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추천도서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오늘 새벽 매서운 추위를 뚫고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돌아오니 침대 위에서 아기가 엉덩이를 내밀며 뱃속에 있었던 모습처럼 아주 편안하게 천사처럼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한 모습과 함께 이런 추위속에서 제대로 된 이불 하나 덮지 못하고 추위에 떨면서 자고 있는 아기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시리아 난민 3살 쿠르디가 보트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다 파도에 휩쓸려 시체로 떠내려와 세계를 안타깝게 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똑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이땅에 아기들은 모두 집중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데 한 아기는 침대에서 추위를 모르고 꿈속을 노니는데 한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전쟁을 경험하고 음악 대신 총소리를 듣고 자란다. 자의식도 미숙한 나이에 목숨을 걸고 대양을 건너야하는 생의 고문을 견뎌야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에서 인간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어져야하고 무조건 환대를 베풀어야한다고 하는데 이 세계는 이런 평등과 환대가 이미 오래전부터 파괴되고 부셔져 있다.
저자는 21세기가 당면한 이슈인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 찾는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에 더 가까울 것 같은 주제를 저자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진지하게 성찰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코즈모폴리턴이란 한 인간은 이땅에 지역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또한 우주에 속한 사람이라는 소속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국적이나 신분이나 나이나 문화에 상관없이 이땅에 태어난 인간은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이 사상이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길이라고 설득한다.
무서운 선언
또한 저자는 이 평화를 위한 길을 종교의 영역으로 넓히는데 종교는 무엇을 믿는가보다 어떻게 행하는가가 더 본질적인 것이라 설명한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제도화된 종교로 교회를 절대선으로 간주하여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을 져버리는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가르치고 지시하는 정신인 타자를 향한 사랑과 환대 그리고 공동체가 없는 자들까지 책임지고 연대하는 삶을 사는게 참된 것이라 한다.
실제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교회에 등록하거나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맹목적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허점이 보인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교리에 정통하고 교회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주장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했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이웃 사랑, 환대, 용서의 길을 의미한다. 그 불가능성에 자신을 열정적이고 철저하게 투신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인종적, 국가적,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 연민의 시선을 끝없이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것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성찰해야된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신앙의 진실성과 기독교의 가치는 구체적인 일상에서 타자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 증명된다고 한다. 타자를 향한 환대와 보살핌, 타자와의 연대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섬김이 참 종교라는 말이다.
물론 나는 저자가 말하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종교의 의미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을 말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사랑, 책임과 연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동의가 되었다. 기독교가 사람이 만든 법과 질서로 제도화 되어서 폭력적 차별과 정죄를 하거나 권력으로 살인을 하는 근본주의를 탈피해야된다는 것도 수긍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이 말이 기독교에서는 무서운 선언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배고프고 헐벗고 병든 사람을 돌봐야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가치이기에 이 선한 사업이 기독교의 특징이 될 수 없다고 보였다. 또한 인간은 공평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공평하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구제해야하고 어디까지 경계를 넘어서 이웃을 포함해야 하는지 그 목표지점이 상대적이고 흐릿하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로 기독교가 참 종교로 인정되어진다는 것은 기독교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전락시킨다고 보여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실천해야하고 무엇까지 주어야하는 것인가?
또한 저자는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심판 이야기를 예로 들며 우리의 최후 심판의 기준이 차별 없고 조건 없는 무제한적 환대가 최후심판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성만찬 사건을 설명하면서도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에게 제공하는 행위도 나를 따르는 길은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영생과 구원은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환대하는 것이라한다.
우선 필자는 저자의 코즈모폴리터니즘과 환대의 관점으로 이 본문을 해석한 것에 대해 새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연 우리의 최후심판이 소자에 냉수를 주었나 안주었나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기독교가 너무 도덕적이고 감정적으로 보였다. 저자의 너무 윤리적인 해석이 신학을 무너뜨리는 것 같다는 우려가 되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가운데 이루어지고 성령의 역사함으로 중생되어 보증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 확신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논리가 우리의 신학을 흔드는 것처럼 위태하게 느껴졌다.
