온건한 작동으로 보인다. "언제나 냄비처럼 들끓는 내 분요한 조국의 한 후미진 곳에서...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서푼어치의 지적인 양심을 걸고..." 이런 문장도 불편을 가속했지만 마치 당신 스스로를 대가로 설정한 듯한, 쌍팔년도식 올드한 문장과 오만함이 더 거슬렸고 한편으론 촌스러웠다. "나는 지적 식민지로서...그저 서구학자들이 해온 방식을 기계적으로 모방하고 그것을 절대 불변의 기준인냥 맹종하는 학문적 풍토를 안타까워하며 거기에 조그만 균열을 내고자 자유분방하게 내 사색의 결을 따라가고 싶었다...나는 어설픈 흉내 내기로서의 공부가 한없이 역겨웠고...잡다한 각주를 다는 식의 학문이 불쌍했다." 이쯤 되면 동서양의 그것들을 통달한 초인의 질타성 발언 같은, 21세기 한국 지성계를 겨냥하는 이분의 요즘 내면이 여실히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서문은 이렇게 종결된다. "훠이 물렀거라! 예수의 본심과 무관한 잡것들아!" 어림짐작으로도 당사자로 지목되는 분들은 좀 불쾌하지 않을까.

 

<예수 인문학>은 제목과는 달리 산문형식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이다. 서평으로 남기기도 그런, 읽기도 쓰기도 쉬운 책이다. 애초에 출판사와 이걸 약속했고 출판사는 이 책을 기대하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출판을 감행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들이 가시지 않아 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저런 연유로 <예수 인문학>을 삐딱하게 읽기로 한다.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저자가 주장하는 사라진 전통이라 통분해 마지않는 예수의 모습이란 넓은 의미의 인문적 공부를 폭넓게 체득한 공부와 해석을 중시한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예수전승이라 한다. 문장도 분석도 관점도 진부한 지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향연>의 동일한 저자로 믿기 어려울 만큼 옥시덴탈리즘적인 발상과 통찰이다. 이전에도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쓰려는 경향이 보였는데 결국 이런 결과를 스스로 야기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서글펐다. 이만큼 불을 지폈으니 이제 삐딱하게 본문으로 들어가자.

 

융해열

 

<예수인문학>은 총 50장에 이르는 소주제들을 간략하게 엮었다. 마태복음 중심의 적용은 34장에서 그치지만 복음서 읽기는 선별적으로 계속된다. 요상한 한자조합인 교학상장(敎學相長)과 점입가경을 붙인 1장만은 예외이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敎學相長과 마찬가지로 공부법을 물어오는 학생으로부터 조성된 생각을 덤덤히 써 내려간 글이다. 이 틈새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 역시 어리석은 길에서 혼미하게 헤맸다는 독백이다. 2장은 예수의 소년시절을 통해서 듣는 마음, 심지어 침묵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태도를 노래한다. 3장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는 마태복음의 모티프에서 비롯된 눈의 중요성이란 보는 기능이라기보다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가 숭상하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지독한 회의와 눈빛 훈련”).

 

단순성의 복합적 차원’(4)에 따르면,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마가복음 1014절을 심각하게 숙고했다는 저자는 마침내 어린이다움’(childness)의 온전한 말뜻을 깨우쳤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예수의 영성을 닮아 그렇게 천진성과 단순성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갈 존재임을 밝힌다. 단순하지만 복잡하다는 이유로 어린아이의 가난으로 회기하는 무의 상태,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전복에 근거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어린이다움으로의 전환이 아무리 지적인 섬세함을 무시하지 않는 단순함을 표방하지만 당시 사회의 가장 약하고 무가치한 존재의 표상으로서 어린아이같이에서 깨우친 다른 무엇이 이전 해석들과 다를 바 없어 밋밋하다.

 

지독한 회의와 눈빛훈련(3), 단순성의 복잡한 차원(4)에서도 보듯 제목을 그리 기호화하는 이유가 뭘까? 심오한 무엇으로 봐달라는 건지, 단지 그 같은 꾸밈의 일상을 이룬 건지 모를 일이다.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쓰려는 여전한 경향과 이 과신은 뭘까?

