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추천도서
구원을 넘어 평안까지
어릴 적 중1때 참석한 교회 중고등부 여름수련회의 기본 주제가 함석헌의 『성서로 본 조선역사』였다. 그때에 하루 두 번씩 아마도 한 시간 반 정도는 족히 했을 강의를 꼬박 채우고도 모자라 교회에서 나머지 강의를 했을 정도로 꽤나 긴 분량을 당시 전도사님이 열정적으로 풀어나갔다.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들어도 아무것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열심히 들었고 한으로 풀어낸 조선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슴깊이 새겨져 나름의 사고나 책읽기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던 것 같다. 그때 강의를 들으며 등장한 성서조선과 김교신,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사상적 출발점이 되었을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언급도 얼핏 들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난다. 감명 깊게 들었다는 것과 그것을 소화해낸다는 것은 다른 것이기에 함석헌의 저작을 읽기에는 수년의 시간이 좀 더 필요했고 내게는 우치무라 간조의 책이 더 빨리 다가왔다. 그것도 전혀 다른 길을 통해서...
우연히 접하게 된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과 그 외에 소설들, 그리고 그녀가 쓴 ‘길은 여기에’의 연작과 성경관련 서적들을 보며 그의 신앙의 행로를 좇아가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우라 아야코의 책을 낸 출판사의 문고시리즈에 같이 있는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우치무라 간조라는 일본식 표기 대신 한자로만 內忖監三이란 이름으로 저자가 적혀있는 『구안록』으로...(당시 미우라 아야꼬도 三浦綾子라고 저자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었다).
우치무라 간조와 內忖監三를 연결짓는 능력은, 부끄럽지만, 그 당시에 내게 없었고 당시 중학교라는 나이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것도 함석헌을 통해서 김교신의 감동적인 생애는 박혀있었지만, 우치무라 간조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럼에도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내게는 상당히 인상적인 책으로 박혔다. 후에 읽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 만큼이나 신앙의 중심을 건드렸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처럼 청소년 시기의 정서에 한 장의 생각을 더한 책으로서 자리했다. 구원이란 말 대신 구안이란 독특한 표현은 더 독특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저자는 구원이란 피상적인 의미일 수 있는 것을 넘어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일을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이 얻기를 바랐던 것 아닐까? 물론 구원은 피상적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성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이나 관념적 신앙에 대한 접근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착각신앙이나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속에 있을지 모른다.
주변을 돌아보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고 교회에서 중직자나 심지어는 목회자로 사역하며 봉사함에도, 또 구원의 확신을 물으면 구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평안하냐고 물으면 주저하는 경우를 꽤나 본다. 그러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속에 구원이 주는 축복을 깨닫지 못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그저 입으로의 시인에서 멈추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묵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구원받았다면 평안은 필수적이기에 구원을 통한 평안을 누리지 못함은 결국 무언가 내 신앙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기에 저자는 구원의 깊이로 들어가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1부에서 그가 직접 구도하는 자로서 걸었던 신앙의 갖가지 행로의 시행착오를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것들이 쓸모없고 또 그러한 길이 잘못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의 그러한 행보는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걸었던 행보만큼 흥미롭고 진지하며 필사적이다.
2부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제 평안을 얻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보여준다. 일종의 변증법적 접근을 하는 저자의 방법은 지금의 독자들과는 시대적 간극으로 약간은 원론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수 있다. 깊이 있는 사색이나 진지함보다는 감각적이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는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저자의 진지함과 몸부림일 것이다. 독자의 귀를 간질이는 많은 신앙서적 아닌 신앙서적들은 독자들의 상처를 가리는 반창고를 붙여줄 지는 모르지만 정작 그 병을 치료하는 길로 이끌지는 못할 수 있다. 또 영접기도는 드려도 주님 앞에서까지 무거운 짐을 계속적으로 지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내게는 잊고 있었던 방황의 나날들에 썼던 일기장의 한쪽과 첫사랑을 보게 해준다.