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추천도서
기도란 이런 것!

고전이 주는 진중하고 웅숭깊은 신앙의 세계 선보여
도구는 저마다 쓸모가 있습니다. 주방 기구를 예로 들면 숟가락은 밥이나 국 등속을 푸는 데 쓰고 젓가락은 반찬을 집는 용도로 씁니다. 냄비로는 음식을 끓입니다. 이 외에 각종 그릇이나 컵 등도 각기 고유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십 수 년 전부터 신앙서적분야에도 섹스, 돈, 이성문제 등 다양한 소재를 정면에서 다룬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각종 기구들이 주방에 제 자리를 넓혀가는 것처럼 신앙서적도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보기 좋은 일입니다.
이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주방기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물품군이라도 그 각각에는 대표적인 물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방기구로 치면 식기와 수저가 그런 것들이지요. 신앙서적 분야에선 어떤 소재가 각광을 받고 있을까요? 크리스천들의 수만큼이나 그 답도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으로 예배와 기도, 찬양이 손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배와 기도, 그리고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한편으론 그런 소재들이 끊임없이 갈증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문제와 같기도 할 것입니다.
특정 사안에 부딪혀 답을 구하는 독자라면 꼭 집어 말해주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런 책들이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분들도 적지 않을 거구요. 하지만 대부분 그런 책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읽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은 책들이 한해에도 수백 종이 쏟아져 나올 뿐 아니라 설사 그 전부를 읽기로 작정했더라도 어떤 책이 그런 책인지 고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거나 서평을 통해 접근하거나 아예 발품을 팔아 고르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요즘 출판경향을 보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가려운 곳을 직접 긁어주는 책들이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현실적 조명이 덜한 고전이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고전은 덜 읽히거나 잘 취급되지 않습니다. 고전이 독자와 출판계 양측 모두에게 홀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전을 전부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고전은 고전대로 읽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를 들라면 먼저 ‘곰삭은 맛’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전은 요즘의 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전개와 반복 또는 부연 설명이라는 핸디캡이 있습니다. 반면 고전은 인간성에 내재된 보편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시야를 갖고 있습니다.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샘솟는기쁨 간)의 서평에서 전 그와 같은 고전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 둔중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작가정신이 심해처럼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드리운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평가에 변함이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책, 《스펄전의 기도레슨》 또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당장의 성과를 얻는 데 기술 위주의 훈련이 더없이 요구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기본기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최근 활강스키 국가대표팀이 이름난 외국코치를 영입해 기본기를 닦는 데 여념이 없는 것만 봐도 근원적인 치유 없이 성적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읽을 수 있습니다. 《스펄전의 기도레슨》 이 요즘 출판되고 있는 기도 관련 서적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그런 점입니다.
읽는 내내 내적으로 차오르는 사유와 거기서 비롯된 성찰적 깨달음, 연이어 터지는 탄성과 돌이킴의 결단 등에서 이 책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속도감을 차압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이 책에 내장된 무게감이 상당함을 의미합니다.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장에는 중심인물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야베스, 다윗, 솔로몬, 욥을 통해 그들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떻게 기도하고 그 결과로 무엇을 얻었는지 상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 인물들은 여러 책과 글에서 자주 인용되고 소비된 탓에 독자들이 사전지식에 의존해 설핏 지나치기 쉽다는 점에서 저자가 이들을 중심 테마인 기도를 설교하는 데 끌어들인 것 자체가 모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야베스의 기도를 설명하면서 영역본에 있는 ‘진정으로’ 라는 부사를 활용해 “주께서 진정으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에 이어지는 기도의 맥락을 풀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저자의 방점이 어디에 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가 사전지식이나 선입견에 의해 자주 놓치곤 하는, 하지만 무척 중요한 부분을 깨닫도록 그와 같은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기도에 관한 한 두어 줄에서 수십 장을 쓰거나 말할 정도는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궁극적으로 기도가 지향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이르게 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는 녹록치 않습니다. 지식은 행동을 수반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입니다. 아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돼지에게는 여물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진주라도 돼지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 자체보다 그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실제적인 관계의 설립과 회복입니다.
저자는 야베스가 아들들에게 진정으로 복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이름은 특정인의 성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 이름에 담긴 성품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아들인 아브라함에게 똑같이 복의 근원됨을 선언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확신한 야베스는 어느 누구보다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진정으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으로 시작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복을 주기나 하실까?' 하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롯한 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확실하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 안에 보다 큰 꿈을 담으려는 적극적인 신앙의 산물입니다.
고전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적 측면을 겨냥하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성품을 기초로 서서히 하지만 단연 묵직하게 독자 앞에 드러내는 진중한 의식 같은 것에서 고전은 단연 압도적입니다. 다른 말로 기독 고전은 책에 담긴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다윗과 솔로몬, 욥의 기도는 독자 여러분들이 밟을 여정의 몫으로 남겨놓겠습니다.
누런빛의 곡식들이 알곡으로 여물어 어느 때보다 그 색을 완연히 표출하는 이 가을에 추수하듯 영 안에 기도라는 열매를 하나 가득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이 그 길에 확실한 발판과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때론 너른 길도 천천히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여느 때와 달리 사색과 성찰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이 가을이 그렇습니다. 지난 계절 거침없이 또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면 이젠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뒤돌아봐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크리스천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누수가 없었는지 제 안을 촘촘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넉넉히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이 당신에게 곡식을 영글게 하는 더없이 풍요로운 햇빛의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