 

삭개오의 후일담”(5)에 이르면 저자의 난독증(?)이 재발되는 듯하다. 진골 신학자의 속살이 여간 껄끄럽지 않다. ‘삭개오를 향한 예수의 구원 선포가 성급하지 않았을까로 발생한 그의 의문은 삭개오를 향한 예수의 너무 이른 선포, 그가 열매를 맺는지를 보지 않는 신중치 못함, 삭개오의 선제적 미끼일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지은이는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예수는 냉철한 판단보다는 미완료의 희망을 거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식의 담백한 낙관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예수는 삭개오뿐 아니라 인간을 외적 표피로 파악하시는 분이 아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이미 그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다가온 것을 간파하신 분이다. 저자는 왜 예수의 구원 선포를 낙관주의로 부각시킬까? 그리스도 예수를 인간 예수로 환원하는 자기 관점의 투영은 아닐는지. 식상하다.

 

온전함에 이르는 공부”(6)는 온전과 완전에 대한 지난 오해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온전해지려면 먼저 우리의 상용 어휘에 박혀있는 고정관념을 탈색시켜야 한다....이는 그 결과로 생기는 존재론적 균열을 미봉하면서...그 연상 작용 속에 온전함은 불온한 완벽주의에 저당 잡혀 버린다.” 간증이나 설교집을 제쳐두고 신학 책을 구입할 정도의 독자라면 익히 알만한 논지를 에둘러 표현하면 이런 묘사에 환호하는 독자가 여직 남아 있을까.


저자는 용서이야기를 두 장에 걸쳐 다뤘다.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이므로 하찮은 생명에게까지 공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자들의 질문과 주기도문으로 풀었다.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자세는 극진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용서를 구하는 자만이 아니라 반대인 자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지점에서 관대와 긍휼의 예수의 심성은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른 말이다. 그런데 자꾸 저자 자신을 변호하는 글로 보인다. 공손히 용서를 비는 모습은 차체에 두고라도 잡것들아가 환청처럼 들리는 통에 아무리 신묘막측한 변을 하더라도 수긍이 쉽지 않았다.

 

주기도문 묵상(914) 이후, 보신주의와 낙관주의에 실종된 구함주어짐에 대한 관점과 언어와 분수 공부”(17)와 같이 절제로서의 분수, 즉 각자 제 분수를 파악하라는 저자가 보내는 추파가 은근하다. 언어에 관한 예수의 근원적 요지라는 것인데 아니요의 사용(5:37) 용례가 깜냥껏 시시비비에 대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 그런 강박적 사태는 화끈하게 소신껏 발언함으로 일어나는 사안이다. 언제라도 자기확증적 언어는 하나님이라도 된 오만방자한 폐쇄적 도그마에 붙잡힌 신성모독의 언어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것인데, 비굴한 언어와 동일하게 자기 확신의 언어 역시 자기 성찰을 생략한 맹세의 사생아다. 저자의 거듭되는 요점은 자기 분수를 알라였다.

 

<예수 인문학>인생 공부 예찬이라 할 수 있다. 연출된 경건이 그렇고(18) 신중한 처신이 그러하며(19) 상호주의가 그러하다(20). 열매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개신교인들에게 바라는 당부(21-23) 역시 수직적인 어조인 것을 제외하면, 위장술로 양의 옷을 입은 자들의 행함 매너리즘을 바라보며 진정성의 선행을 권하는 무색무취의 교훈을 만날 수 있다.

 

24장의 기동력과 결단력5장에서 밝혔듯이 인간 예수에 집착하는 지은이의 초점이 유랑 선교자들에게로 옮겨진 듯해 보인다. 부름을 받아 떠난 제자들인 길 위에 존재자들의 재해석을 통해 예수는 유랑 선교에 가장 중요한 자구책으로 숙식을 의탁할 후원자 확보를 꼽았다고 전한다. 10:11-14민첩한 기동력을 명시한 것이며, 신속한 기동력과 결단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 방어기재로 제시한다. 그런데 위의 진술 어디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는 제자, 주의 예비하심을 믿고 떠나는 복음 전도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전제가 지워져 있다. 단지 인생 경험이다. 저자에게 반사된 성경이란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지혜를 지목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기 당착에 빠진 제자들이 떠올랐다.


