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냅니다.”
15년 전쯤의 일이다. 모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던 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토론 책자를 선정된 〈제자도〉를 발제하게 됐다. 선교단체 회원들은 물론 나 또한 〈제자도〉를 언뜻 보고 가볍지 않은 부피와 가볍지 않은 내용, 그리고 당시로선 생소한 주제 등에서 의외라는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우린 모두 그 책에 빠져들었다.
여름날을 맞아 외갓집 식구들과 우르르 갯가로 몰려간 날, 물에 반쯤 잠긴 풀 속에 반도(고기 잡는 도구)를 밀어 넣어 민물고기를 잡던 그날의 경험을 〈제자도〉에서 대부분 고스란히 건져낼 수 있었다. 맨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고기들이 반도를 힘차게 들어 올리면 그 안에 마리마리 들어있었다. 〈제자도〉가 그랬다. 겉으론 제대로 보이지 않던 보석들이 읽으면 읽을수록 한 움큼씩 쥐어져 나왔다.
또 한편의 〈제자도〉가 그 때 일을 떠오르게 하면서 사람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자도〉는 데이빗 왓슨이 저자로 그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설교가이자 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후자의 〈제자도〉를 쓴 존 스토트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저자는 다르지만 교계에서 받는 대접(?)은 유사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전자와 후자가 발간된 시점의 시대적 배경 정도일 것이다.
복잡다단한 현대세계의 다종다양한 상황들에 성서적 견해로 일침을 가하고 분명한 성경해석으로 경종을 울려왔던 존 스토트는 이번 제자도에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전부 담았다. 조금 의외라는 생각은 저자의 시선이 정치와 생태계 위기, 국제적인 개발 등에 미치고 있다는 데서 왔다.
일견 제목만으로 성경에 국한한 복음전도용으로 기술되었을 것이란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간 때문이었다. 그리곤 이내 생각을 곧추세웠다. 생의 마지막에 이 땅에 남길 유언을 한 두 항목에 국한할 수 있었으랴! 목자의 심정으로 이 땅을 바라본 노학자이자 성경선생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창세기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셨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하루아침에 좋지 않게 됐다. 원인 제공자는 사람이었다. 이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게’ 변했다. 그렇게 세상은 사람과 더불어 멸망의 끝을 향해 끝없이 질주했다. 브레이크를 잃은 열차처럼 사람과 세상의 끝은 너무도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열차를 멈출 수 없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죄악의 힘이 사람을 완전히 지배한 이상 끝장을 보아야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선언이 그 끝을 알렸다.
바로 그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는 인류 구원의 메시지이자 복음이었다. 또한 이 땅의 회복에 대한 선언이자 천국도래의 선포였다. 저자가 평생 목적한 바가 그것이었다. 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기본진리였다. 그는 그 사상을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각종 강해서에 담긴 진리 또한 다르지 않았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저자가 마지막 순간 이 땅을 향해 풀어놓을 대언의 영이 이 책 안에 담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사명을 알고 헌신해온 저자의 묵직한 유언을 활자로 대하는 심정이 남다르다. 들려줄 말이 많았던 만큼 두께 또한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1장 불순응, 2장 닮음을 이어 8장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 장은 7쪽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분량은 적지만 밀도는 상당하다. 짧은 문장에 담은 힘 있는 문체는 둔중하고 심장을 파고드는 도(道)는 끝을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로 깊다. 157쪽의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저자
존 스토트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이자 목회자요 저술가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주임사제로 30여 년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을 입안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에 적극 주도해 왔다. 런던 현대 기독교 연구소(London 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를 설립하여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쳐 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광범위한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설립한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펴 나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라 칭했고, 전기 작가 존 폴락은 “사실상 전 세계 복음주의의 신학적 리더”라고 했다. 2005년 “타임”(Time)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한 바 있다.
구십 평생 제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2011년 7월 27일 오후 3시 15분 런던 바나바 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 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