반전
필자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이 21세기의 꼭 필요한 사상이고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하는 체계라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와 하나되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연민의식으로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좋은 방법이고 길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이 사상이 인류가 원하는 사상이 될 수 있겠으나 인류를 구원하는 사상이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계를 구호하는 운동은 되겠으나 세계를 구조하는 유일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다양한 문제들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이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이고 모두가 가족이라는 의식으로 처리하고 해결해가야 할 문제들이다. 구지 통계자료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전쟁으로 총체적인 병이 들어가고 또한 점점 이상해져가는 기후는 지구를 점점 거주하기 힘든 땅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시대속에 ‘함께 잘 살기’는 더 요원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저자의 주장이 참으로 신선했다. 책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더구나 단순히 우리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사랑하자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 고대와 근대와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의 주장을 예로 들며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설명해가는 저자의 학문성과 깊이에 감탄하였다. ‘호모 사케르(목숨만을 유지한 생명-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아무런 정치적 법적 보호가 없는 인간)’같이 처음 접하여서 어려울 수 있는 단어들도 쉽게 가르쳐주어서 새로운 개념을 배워서 지적 영역이 넓어지는 기쁨도 있었다.
그중에서 저자는 인류 문제 해결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위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절멸성(mortality)과 탄생성(natality)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네이털리티의 인식론적 변화가 있어야하지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동의가 되었다. 후자는 사실적 네이털리티와 정치적 네이털리티 그리고 이론적 네이털리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실적은 인간의 육체적 탄생이고 정치적은 행동적 공간으로서의 정신적 탄생을 의미하고 이론적은 인간의 내면세계가 지니고 있는 희망적인 능력이다.
저자는 이 세 개의 네이털리티가 세계를 사랑하고 인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나와 타자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인류를 희망적이게 만든다. 어떤 고난속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렇게 당연히 죽어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대가 인간사에 소망을 불어 넣는다. 세계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그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기적이 일어나면 새로운 존재가 되고 그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저자가 주장하는게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장이 아니였구나하는 점을 파악했다. 세계가 파괴되고 심각하게 훼손되었어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네이털리티, 즉 인간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아무리 조직이 변하고 구조가 건강해도 구성원이 모털리티로만 인식되는 사회속에서는 변화가 없고 서서히 변질되고 왜곡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 멤버가 새 존재가 되고 이웃이 새로운 존재로 인식이 되어 서로 연대가 된다면 사회가 변하고 세계가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네이털리티는 중생이고 거듭남이다. 이것은 무너지는 세계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기적의 문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와 하나되는 것은 도덕과 윤리도 아니고 구조의 변화도 아니고 네일털리티를 통해서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존재로의 기대와 희망이 있어야지만 변화될 수 있는 일이다.
실제 성경에서도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가서 내가 너의 집에 유해야겠다는 것은 버림받고 소외된 삭개오지만 예수님은 그를 다르게 인식하고 네이털리티로 받아들이셨다. 바울도 이방인을 더 이상 유대교가 여기는 지옥불에서 땔감이나 될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며 모두가 하나이고 주님 안에서 성전을 짓고 완성해 갈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에게 주님을 만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인식론의 변화였다.
결론
우리는 현재 다양한 종교가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전쟁을 해왔고 소수자들을 향해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군같은 모습도 있었다. 네이털리티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 왜곡된 신관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고 나쁜 종교로 인식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폭력적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지시하는 것을 따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제는 인식론적 변화가 필요하다. 코즈모폴리터즘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인간들을 분리시키는 다양한 경계를 넘어 서로 연대하고 환대하고 책임적 삶을 사는 삶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을 살리는 초청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는 배제에 강하고 포용이 약하여 사회에서 지탄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십자군의 정신을 극복하고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는 전망이 보였다. 이 책을 통해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21세기에 어떻게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 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의 글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