정치판은 물론이고 교회도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인력과 척력”(25),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전적인 의존과 비굴하고 체면구기는 무소유가 뒤엉킨 무소유의 참뜻”(26), 혈통가족에 대한 책임은 일차원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고차원적이라는 가족과 함께 가족을 넘어”(27), 뱀처럼 비둘기처럼(10:16)의 모순어법 속에 드러난 예수의 상황논리인 뱀과 비둘기의 아이러니”(28), 이처럼 알레고리 수준의 봉합을 넘어섰음을 공개하는 것과는 달리, 유대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간과하여 예수를 기행과 폭언의 주체로 단언한 일탈과 폭력의 아이러니”(29), 천국의 비밀코드인 성장과 도약”(30),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종교적 상투어를 해부한 자율성의 원리”(31)에서 확인되는 것은 언어는 고결하고 풍성한데 새로운 제안은 없는 반복이 이 산문집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 “종말론적 판단 유보”(32)는 심각했다. “세상을 하직하는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이 꼭 행하신다는 게 심판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생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종말론적 판단유보다.” 연역적 구성이 주는 논점과 쟁점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비견하는 자기 견해에 대한 확신이 거북했다. ‘성급한 결론에 매달리지 말 것하면 될 것을 굳이 종말론적 판단 유보라 하여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가 있을까? 대단치 않은 것을 대단하듯이 들어줘야 하는 어느 고관대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그 불편함. 가라지를 뽑지 말라하신 예수의 의도 역시(13:27-29), ‘성급함의 제지라기보다는 문맥 그대로 알곡의 보호가 더 적절치 않았을까.

 

저자가 일관되게 다루는 핵심 주제는 공부이다. 공부는 상상력이라는 동력을 제공받으나 상상력이 불가능의 벽을 뚫어내는 현장에서 종종 부대끼는 문제가 우발성이다. 그래도 우발성이 은총의 분깃으로 발현되는 앎의 영역에는 온기가 감돈다. 그러므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농부가 얻는 기쁨은 일확천금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었다(13:34). 이렇듯 인생도 공부도 발견의 기쁨과 함께 개화한다(“우발성의 은총”). 33장은 불시에 무릎을 세우게 하는 우아한 치환이었다.

 

정감법의 대화편에는 주 텍스트였던 마태복음이 제외되고 마가복음이 등장했다. 부자청년과의 대화는 이미 마태복음서에도 언급되는 것이었지만 굳이 마가복음을 올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한 선생에 있었다. 마태는 이 기사를 옮기면서 '선한 일'로 바꾼 것이 분명했다.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는 예수의 대답이 그 점을 증명한다. 나는 선함’(good)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예의 바른 청년을 부각할 심산이었을 뿐이다. 화제는 영생으로 가는 행함으로 옮겨졌다. 저자는 청년의 경우에서와 같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살피는 여유(?)가 공부의 진전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이 본문을 차용했다. 부자였기 때문에 보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 “죽음과 부대끼기에 다다랐을 때의 심정은 절박했다. 숙성된 무엇을 반드시 찾으리라.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읽고 들은 각주들의 나열만 보였다. 예수가 남긴 제3의 유산, 겟세마네 기도가 '생명에 대한 애착'이었을까?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생태적 욕망에서였을까?(p. 313) 저자가 바라보는 예수의 죽음과 기도의 부조화가 두드러진다. 예수는 어떤 고통을 호소했을까.



응고열

 

복음서를 모티프로 한 묵상글 <예수 인문학>은 일관된 흐름이 있다. 공부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발적 물음과 자기의 대답을 깨알 같은 비범한 문장으로 채웠다. 구성을 보면 글이 먼저였고 복음서의 구절들이 덧입혀진 듯하나 상관없다. 저자도 괘념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요지로 해석했다. 그야말로 본문이 먼저인 경우는 아마도 37장부터 일 것이다. 곧 파탄에 이를 부실한 성공을 부여잡으면서도 주야장창 하나님을 불러대는 애물단지를 끌어안은 사람들을 바라본 계산하는 믿음, 포기하는 용기”(14:28)39돈에 대한 지혜등이다.

 

애초부터 <예수 인문학>은 내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고의로 삐딱하게 뒤집어 읽었으나 어찌 일개 목사가 대 교수의 글과 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냥 내 방식대로 글을 탈탈 털기도 하고, 부러 비비 꼬기도 하였다. <예수 인문학>은 읽음과 동시에 잊혀지는 책이다. 이 책처럼 예열에 뜸을 들인 적도 없었지만 읽기 무섭게 빠르게 식은 기억은 별로 없다. 무슨 변고냐 하면 여기에 있는 묵상들은 오랜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분량이 채워진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단순하고 익숙한 내용을 다듬어 빛나는 문체로 바꾸는 작업에 열중했던 것 같다.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강박이 아직 남아있는지 정말로 글을 잘 쓰려는지, 좋은 글을 쓰려면 수사의 기교나 변화무쌍한 용어의 발굴이 아니라 전하려는 알맹이가 새로워야 하겠는데 전자는 풍성한데 후자는 밋밋하다. “아하!” 무릎을 치거나 가슴이 벌렁거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떨리는 그런 기대는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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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길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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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저자 임영수는 1941년 신의주에서 태어나 숭실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연세대 연합신학원을 수료한 후 스위스 융 연구소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폴 투르니에 박사와는 융 연구소에 있을 당시 직접 만나 깊은 교유(交遊)를 나누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락교회, 주님의 교회에서 목회하였으며 지금은 개신교 영성공동체인 모새골을 섬기고 있다. 2003년 1월에 ‘모새골’(‘모두가 새로워지는 골짜기’의 줄임말) 사역을 시작하였다.임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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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년 복음의 변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내년은 그 500년이 되는 해다. 구교와의 종교전쟁과 핍박 속에서도 개신교는 세를 넓혀나가며 성장 신화를 써내려왔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갱신을 표방하며 생겨난 개신교의 처음 저항정신은 퇴색한지 오래다. 이 상황에서 ‘조금씩의 진화와 개선만 있으면 되는가’ 아니면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 한가’를 놓고 봤을 때 나는 늘 후자를 생각하곤 했다. 교회는 이미, 해도 너무하고, 너무 멀리 왔다. ‘이건 정말 아니다’ 하는 정도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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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상처 입은 자들과 일구는 복음의 공동체)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소외되고, 아픔이 많은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 살아있는 경험들로 가득 차있다. 책은 공동체를 시작했던 초창기부터 현재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의 여정들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읽으면서 ‘나였다면 절대 이렇게 못살 것 같다,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요즈음 마을 공동체에 대해 관심들이 증가하고, 실제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부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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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열   <예수 인문학>은 표절논란의 중심이 된 지은이가 자신의 심정을 직간접으로 표현한 서문으로 인해 이미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책을 펴낸 곳 역시도 파란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이런 저런 이유들로 <예수인문학>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자칫 마케팅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그만큼 많았다.   서문이란 것이 대체로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 용단(?)을 미화하는 내용 일색이 아닌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분노 모드의 온건한 작동으로 보인다...
사회적 저항과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교회를 꿈꾸며 사회적 저항과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교회를 꿈꾸며
한국기독교 흑역사
강성호/짓다/방영민 편집위원


성경에 보면 모든 권세는 하늘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면 독재정권과 악한 정부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기에 우리는 피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무조건 그 체제에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숨겨진 뜻과 드러난 뜻이 있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정부와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열매들과 삶을 보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기득권을 확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세우는 성경적 비전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세우는 성경적 비전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브라이언 왈쉬/새물결플러스/송광택 편집고문


저자는 먼저 현대문화가 들려주는 ‘진보’에 대한 신화를 지적한다. 이 진보 신화는 현대문화, 특별히 서구문화에 내재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이 진보라는 신화는 교과서에 은밀히 녹아 있고, 광고 속에 묘사되고 있으며, 도심의 고층 빌딩에 우뚝 솟아 있으며, 대학 강단에서 전파되며, 정당의 공약으로 선전되고 있으며, 드라마와 뉴스에 의해 친절하게 연출되고 있다.”(19쪽) 이 진보라는 신화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과학지상주의, 기술지상주의, 경제지상주의라는 세 가지 신을 섬긴다. 그리고 가능한 한 ...
환영보다는 거절을 양쪽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은 책 환영보다는 거절을 양쪽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은 책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스탠리 그렌츠/새물결플러스/문양호 편집위원


1. 세 권의 책   한국적 상황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며 토론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영역들이 있다. 아무리 합리적인 의견을 내어도 상대의 의견을 한쪽으로 규정하고 그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 가장 핫한 것이 바로 이 동성애의 문제일 것이다.   최근에는 퀴어 퍼레이드로 인해 토론을 넘어 물리적인 대결의 현상마저 나타났고 양쪽은 서로를 용서 받지 못할 최악의 죄인, 또는 호모포비아로 규정하고 혐오하는 모습들이 벌어졌었다,      예전에 존 스토...
서평을 쓰기 싫은 책, 서평을 쓸 수 없는 책 서평을 쓰기 싫은 책, 서평을 쓸 수 없는 책
오두막
이재영/IVP/문양호 편집위원


서평을 쓰기 싫은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이 서평을 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평을 쓰기에는 내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이 글은 서평은 아니다. 그보다는 굳이 이 글의 성격을 이야기한다면 나의 변명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 주변적 이야기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있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 자체를-재미이건 기분전환이건―위해서이거나, 아니면 지식습득을 위해서이거나―그것이 어떤 분야이건, 주요 영역이건 지엽적 영역이건 간에 내겐 이런 지...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김영란/창비/문양호 편집위원


나름 제자로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질문해보자.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법은 무엇인가?당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영역까지 적용해야 할까?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교회를 넘어 이 세상까지 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질문을 더하면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이에 대해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순교도 감수해야 할 것이고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열심히 달리다 길을 잃은 설교자들에게 열심히 달리다 길을 잃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복음 중심적 설교의 설계와 전달
줄리어스 킴/부흥과개혁사/조영민 편집위원


매주 설교하는 사람이 되면, 자동으로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다. 내가 설교를 못하는 이유는 설교할 만한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막상 설교를 매 주 몇 편씩 하는 자리에 서게 되니, ‘설교가 무엇인지’,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지’에 대한 의문이 더 커진다. 하면 할수록 내가 하고 있는 설교의 행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 위험한 것 같다. 굳어진 나의 잘못된 습관들을 전혀 문제라고 여기...
국가라는 종교의 희생제물 국가라는 종교의 희생제물
전사자숭배
조지 L. 모스/오윤성/문학동네/방영민 편집위원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적에게 큰 피해와 함께 공포를 불러일으킨 특공대가 있으니 가미가제(신풍神風) 특공대이다. 그 이름답게 그 옛날 신풍이 불어서 일본을 보호해 주었듯이 일본을 보호하고 지키는 인간무기가 되어라는 신적인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이 전쟁 막바지에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비열한 방법이고 실제 이것으로 꽃다운 나이에 젊은 청년들이 적함을 향해 폭탄으로 날아갔다.   가미가제는 성지황순(誠至皇殉)이라 하여 천황이 원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바쳐 이루리라는 마음으...
당신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당신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성서유니온/송광택 편집고문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구성 요소들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의 각 요소들을 받아들이려면 그것이 속한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이런 큰 그림을 보게하는 데 이바지한 분들이 있다. 그들은 20세기의 위대한 평신도 신학자 세 명인데, G.K. 체스터턴, C.S, 루이스,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L. Sayers)가 그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놀랍도록 잘 포착했고, 그것을 힘이 넘치는 글, 기억에 남을 이야기, 생생한 비유를 통해 일상생활과 잘 연결시켜 ...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환영과 거절사이에서
스탠리 그렌츠/새물결플러스/박예찬


얼마 전 서울에서 퀴어축제가 열렸다. 얼마 전 미국의 한 게이 바에서는 총기 난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동성애가 큰 이슈거리가 되고 그에 따라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의 영적 전쟁 대상은 동성애로 삼고 있는 듯하다. 강단에서는 “동성애를 막아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통과되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이 수시로 언급되고, 기도 시간에는 동성애라는 사단의 전략을 무너뜨려 달라는 기도제목에 회중들이 아멘으로 긍정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이런 동성애 정죄를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인...
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기적의 고전 독서법
김병완/북씽크/송광택 편집고문


“우선 제 일급의 책을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읽을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말이다.   소로는 “우리가 이왕 글자를 배운 이상 문학에서의 최고의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고전이 꼽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월의 마모에서 초연한 고전은 그것 자체로써 벌써 무게와 기품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이론보다 사상의 힘으로 버티어온 지혜의 책들이다.   고전은 인류의 가장 고귀한...
기쁨은 처음부터 당신 것이었다 기쁨은 처음부터 당신 것이었다
누가 내 기쁨을 훔쳐갔을까?
산드라 스틴/서진희/베드로서원/김정완 편집위원


성경 말씀에 따르면 기쁨은 본원적으로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기쁨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쉽게 양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자주 기쁨의 자리에 두려움, 걱정, 좌절 등 부정적인 태도들을 가볍게 허용한다. 그 결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좌절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 걸까?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 존재로 창조했다.(창세기 1:31) 창조 목적대로라면 우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늘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살게 되...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박영돈/IVP/문양호 편집위원


“네가 말 돌리고 내가 말 돌리면 서로 딴 이야기가 되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대학교 때 친한 친구랑 서로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 돌리다가 친구가 답답해서 한 이야기였다.그런 것 같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프더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대화가 된다. 서로 안다는 이름하에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의사가 “암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갑상선 암이든, 위암이든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하고,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이야기할 때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대...
내 영혼의 등불이 되는 신앙의 초석 내 영혼의 등불이 되는 신앙의 초석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데이비드 홀/나용화/개혁주의신학사/김재윤 명예편집위원


한국  개혁주의신학사(P&R)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무게감 있는 신학 저서들은 탁월한 가치를 지니는 귀한 책들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설교자로 손꼽히는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저술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였다.   서구 개혁 교회는 보편적으로 30대 초반에 담임 목회를 시작한다. 칼빈은 병약한 사람이었으나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에 전 생애를 드렸다. 칼빈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실상 칼빈은 인간미를 갖춘 따뜻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기독교가 이상한 ...
동성애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모색의 길을 나서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모색의 길을 나서다
환영과 거절사이에서
스텐리 그렌츠/김대중/새물결플러스/방영민 편집위원


퀴어축제가 서울역 광장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더 크게 더 과감하게 열렸다. 그들이 하는 성행위 묘사와 춤과 퍼포먼스를 보면 속이 불편할 정도로 문란하고 노골적이고 퇴폐적이다. 민주주의와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신들의 소리와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할 수 있다고 얼마든지 인정이 되나 꼭 그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지 묻고 싶고 오히려 그런 인권을 가장한 음란한 방법이 그들에게 손해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이에 질세라 일부 기독교단체에서는 축제 반대편에서 전시도 아닌...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이민아/이후/김정완 편집위원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대상물에 대한 여하한 해석에 반대한 수전 손택의 다분히 논쟁적인 책이다.   개인적으로 2004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뒤로 그의 책을 다시 잡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타인의 고통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화의 파괴적 양상과 기형적 몰골을 예리하게 비판한 그 책은 어처구니없게도 문장의 호응관계와 의미를 거듭...
다시 교회를 소망하며 다시 교회를 소망하며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박영돈/IVP/조영민 편집위원


저자의 전 작품과 조각글들을 여러 번 접한 적이 있었다. 깊이 있는 사유와 미려한 문장, 그리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그의 선명한 표현이 좋았다. 그러던 중에 저자가 수년 전에 쓴 이 책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저자는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그 문제점과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들을 이 책을 통해 전한다. 내용에 공감이 갔고, 저자의 독특한 위치가 이 책의 내용에 생명력을 주었다. 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단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특히 성령론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특이한 것은 그가 교수인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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